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14화
제7장 태동(胎動)(4)
“드디어……!”
깨끗한 갈색 무복을 입은 소년이 가슴 앞에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머리카락 한 올 조차안 남기고 뒤로 바싹 당겨 묶은 모습이 눈에 띈다.
팔도 다리도 길쭉길쭉해서 본인의 나이보다 커 보이는 체형이었다.
적당히 큰 눈, 피부도 적당히 하얀 편이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평범한 인상이었지만 본인의 키보다도 훨씬 큰 창 한 자루를 비스듬히 등 뒤로 메고 있다는 점은 특이했다.
소년은 눈앞에 있는 커다란 비석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 봤다.
낙양(洛陽).
말로만 들었던 오래된 고도(古都)의 이름이 정말로 눈앞에 있었다.
“거기 소형제(小兄弟), 낙양은 처음인가 봐?”
소년은 흠칫 놀라 뒤돌아보았다.
옆에서 우마차를 타고 덜컹덜컹 나아가던 중년의 사내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고 있었다.
“아, 예. 처음입니다.”
“하하하! 딱 봐도 그래 보이네. 무산학관에 시험 치러 가는 거지?”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등 뒤에 그렇게나 큰 창을 메고 있으면 뻔하지 뭐.”
중년의 사내는 손가락으로 소년의 등 뒤를 가리켰다.
“아! 그랬네요. 저는 너무 익숙해서 몰랐어요.”
“타지에서 여기까지 혼자 왔어?”
“예. 많이 헤맸지만……. 이젠 제대로 찾은 것 같아요.”
소년은 낙양 비석을 다시 한번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어린 친구가 기특하네. 소형제는 성 씨가 뭐야?”
“예? 성? 아, 이름이요?”
“그래, 자네 이름이 뭐냐고.”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조서인이라고 합니다. 천천히 서(徐)에 어질 인(仁)을 씁니다.”
조서인은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절도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중년 사내의 반응이 격렬했다.
“뭐야! 조 씨였어? 반갑구만. 얼른 타! 얼른! 무산학관까지 태워줄 테니.”
“예? 아니 그러실 필요까지는…….”
“안 돼, 안 돼. 조 씨를 잘못 대접해서야 우리 가문의 수치라고. 게다가 무산학관까지는 길이 은근히 복잡해서 헷갈려.”
“조 씨요?”
“어서 타. 어서.”
조서인은 얼떨결에 떠밀려서 중년 사내의 우마차 짐칸을 얻어 타고 말았다.
중년 사내는 자신을 간식거리를 파는 노점상 장 씨라고 소개했다.
무산학관의 인근에서 장이 열릴 때마다 음식을 만드는데, 그 일이 무척 재밌다고 했다.
“소형제, 삼국지 알지? 후한시대의 삼국지.”
“예. 물론입니다.”
“우리 낙양 사람들은 은원(恩怨)이 확실하거든. 우린 아직도 후한시대를 잊지 못하고 있어. 동탁 놈이 낙양을 깡그리 불태워 버렸잖아. 알지?”
“아, 네. 압니다.”
“그때의 일은 낙양 사람들에게 한(恨)이 되었어. 생각해 봐. 낙양 사람들은 다 한두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라고. 그런데 그 일 때문에 조상님들 셋 중, 둘은 그때 죽었다니까? 그래서 낙양 어디를 가도 조 씨에겐 잘해 주고 동 씨 놈들은 쫓아내는 거야. 그리고 소형제는 조 씨니 나는 낙양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 도와줄 거고.”
“아, 그럼 아까 성 씨를 물어본 게 조조 때문인가요?”
“그렇지. 조조가 낙양을 다시 부흥시켜서 우리가 이만큼 사는 거니까.”
“아…….”
조서인은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졌다.
“저기, 죄송한데…….”
“음? 왜 그래. 소형제.”
“저는 그 조 씨가 아니라서…….”
조서인은 난감했다. 원해서 탄 건 아니지만 뭔가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응? 그래? 조조에서 내려온 조 씨가 아닌 건가?”
“예. 저는 기주에서 온 조 씨라서…….”
“호북 기주? 어이구, 멀리서 왔구만.”
“저기, 다시 내릴까요?”
조서인은 우물쭈물하면서 내려뒀던 짐을 챙기려고 했다.
우마차에 실린 짐들이 조서인을 비웃듯 덜컹거렸다.
“파하핫! 소형제. 솔직하구만. 모른 척 가만히 있었으면 몰랐을 텐데 말이야.”
“예?”
“그냥 있어. 난 소형제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리고 조조의 직계든 아니든 조 씨한테 잘해 주고 동 씨를 구박하는 건 우리 낙양의 전통이야.”
장 씨는 어리둥절한 조서인의 등을 팡팡 두드려주더니 복잡한 골목을 지나 무산학관으로 끝까지 데려다 주었다.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조서인에게 힘내라면서 달달한 당과까지 하나 챙겨 주었다.
“친절한 분이시네.”
조서인은 왠지 모든 일이 잘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보라, 낙양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이렇게나 친절한 사람 아니던가.
“후우…….”
조서인은 숨을 가다듬은 뒤 이미 몇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쪽문 앞, 창구로 다가갔다.
밖에서는 넘겨다 볼 수도 없는 일 장(丈)높이의 담벼락 앞.
높고 길쭉한 관모를 쓰고, 양갈래 수염을 삐쭉하게 기른 중년의 사내가 세필로 종이에 뭔가를 바쁘게 적고 있었다.
“시험 보러 왔나?”
“아, 예.”
“추천장은?”
“예? 음……. 아뇨, 없습니다.”
“그럼 일반 시험이군.”
사내는 평시(平試)라고 적힌 종이 더미에서 한 장을 뽑았다.
“이름?”
“조서인입니다. 천천히 서(徐)에 어질 인(仁)을 씁니다.”
“조 씨?”
사내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조서인을 똑바로 보았다. 조서인은 당황하며 대답했다.
“아, 저기, 조조의 가문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사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조서인이 등 뒤에 메고 있는 창을 바라봤다.
“어디서 왔어?”
“기주에서 왔습니다.”
“호북 기주? 호오, 상산(常山)이 있는 그 기주?”
“아, 예.”
“조자룡의 조가창법이 아직도 이어졌나?”
사내는 진심으로 호기심이 동하는 듯 흥미로운 눈빛으로 조서인을 바라보았다.
‘무산학관이 다르긴 다르구나.’
조서인은 이곳이 현재 중화 무학(武學)의 최첨단, 무산학관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조가창의 직계인가?”
“아, 음……. 직계랄까. 창법을 이은 건 저 하나뿐입니다.”
“그렇군. 흥미로운걸.”
사내는 세필로 뭔가를 바쁘게 적었다. 조서인은 그가 뭐라고 쓰는지 궁금했지만 앞쪽에 잔뜩 쌓인 종이 더미 때문에 볼 수가 없었다.
사내는 종이를 둘둘 말아 밥풀로 인장을 하나 붙여서 봉인했다.
“자, 이걸 가지고 북쪽 연무장으로 들어가게. 인장은 뜯지 말고.”
“아, 예. 감사합니다.”
조서인은 정중하게 인사한 뒤 옆에 있는 쪽문을 통해 들어갔다.
“우와……!”
조서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단 쪽문 너머에 세워져 있는 산문(山門)에 시선이 먼저 꽂혔다.
무산학관(武山學官).
용사비등(龍蛇飛騰)한 서체라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것이다. 현판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기백이 느껴지는 듯했다.
조서인은 멍하니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대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규모의 장원(莊園).
시선이 다 닿지 않을 만큼 커다란 전각들이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든 계속해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말이 학관이지 규모로 봐선 하나의 성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빨리 좀 가지? 너 때문에 못 가고 기다리고 있잖아?”
조서인은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연분홍빛 비단 무복을 입고, 검은색 가죽신을 신은 소년이 사나운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아, 미안. 내가 길을 막았네. 먼저 가.”
조서인이 옆으로 비켜서자 비단 무복을 입은 소년은 혀를 차며 지나갔다.
“쯧, 촌뜨기.”
조서인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연분홍빛 비단 무복이 휘적휘적 앞으로 지나간 뒤, 그 뒤로 허름한 회색 무복을 입은 소년이 다가와 조서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신경 쓰지 마. 쟤는 특별 시험이래.”
“어?”
다가온 회색 무복의 소녀는 왠지 모르게 영리하게 생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달걀형 얼굴에, 머리는 귀밑 부근에서 일자로 짧게 잘랐다. 눈이 작고 결코 미인이라 하기엔 어렵지만, 피부가 좋고 다리가 유난히 긴 아이였다.
“너도 일반 시험이지? 반갑다. 난 문주희야.”
조서인은 마치 사내아이처럼 털털하게 구는 소녀의 모습에 당황했다.
“어, 난 조서인이야. 반가워.”
“어서 들어가자. 곧 신시(申時:오후4시-6시사이)시험이야. 이거 놓치면 몇 달간이나 시험을 기다려야 할걸?”
“어? 어어?”
조서인은 소매 자락을 잡고 달리기 시작하는 문주희를 쫓아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마지막 시험이야? 정말?”
“그래, 몰랐어? 운 좋네. 너 반 시진만 늦었어도 헛걸음 할 뻔한 거야.”
조서인은 눈을 끔뻑거렸다.
“그런 게 있었구나. 난 언제든 시험만 보면 다 되는 줄 알았어.”
“바보야, 정보는 생명이야. 언제 시험이 끝나는지. 언제 어떤 시험관이 나오는지. 그리고 어떻게 시험을 대비해야 하는지. 그런 걸 알고 있으면 일이 훨씬 쉬워진다고.”
“그렇구나……. 주희 넌 대단하네.”
문주희도 조서인처럼 기껏해야 십 대 초반에 불과해 보였지만 속내는 전혀 달랐다.
조서인은 문주희가, 자신이 본 첫인상처럼 영리한 소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리벙벙해 보여서 도저히 가만둘 수가 있어야지.”
“응? 뭐라고?”
“아무것도 아냐. 얼른 와. 구경할 시간 없어.”
문주희는 조서인의 어깨를 팡팡 두드린 뒤 담벼락 너머로 잡아끌었다.
“우와아.”
담벼락을 하나 더 넘어가는 순간 조서인은 또 한번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밖에선 성으로 보였으나 안에 들어와 보니 이건 하나의 도시였다.
중앙에 거대한 광장이 있고, 그 주변엔 만두나 국수 같은 음식을 만드는 객잔들이 즐비했다.
객잔만 있는 게 아니다.
검이나 보호구 같은 무구(武具)를 만드는 대장장이 집도 여러 개가 몰려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사다리를 놓고 지붕과 벽면을 만드는 인부들이 잔뜩 모여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거대한 생활공간.
건축이 완료되면 하나의 마을이 될 것이 자명했다.
“야! 얼른 오라니까?”
“어, 응. 근데 아직 공사 중인 곳도 있네?”
“건축이 다 완성되기 전에 학관을 시작해서 그래. 그래도 필요한 곳은 다 지어졌어.”
문주희는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았다.
문주희도 분명 오늘 첫 시험을 보는 것일 텐데 조서인에겐 여하튼 신기한 소녀였다.
“하하. 하하하하.”
“뭐야. 왜 그렇게 웃어?”
조서인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즐거워서.”
“즐거워?”
“응. 이렇게 거대한 학관에, 내가 왔다는 게 정말 즐거워.”
문주희가 기가 차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잠시 후, 중앙 광장을 가로질러 북쪽 연무장에 도착할 때까지 조서인은 점점 더 설레어 오는 기분을 느꼈다.
“와아아. 사람들이 정말 많아.”
“그래도 오늘은 좀 적다. 어제는 백 명이 넘게 왔었대.”
연무장엔 이미 두 사람 또래의 소년, 소녀들이 족히 오십 명은 넘게 모여서 자기들끼리 수군수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중에는 조서인에게 면박을 주었던 연분홍빛 비단 무복의 소년도 있었다.
“촌뜨기.”
“……!”
조서인의 얼굴이 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라고 말하려는 걸 문주희가 소매를 붙잡아 만류했다.
“기다려. 저분이 무산학관에서 가장 무섭다는 철표 교관이야.”
“철표……?”
조서인은 소년, 소녀들의 반대편에서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서 있는 탄탄한 체구의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새카맣게 짙은 눈썹과 살짝 휜 매부리코, 이마의 삼(三)자 주름이 인상적인 사내였다.
척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인상이었다.
“이름처럼 사나운 표범 같은 사람이래. 문제 일으키다 걸리면 죽음이야.”
“그, 그래?”
조서인은 입을 꾹 다물고 주변의 소년, 소녀들을 살펴보았다. 조서인이 보기엔 모두 다 대단해 보였다.
살벌한 기세로 무기를 가다듬는 아이,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아이,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웃는 아이. 모두가 제각각이지만 각자 자신 있는 뭔가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아이들 틈에서 난 잘할 수 있을까?’
조서인은 시험이 어떤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긴장이 아닌 즐거움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 슬슬 설명해 주지.”
철표의 입이 열리자 수군거리던 움직임이 단번에 그쳤다.
“오늘의 시험은 어제와 동일하다. 우선 학관에서 설치해 둔 기관…….”
철표가 설명을 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응?’
조서인이 의아함을 느낀 것도 잠시, 연무장의 입구에서 우당탕탕 소란스럽게 뛰어드는 세 사람이 있었다.
“으아아아! 늦을 뻔했다!”
“느, 늦은 거 아냐? 오라버니?”
“하아, 하아. 그러게……. 좀 더 일찍 가자고 했……는데…… 하아, 하아.”
세 사람의 외모와 특징은 각양각색이었다.
체력도 가지각색인 듯 두 사람은 멀쩡했고, 한 사람은 지쳐 보였다.
“또, 촌뜨기가 늘었군.”
연분홍빛 비단옷을 입은 소년이 또다시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아냐.’
조서인은 눈을 반짝였다.
근거 없는 예감이라고 해도 좋다.
이번에 들어온 소년, 소녀들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왠지 모르게 전신이 반짝반짝 빛나는 느낌이다.
입을 다물었던 철표가 손가락으로 세 사람 중 중심에 있는 소년을 가리켰다.
“거기, 너.”
“네? 저요?”
“그래, 너 이름이 뭐지?”
소년은 털털하게 머리를 긁적이더니, 햇살처럼 밝고 명랑한 웃음을 지었다.
“제 이름은 장소호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