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13화
제7장 태동(胎動)(3)
풍운객잔의 입구로 들어선 부운화는 아련한 추억에 사로잡혔다. 커다란 품종의 대나무를 반으로 잘라서 이어 붙인 벽면과 허름한 듯하면서도 편안한 내부 장식은 예전과 흡사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미어터질 듯 몰려들던 손님이 이젠 없다는 점 정도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참 재밌었어.’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면서 항주 최고 상권인 금선로에 떡하니 객잔을 차려 버린 대형 장기린.
그런 장기린이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겠다며 숨어서 지켜보던 적룡기마대.
부운화는 감상에 젖어 지난날을 돌이켜 보았다. 참으로 초조하고, 숨 가쁘고, 격렬했던 시간이었다.
“운화?”
부운화는 부드럽게 웃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전신에 흙먼지를 잔뜩 묻힌 장기린이, 운화를 보며 놀라고 있었다.
“대형.”
장기린이 한달음에 다가와 끌어안으려다 멈칫했다.
그는 먼지투성이인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잘 지내셨습니까?”
부운화는 멈칫한 장기린을 먼저 끌어안았다.
먼지가 온몸에 묻었지만 개의치 않는다.
“여전하군, 운화.”
장기린은 작게 웃으며 마주 끌어안아 주었다.
“그렇습니까? 저는 변했다고 생각했는데요.”
“천만에. 그대로다.”
“기쁘군요.”
두 사람은 근처 탁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런데 작업 중에 제가 방해한 모양입니다.”
“아니야. 아들 녀석이랑 장난치다가 마당을 좀 어질렀을 뿐이다.”
“하핫, 소호가 점점 혈기왕성해지는군요.”
“그래, 너무 혈기왕성해서 문제야.”
장기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탄하듯 말했다.
“소호가 오늘은 마당을 폭파시키더군.”
“예? 폭파라니. 화기(火器)를 사용해서 말입니까?”
“그래.”
부운화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화기를 사용해 마당을 폭파시켰다고요? 겨우 열두 살짜리가?”
“그러게 말이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더군.”
“방법은 둘째 치고, 왜 그랬답니까?”
“……내 옷을 붙잡으려고.”
“흠?”
부운화가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되물었다.
“내기였습니까?”
“맞아. 내 옷자락을 붙잡으면 나가 놀아도 좋다고 했지.”
“성공했나요?”
“바지자락을 붙잡혔어.”
“하하핫!”
장기린이 미간을 좁혔다.
“웃을 일이 아니다. 갑자기 두레박이 폭발한 데다가 기관장치가 날아오고, 땅 밑에서 화탄이 터졌어.”
“하하하핫! 거기다 계획적이기까지!”
“허어?”
부운화는 진심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크게 웃은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다.
“하핫, 과연, 대형의 아들입니다. 피는 못 속여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난 저렇게 과격하지 않아.”
“천만에요. 대형도 그랬잖습니까?”
“내가?”
장기린이 당황한 얼굴을 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부운화는 과거의 추억을 끄집어냈다.
“군문에 들어가서 장가구에 배치되었을 때 처음으로 받은 임무 기억나십니까? 그때 육 부장이 우릴 미워해서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렸잖습니까? 스무 명만 데리고 몽고 정찰부대를 전부 쫓아내라고요.”
“아아…….”
“그때 대형께서 보급 창고의 화포(火砲)란 화포는 다 끌고 가서 진지를 박살내 버렸죠?”
장기린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후퇴하는 놈들을 잡으려고 협곡 하나를 무너뜨렸고요.”
“그랬……지.”
“그때 입에 거품을 물고 화내는 육 부장에게 대형이 하셨던 말도 기억나십니까?”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화포를 쓰지 말라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말했다.
부운화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들의 과거는 치열하게 지나왔기에 그것은 감내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아련한 즐거움이었다.
“목표를 쫓는 집요함. 일을 크게 벌이는 배포. 형식을 무너뜨리는 과격함. 전부 빼다 박았는데 뭘 부정하십니까.”
“끄응.”
“하핫, 역시 소호는 대형의 아들입니다.”
장기린은 난감한 듯 보였다.
“그렇게 비슷한가?”
“예. 고작 열두 살 나이에 대형의 옷자락을 잡아챈 능력까지 포함해서요.”
부운화는 장기린이 피식 웃는 모습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피는 못 속이나보군.”
“그렇지요.”
부운화는 장기린이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재밌었다.
전장의 붉은 악귀가 이런 소소한 행복을 즐길 수 있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러니 더욱 지켜드려야 한다.’
부운화는 자신의 다짐을 더욱 확고히 했다.
“대형, 오늘 이야기를 들으니 확신이 생겼습니다. 소호랑 주해, 미미까지. 잠시 세상 구경을 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장기린의 시선이 흔들렸다.
“운화, 너 역시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하남의 포정사 이백이 비슷한 제안을 했었다. 소호한테 낭관의 직위를 주고 싶다던데.”
“이백이라면 믿을 만한 사람이지요.”
부운화는 얼마 전에 처리하고 온 이백과 칠성상회 사이의 갈등을 떠올렸다.
“운화.”
“예, 대형.”
“무슨 일이 있는 거지?”
무뚝뚝한 얼굴, 진지한 눈빛의 장기린이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대형께는 돌려 말할 수가 없군요.”
“잘 알고 있군.”
“하핫, 예. 사실 오늘 찾아 뵌 건 그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부운화는 오늘 아침 그가 알게 된 사실을 천천히 끄집어냈다.
“대천문이 움직였습니다.”
***
다음 날 잠에서 깬 소호는 멍하니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희한한 느낌이었다.
평소라면 벌떡 일어나서 뭘 하면서 놀까 고민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할 만큼 몸이 축 늘어졌다.
피곤한 걸까? 아니면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으으우. 나른해.”
소호는 기지개를 쭉 켜면서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다가 포기 했다.
“이상하다. 하던 일을 안 해서 그런가?”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버지 옷깃 잡기 계획’ 때문에 새벽마다 일어나서 연습했었다.
헌데 정작 자유의 날이 오자 이상하게 힘이 빠지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안 되지, 안 돼! 기껏 얻은 자유인데!”
소호는 짝 소리가 나게 자신의 뺨을 몇 번 두드린 뒤 벌떡 일어섰다.
황급히 방문을 열고 나가 보니 어제 고친 그대로, 뭔가 어색한 느낌이 가득한 안채 마당이 보였다.
우물가에서 감자를 깎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소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시간쯤이면 아버지나 운찬 삼촌이 작업을 하고 있었어야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일까 고민하며 문을 열고 객잔 안으로 들어서자 객석에 앉아 있던 일곱 명의 노인들이 소호를 쳐다봤다.
“어?”
당황한 소호를 향해 추묵환이 껄껄 웃으며 손짓했다.
“주인공이 도착했군. 이리 오거라. 소호야.”
소호는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저기, 오늘 무슨 일 있어요? 할아버지들이 이렇게 다 모인 건 처음 봐요. 아! 혹시 오늘 그날이에요? 마을 회의?”
“아니다. 오늘은 너 때문에 모였단다.”
그 순간 혹시 잘못한 게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게 되는 것은 소호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허헛 잘못한 것 없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추묵환은 껄껄 웃으며 솥뚜껑만 한 손으로 소호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아야야, 그럼 무슨 일로 다 모이신 거예요?”
잘못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소호의 두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크흠, 그러니까 말이다. 소호야…….”
“거 뭘 그리 뜸을 들여! 내가 이야기하지!”
옆에 있던 만수마왕(萬獸魔王) 종조기가 버럭 화를 내며 앞으로 나섰다.
“소호 너. 오늘부터 우리랑 좀 놀자.”
“……네?”
소호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이 멍청한 늙은이야. 그렇게 말하면 애가 얼마나 당황하겠어!”
“뭐얏?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냐. 도적놈아?”
추묵환의 눈썹 끝이 위로 치솟았다.
“도적? 이 늙은이가 살 만큼 살았나 보구만.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것 보니.”
“클클, 그것도 위협이냐? 도적 놈 입담이 예전 같지 않구만. 무식한 게 품위 챙기려니 힘들지?”
“뭐라?”
벌떡 일어나 서로 으르렁거리는 추묵환과 종조기.
두 사람을 말린 건 옆에서 조용히 염주를 돌리고 있던 긴 머리의 승려였다.
“허허, 두 분 다 고정하시지요. 소호 앞에서 그리 추태를 부리실 겁니까?”
담담하고 이성적인 말이었으나 추묵환과 종조기는 눈만 부릅떴다.
“시끄럽다. 파계승.”
“위선 떨지 마라. 중놈아.”
파계승이라 불린 승려.
십로 중에 나이로는 일곱 번째를 차지하고 있는 불요신승(佛要神僧) 각율은 아미타불이라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추묵환과 종조기는 한참이나 으르렁거리다가 자리에 앉았고, 결국 제대로 된 설명은, 옆에서 가만히 있던 나이 서열 두 번째, 흑신의(黑神醫) 우문환이 하게 되었다.
“흘흘, 소호야.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너희 아버지가 그러더구나. 조만간 너랑 다른 아이들을 마을 밖으로 내보내려 한다고. 그리고 한동안 우리가 너희를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하더구나.”
우문환은 안 그래도 술을 마신 것처럼 붉은 얼굴을 더더욱 붉히며 아쉬움을 표했다.
“아쉽지만 할 수 없는 일이지. 원래 다 큰 새는 둥지를 떠나보내는 법이니까. 그래서 우리 노인들은 친손주나 다름없는 너희와 시간을 좀 더 보내기로 했단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이대로 보내 버리면 너무나 아쉬운 일 아니겠느냐?”
우문환은 옆에 차분히 앉아 있는 북두신군(北斗神君)과 일야회주 묵신(黙神)에게 동의를 구했고, 원래 조용한 성격의 그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그러니까.”
소호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잠깐! 잠깐만요. 으음. 정리하자면. 저랑 주해, 미미, 기옥이가 전부 마을에서 나가게 되었단 말이에요? 그러면 한동안 마을로 돌아올 수 없고?”
우문환은 흘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으어?”
소호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게 뭐야! 난 못 들었는데!”
“전혀 몰랐던 게냐?”
“네!”
소호는 이제야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한 달간 갑자기 아버지가 이상한 숙제를 내면서 단련시키던 이유.
그리고 오늘 모인 할아버지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이유.
“말도 안 돼. 이렇게 일방적으로?”
소호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항상 답답하고 심심하게 느꼈던 은자촌에서 드디어 나가는 거다. 지겨운 감자 껍질 깎기도 끝이고, 질릴 만큼 질린 거북이 바위도 안녕이었다.
“좋긴 좋은데…….”
분명히 바라던 일인데 뭘까…… 이 개운치 않은 기분은.
“허헛, 가자! 소호야. 주해랑 미미는 이미 기다리고 있다!”
의욕 가득한 추묵환의 손에 이끌려 나가면서 소호는 혼란스러운 내심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밖에 내보내기 싫어서 그러시는 건 아니겠지?’
지금쯤 안채에서 편히 쉬고 있을 아버지를 향해 원망의 시선도 보내 보지만 이미 의미 없는 일.
“잠깐! 그러고 보니 기옥이는요!”
“그 녀석은 우리랑 놀기는 안 맞아. 광 노인이 잘 해 줄 거다.”
소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일단은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뭐 어때! 할아버지들이랑 노는 건데!”
“그렇지! 바로 그거다!”
소호는 풍운객잔의 밖을 향해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
“괜찮을까요?”
안채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진휘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다들 경험이 많고 가르치는 데에 익숙한 분들이시니까. 아이들에게 필요한 게 뭔지 다 안다고 장담하셨어.”
“어르신들이야 분명히 믿을 만하지만, 그래도 우리 아들은 아직 너무 어리잖아요.”
“휘연, 어쩔 수 없어.”
“알아요. 그래도 걱정이라구요.”
진휘연은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열두 살이면 충분히 컸다. 무림의 문파들은 다섯 살 때부터 무공 수련을 시키는 곳도 있다더군.”
“그런 애들과는 달라요. 우리 아들은 너무 순수하다구요.”
“으음.”
“저는 걱정이에요. 아직 엄마가 필요한 나이인데. 앞으로 가르칠 게 얼마나 많은데…….”
진휘연의 두 눈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장기린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게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거다. 아마 소호가 나이 사십이 되더라도 이런 걱정은 끝나지 않으리라.
“더군다나 소호는 당신의 자식이잖아요.”
“음?”
“어디가서 세상물정 모르고 사기나 당하지 않을지. 융통성 없이 남한테 아쉬운 소리 못하고 참기만 하는 건 아닌지…….”
장기린은 뜨끔해서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분명, 그에게는 금괴 하나짜리 여관을 그의 몇 배나 되는 가격을 주고 산 어두운 과거가 있었던 것이다.
‘요즘 들어 옛날 일로 지적을 많이 당하는군.’
부운화부터 진휘연까지.
이젠 과거의 그가 한심해 보일 지경이었다.
“크흠! 괜찮아. 소호에겐 휘연의 피도 반이나 흐르고 있으니까.”
“흥, 세상물정에 어두운 거 인정은 하는군요?”
“…….”
“괜찮……겠죠?”
장기린은 묵묵히 진휘연의 어깨를 안아 주었다.
“괜찮아. 다 잘 될 거다.”
진휘연이 머리를 기대어 왔다. 은근한 난초 향과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장기린은 휘연의 존재를 느끼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 마을과 가족, 모두를 지켜 낸다.’
그게 곧 그가 사는 이유니까.
장기린은 훗날 소호가 이번 일로 이를 바득바득 갈게 된 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건 나중의 일.
그는 십로의 노인들이 아무리 ‘격렬하게’ 가르쳐도 소호는 모두 견뎌 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