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37화 (166/686)

2권 12화

제7장 태동(胎動)(2)

“도전하겠다고?”

장기린이 두 눈에 이채를 띄고 소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놀라고 있어.’

아마 생각보다 도전이 빠르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소호는 뿌듯해지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 동요하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계속해서 감자를 깎고 있는 장기린의 손놀림으로부터 시선을 떼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이상해. 그러고 보면 어릴 적부터 그랬어. 저건 보면 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야.’

사각거리며 떨어지는 감자 껍질과 유려하게 움직이는 작은 나무칼.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소호는 문득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침상에 누워 있다가 바퀴벌레가 기어가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다.

바퀴벌레는 매우 작다.

아무리 크다고 해도 손가락 두 개의 크기를 넘지 못한다.

그런데 그렇게 작은 바퀴벌레가 기어가면서 내는 소리는 그 당시에 천둥 번개보다도 더 강렬하게 소호에게 다가왔었다.

귀로 들리는 것을 넘어서 뼛속까지 파고든달까.

솔잎으로 방바닥을 쓰는 정도의 소리에 불과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작은 벌레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했었다.

소호는 그날 잠을 자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었다.

‘저것도 그래.’

칼날을 박아, 얇게 밀어내고 툭 끊어 내는 동작이 한 호흡 만에 진행되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저 동작의 위대함을 아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는 귀중한 광경이다.

‘그래, 저게 반 호흡.’

소호는 깨달음을 얻었다.

정답은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장기린의 손에서 마지막 감자가 속살을 뽀얗게 드러낸 채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장기린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바로 시작할 테냐?”

“……응, 바로 시작했으면 해요.”

소호는 크게 숨을 한번 들이쉰 뒤 전력을 다해 뛰쳐나갔다. 그리고 두레박을 걷어찼다.

“흠?”

장기린이 의외라는 듯 두레박을 쳐 내는 순간, 소호는 급히 멈춰서며 눈과 귀를 막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

장기린의 반응은 빨랐지만 이변(異變)은 그보다 더 빨리 벌어졌다.

충격을 받은 두레박이 코앞에서 폭발해 버린 것이다.

강렬한 폭음이 풍운객잔 전체를 뒤흔들었다.

박살난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소호는 다시 눈을 떴다.

뿌옇게 피어오른 연기 사이로 멀쩡하게 서 있는 장기린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감자를 깎던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다.

“미리 화탄을 숨겨 뒀던 건가.”

목소리에서 작은 경탄이 느껴진다.

소호는 씩 웃었다.

희망이 보였다.

펄쩍 뛰어올라 장기린을 향해 용감히 달려들었다.

약속대로 장기린은 피하지 않았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소호의 공격을 하나도 빠짐없이 손바닥만으로 쳐 냈다.

정권, 원앙각, 선풍각, 정신없이 몰아쳐도 장기린은 한 손만 휘둘러서 공격을 모두 막아 냈다.

“칫!”

소호는 분한 얼굴로 뒤로 물러나는 척하다가 품 안에서 미리 준비했던 나무칼을 하나 집어 던졌다.

장기린은 반응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를 노린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무칼은 엉뚱하게도 옆에 있는 우물로 날아갔다. 소호는 장기린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긴장하며 기다렸다. 철컹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야압!”

소호의 기합성과 함께 우물 속에서 거대한 낫이 솟구쳤다.

“……!”

이번 만큼은 장기린도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낫이 쇠사슬에 매달린 채 반월형의 궤도를 그리며 장기린의 정수리를 내리찍고 있었다.

‘좋아, 겸자 발동.’

소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광 노인이 만든 기관함정은 위력이 대단했다.

장기린은 피할 것인가 막을 것인가.

소호는 그에 대한 결론이 나오기도 전에 용맹하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장기린과 겸자 사이로 뛰어들었다.

공격과 공격이 부딪치는 틈. 원래 가장 큰 위험 속에 승기(勝氣)가 숨어 있는 법이다.

터엉!

‘쿠웅’ 하고 거센 진동이 땅바닥을 뒤흔들었다.

백 근이 넘는 거대한 낫 공격은 허공에서 멈췄다.

장기린의 오른손이 칼날을 붙잡은 채다.

‘역시!’

소호는 마치 곡예를 하듯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장기린과 우물 사이를 빠르게 미끄러져 지나쳤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고, 장기린의 의아함과 경탄이 섞인 눈빛을 마주했다.

소호는 환하게 웃었다.

한 손에 거대한 낫을 붙잡은 채, 천신(天神)같은 위엄으로 서 있는 아버지.

그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호가 서 있던 그 위치에서 연속된 폭음이 미친 듯이 터져 나왔다.

펑!

쾅! 콰과과광!

폭음의 원인은 땅바닥이었다.

땅속에 묻혀 있던 화탄들이 겸자를 받아 낸 충격으로 한꺼번에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물가 주변 삼 장(丈) 간격이 초토화되었다.

매끈한 자갈들로 포장되어 있던 마당은 전쟁터마냥 처참한 몰골로 바뀌었다.

화탄 화연(譁然)의 위력이다.

박살난 자갈 파편은 그 자체로 흉기였다.

우물을 박살낸 것은 물론이고, 대죽(大竹)으로 감싼 담벼락을 무서우리만큼 완전히 무너뜨렸다.

잠시 후 짙은 흙먼지가 가라앉았고 그 속에 서 있는 장기린의 모습이 드러났다.

장기린의 모습은 포탄이 터지기 전과 비교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한 손에 거대한 낫을 붙잡은 채 장승처럼 우뚝 서 있는 모습 그대로다.

온몸 어디에도 손상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완전무결(完全無缺)

장기린은 화탄의 폭풍 속에서도 조금도 상처 입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헌데 장기린은 한탄했다.

씁쓸하다기 보다는 약간의 기쁨이 묻어나는 한탄이다.

장기린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아직까지도 뿌옇게 먼지가 흩날리는 아래쪽.

바닥에 납작 엎드린 소호의 왼손이, 흙먼지 범벅이 된 채 장기린의 바지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히힛, 성……공.”

‘휙’ 하고 고개를 든 소호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잔뜩 지친 주제에 칭찬을 바라는 눈빛이다.

장기린은 시선을 움직여 소호의 전신을 살폈다.

오른손에는 폭발 직전까지 없었던 밧줄이 들려 있었다.

장기린은 폭발하는 순간에도 똑똑히 확인했었다. 소호는 파편이 쏟아지는 순간, 복부에 둘둘 감아 숨겨 두었던 저 밧줄을 끌러서 회오리 모양의 나선을 그리며 파편들을 위로 쳐 올렸던 것이다.

‘완벽하지도 않은 초식으로…….’

최근에 배우기라도 한 것일까.

소호의 전신은 상처투성이였다.

장기린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아들은 완벽하지도 않은 무공 하나만 믿고 폭발의 범위 안으로 뛰어 들어와 기어코 그의 바지자락을 잡아챈 것이다.

‘게다가 반 박자 빨랐지.’

가진 바 모든 것을 쏟아라. 반 박자 빠르게 움직여라.

전에 해 줬던 조언을 순수하게 그대로 실천한 모습이었다.

제자로서는 만점짜리 소년이다.

어떤 아버지가 기쁘지 않을까.

‘안 돼, 안 되지. 지금 칭찬해 줘선 안 돼.’

장기린은 무심코 어깨를 두드려 줄 뻔했던 그의 손을 다시 애써 내리고 엄격한 목소리로 질책했다.

“어설퍼. 이렇게나 난장판을 만들고 나서야 겨우 바지자락이나 붙잡는 거냐.”

눈을 반짝이던 소호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장기린은 가슴이 시큰거리는 감정을 애써 외면했다.

“으으,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였다고요.”

“정정당당하게 깼어야지. 조금만 더 수련하면 신체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언제요? 한 삼 년 뒤예요?”

“…….”

“으으 거 봐! 그럴 줄 알았어!”

소호가 부루퉁한 얼굴로 억울해했다.

“그래도 성공했으니 딴 말하기 없기예요?”

“딴 말이라니?”

“나가 놀게 해 주는 것!”

생각만으로도 즐거운 것일까.

소호는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이제 흑석촌도 가고 으왓, 배, 백송촌도 갈 거예요!”

소호는 벌떡 일어나다가 긴장이 풀렸는지 잠시 비틀거렸다. 그래도 일생일대의 승부를 거는 듯 잔뜩 긴장된 얼굴로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렸다.

“훗.”

그 모습이 꽤나 귀여워서 장기린은 작게 웃고 말았다.

“왜 웃어요!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

“그래.”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호의 눈이 커졌다.

“인정했어요!”

“그래.”

“히힛! 아자잣! 이겼다아아아!”

소호는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드디어! 처음으로! 저는 아버지 말대로 했어요! 가진 바 모든 걸 쏟아부었다고요!”

“그래, 잘 봤다.”

“드디어 아버지 옷자락을 잡았다고요!”

소호는 마당을 뱅뱅 돌았다.

“소호야.”

“네?”

“고생했다.”

‘끽’ 하고 소호가 멈춰 섰다.

맑은 눈빛, 환한 웃음을 지은 채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듯 굳어졌다.

장기린은 애써 시선을 돌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괜스레 헛기침이 나왔다.

“커험, 그보다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마당은 말 그대로 전쟁을 세 번 정도 치른 모습이었다.

우물은 박살났고, 담벼락은 무너졌으며, 바닥은 뒤집어졌다.

“……어, 저기, 아버지가 그랬잖아요. 가진 바 모든 것을 쏟아내라고.”

“그러긴 했지.”

“어쩔 수 없었어요. 게다가 주해가 그러는데 이렇게까지 안 하면 안 통한다고 했거든요.”

“주해의 도움도 받은 거냐.”

“네. 주해가 얼마나 똑똑한데요. 틀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장기린은 생각했다.

정말로 가진 바 전부를 쏟아부은 모양이라고.

‘그래도 마당을 다 폭파시켜 버릴 만큼의 배짱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장기린은 생각할수록 헛웃음이 나왔다.

젊다는 게 좋은 걸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장기린은 자신도 나이가 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까 그건 광 노사의 작품인가?”

“겸자랑 화연이에요. 깜짝 놀랐죠?”

장기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놀랐다.”

“히힛.”

소호가 다시 웃는다.

장기린도 마주 웃으려는 그 순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한기가 피어올랐다.

“어?”

소호가 딱딱하게 얼어붙는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습이다.

그에 비해 과연 오랜 연륜의 장기린은 달랐다.

그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백약불요(百藥不要)의 상황임을 순식간에 깨닫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모든 것을 포기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노란색의 밝은 경장, 머리는 단정하게 틀어 올려 새하얀 목선을 드러냈다.

도자기 같은 피부에 적당히 큰 눈, 서른이 넘은 나이로는 도저히 안 보이는 젊은 얼굴이지만 사실은 십이 세의 아들을 둔 유부녀였다.

“세상에 이게 다 뭐람.”

진휘연은 완전히 박살 난 마당을 망연히 돌아보았다.

“객주님, 설명해 봐요.”

장기린이 움찔했다. 휘연은 화가 났을 때만 옛날처럼 객주님이라 부른다.

“음, 그러니까.”

장기린은 드물게 말을 머뭇거렸다.

“……별거 아니다.”

“별거 아.니.다?”

때론 말을 안 하는 게 더 나은 경우가 있다.

휘연의 노기가 더 강해졌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나요?”

“그랬지.”

“그땐 그나마 애꿎은 객잔 벽을 박살낸 범인이라도 있었죠. 그리고 제가 그 대가를 받아 낸 걸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랬……지.”

장기린은 피를 토하며 객잔 벽을 수리하던 낭인 집단을 떠올렸다. 장기린의 기세가 위축되었다.

“최근에 자꾸 이런 일이 벌어지네요. 누구 탓일까요? 대체 누가 우리의 보물인 풍운객잔을 자꾸 부수는 걸까요?”

“내 탓……이오.”

“객주님이 부쉈어요?”

“…….”

“아니죠? 그럼 이번 일의 범인은 누구예요?”

“…….”

“누가 그랬어요?”

장기린은 세상에 이렇게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또 있을까 고민했다.

마당을 부순 거?

소호다.

그의 아들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걸 소호가 그랬다고 진휘연에게 일러바쳐야 한단 말인가!

“소호야. 어딜 가니?”

그때 뒤에서 몰래 도망치려던 소호가 움찔하며 굳어졌다.

“너……!”

장기린은 비난의 눈빛을 보냈다.

소호가 잔뜩 겁에 질린 작은 동물 같은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이름(小虎)이 아까운 녀석이다.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을 거죠? 그렇죠?”

진휘연은 분명히 웃고 있는데 눈이 웃고 있질 않았다.

저 얼굴을 어떻게 이기겠는가.

장기린은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이 녀석이 그랬소.”

잘못을 인정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 또한 부모의 의무.

충격받은 소호의 얼굴을 애써 외면한 채, 장기린은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해결책을 덧붙였다.

“둘이서……. 같이 치우겠소.”

***

“아버지. 잊지 않을 거예요.”

“도망치다 걸린 놈이 말이 많구나.”

장기린과 소호는 그날 세 시진이 넘도록 마당을 고쳐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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