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15화
제7장 태동(胎動)(5)
철표 교관의 시선은 냉랭했다.
“장소호? 늦었군. 너는 원래 시간관념이 없는 편인가?”
잔뜩 날이 선 목소리라 지켜보던 모두가 덩달아 함께 긴장하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헌데 장소호는 오히려 태연했다.
“음,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오늘은 그저 실수였다는 건가?”
“네.”
철표의 무시무시한 시선이 꽂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소호는 마치 별일 아닌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상대방이 기다리는 말을 해 주어야 대화가 끝날 때도 있는 법이다.
장소호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좋아, 지켜보지. 들어가도록.”
철표는 그들로부터 시선을 뗐고, 장소호와 일행 두 명은 조용히 대기자들 뒤로 돌아갔다.
“휴.”
조서인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한숨을 내쉬다가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문주희가 옆에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왜 네가 긴장해?”
“어어. 그러게.”
문주희가 피식 웃는다. 조서인은 자신이 장소호의 입장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잠시 떠올려 보고 고개를 저었다.
‘대단한 애야. 나라면 말도 제대로 못 했을 것 같은데.’
조서인은 그 장면을 옆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벌렁거려 숨이 가빠질 지경이었다.
“쟤 대단하긴 하다. 철표 교관한테 따박따박 말대답을 다 하네.”
“그러게, 대단해.”
뒤로 돌아간 장소호는 함께 온 친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사이 철표가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무산 학관은 지(智), 용(勇), 체(體)를 모두 갖춘 뛰어난 인재를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래서 시험 또한 세 가지 자격을 본다. 너희는 이 세 가지 시험 중에 하나를 골라 총 이단계의 시험을 통과하면 학관에 합격하게 될 것이다.”
철표가 손가락으로 연무장의 한쪽을 가리켰다.
“우선 저쪽이 지(智)다. 동창 출신의 요원과 제갈세가 출신의 교관이 심사를 보는 곳이지. 무공보다 머리를 쓰는 것에 자신 있다면 저쪽 시험을 보는 게 좋다.”
기다리던 아이들 중에 사분지 일 정도가 지(智)시험에 관심이 있었는지 일제히 그쪽을 바라봤다.
나지막한 다탁들이 십여 개 정도 줄지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커다란 대나무 바구니 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찰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조서인은 지 시험은 도대체 어떻게 보는 건지 궁금해졌다.
‘과거 시험처럼 글을 쓰는 문제일까? 용이나 체 시험보다 쉬우려나?’
문주희가 귓가에 속삭였다.
“지(智)가 쉬워 보이지?”
조서인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속지 마. 작년에는 전부 통 틀어서 고작 세 명밖에 안 뽑은 극악의 시험이 바로 저 ‘지 시험’이야. 평소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를 낸대. 경험자들 말로는 차라리 함정 같은 게 없는 용(勇) 시험이 낫다더라.”
“그래? 용 시험이 나아?”
문주희의 말에 놀랄 틈도 없이, 이내 철표 교관이 다음 시험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 시험을 볼 사람들은 잠시 후에 먼저 저쪽 시험장으로 모이도록. 다음은 용 시험이다. 여기 이 목나한을 보도록.”
널찍한 연무장 한 가운데, 실제 성인 남성만한 크기의 목조 인형(人形)이 양팔을 벌린 채 사천왕상(四天王像)처럼 서 있었다.
“용 일차 시험은 간단하다. 저 목나한을 넘어뜨려라. 단, 타격 방식의 공격은 주의를 요한다. 이걸 보면 알겠지만 목나한은 타격 방식의 공격을 막기 위해 특수한 장치가 되어 있다.”
철표는 손바닥 장타로 번개처럼 목나한의 가슴을 ‘팡’ 하고 후려쳤고, 그 순간 목나한의 가슴에서 손가락 하나 길이의 바늘들이 고슴도치처럼 쑥 올라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우와……!”
“조그만 늦었어도 바늘에 찔렸겠어.”
문주희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목나한을 응시했다. 시험 방식 자체만으로 흥미가 돋은 듯했다.
“때리는 게 안 되면 밀어서 넘어뜨려야 한다는 소리네. 서인이 너라면 어떻게 할래? 때리지 않고 넘어뜨릴 수 있겠어?”
“으음, 잘 모르겠어.”
조서인은 목나한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대답했다.
“꽤 무거워 보이는걸?”
“맞아. 철표 교관이 세게 때렸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았어. 무거운 것 같아.”
“그래서 용(勇)인 걸까? 힘이 필요하겠네.”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철표가 마지막 시험장으로 향했다.
마지막 시험장은 지금까지의 시험들 중 가장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바닥엔 통나무들이 징검다리처럼 세로로 띄엄띄엄 박혀 있었고, 좌측과 우측에 나무로 만들어진 벽면들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조서인은 직감했다.
저 벽면에서 응시자를 방해할 뭔가가 튀어나올 게 분명했다.
“이게 체(體) 시험이다. 이곳에선 통나무 위만 밟을 수 있다. 날아오는 기관과 장애물들을 피해 건너편으로 이동하면 합격이다. 시간제한은 없지만 빠르게 들어온 순으로 합격을 시킨다.”
시연(試演)조차 없는 짧은 설명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아이들 모두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 분위기가 살벌했다.
철표는 아이들의 얼굴을 쭉 둘러본 뒤 천천히 말했다.
“참고로 한 과목에서 떨어지면 바로 끝은 아니다. 다른 과목의 시험을 다시 볼 수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이상이다. 질문 있나?”
한 아이가 손을 들어올렸다.
조서인을 촌뜨기라 놀리던 분홍빛 비단 옷 소년의 바로 옆이었다. 녹색 비단옷에 옥으로 만들어진 요대를 번쩍거리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이었다.
“교관, 우리들도 똑같은 시험을 쳐야 합니까?”
“무슨 뜻이지?”
철표의 냉랭한 시선이 소년에게 박혔다.
소년은 움찔하면서도 의견을 굽히지 않은 채 말했다.
“저는 특수 시험 대상자입니다.”
“그런데?”
“저기, 특수 시험 대상자라 하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시험을 보지 않나요?”
철표는 팔짱을 낀 채 잠시 그 말을 한 소년을 지그시 응시했다.
“보통 사람들이라. 본인이 굉장히 특별하다고 생각하나 보군.”
“그렇습니다만?”
“너흰 누군가의 추천을 받았을 뿐이다. 여기 이들과 다를 것은 하나도 없어.”
녹색 비단 옷의 소년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소년은 조서인을 힐끗 쳐다본 뒤 더욱 분개하며 물었다.
“그럼 이렇게 추천을 받아 지원해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겁니까? 저는 추천장이 있으면 간단히 들어가는 거라 생각했는데요.”
“간단히?”
학관을 쉽게 생각하는 말이 철표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주변의 분위기가 대번에 냉랭해졌다.
“무산학관은 고작 추천장 때문에 기초 소양이 없는 녀석을 받아 주진 않는다.”
“저는 기초 소양이 없지 않습니다!”
“그럼 그걸 시험으로 증명해라. 뭐가 문제인가.”
“예?”
“난 너희에게 기회를 주는 거다. 다른 합격자 아이들에게 너희가 정식 시험을 쳤더라도 들어갈 수 있었다는 걸 보여 주려는 거지. 아니면 시험을 통과할 능력도 없는데 추천장 덕분에 들어간 녀석이 되고 싶은 거냐?”
녹색 비단 옷의 소년은 당황하여 멍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런 의도가 있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그만한 자신도 없이 무산학관에 왔나?”
“……아닙니다!”
“좋아. 그럼 문제없겠지? 아, 추천장이 있는 사람은 이차 시험은 통과할 수 있다. 참고하도록.”
철표는 손짓으로 한 사람을 불러 서찰을 건네받았다.
“이제부터 명단을 호명해서 시험 장소 별로 분류한다.”
그는 낭랑한 목소리로 명단을 읊기 시작했다.
“첫 번째, 망개. 넌 어디로 갈 거지? 용? 알았다. 용 시험에 한 명. 그 다음, 춘보. 너는? 지인가. 알았다. 지에 한 명.”
오십여 명에 이르는 이름 호명이 다 끝나갈 때쯤 철표의 입에서 조서인의 이름이 나왔다.
“조서인.”
“예!”
“어디로 갈 거지?”
“체로 갈게요.”
“좋다. 체.”
조서인은 체 시험장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녹색 비단옷을 입고 질문을 던졌던 소년. 분홍색 비단옷을 입은 건방진 소년, 영리한 문주희와 뒤늦게 도착했던 장소호까지.
체 시험장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왕종호.”
공교롭게도 녹색 비단옷 소년이 첫 번째로 시험대에 올랐다.
소년은 의기양양하게 통나무 징검다리에 올라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문제는 세 번째 통나무를 건너는 순간 벌어졌다.
양옆의 벽이 열리며 뭉툭한 천을 씌운 쇠뇌들이 사방에서 쏘아진 것이다.
“으허억!”
왕종호는 벌떼처럼 달려드는 쇠뇌들을 정면으로 맞상대했다. 희한한 동작의 장법을 사용하며 잠시 버텼지만 결국 바닥에서 커다란 창이 튀어나오는 순간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고 통나무 다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쿵.
왕종호가 엉덩방아를 찧는 소리가 시험장에 울려 펴졌다.
“탈락.”
철표는 냉정하게 선언했다.
“이건 말도 안 돼! 난 특수 시험 대상자라고! 내가 누군지 알아? 날 이런 걸로 떨어뜨리면 안 되지! 후회한다고!”
철표가 왕종호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 다음 차례 응시자를 바라보았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나? 북경원가의 원형주?”
분홍색 비단 옷의 소년.
파강장군 원회를 배출했던 명문 북경원가의 후손이 차가운 얼굴로 시험대로 향했다.
원형주는 당황하는 왕종호를 옆으로 밀면서 말했다.
“저리 비켜, 철부지.”
“뭐, 뭣!”
“일차 시험도 떨어진 주제에 목소리를 높이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왕종호는 얼굴이 빨개진 채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원형주의 움직임은 화려했다.
통나무를 뛰어넘는 몸놀림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날아오는 쇠뇌와 바닥에서 솟구치는 창들을 쳐 내는 모습은 절도 있고 깔끔해서 군더더기가 없었다.
통나무 건너편까지 건너는 데 걸린 시간은 반각.
무표정하던 철표 조차 미미하게 감탄을 표했다.
“결점이 없군. 합격.”
시험을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휴우.”
간신히 통나무를 다 건넌 조서인은 쇠뇌에 얻어맞은 부분에서 지끈거리는 고통을 느끼며 철표를 바라보았다.
철표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
조서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래로 내려왔다.
어찌나 긴장했든지 다리가 후들거렸다.
걸린 시간은 일각 정도.
원형주의 기록에 비하면 시간이 두 배나 더 걸린 셈이지만, 그건 원형주가 대단했을 뿐 조서인의 기록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탈락하고 용이나 지 시험장으로 가 버렸을 정도로 체 시험은 만만치 않은 난이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나마 통과한 아이들도 반각보다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통과할 수 있었다.
그건 문주희도 마찬가지였다.
놀라울 정도로 가볍고 경쾌한 신법으로 물 흐르듯 통나무 징검다리를 건너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각의 기록을 깨지는 못 했다.
문주희는 안타까워했다. 미리 연습했던 것과 조금 달랐다고 했다. 소녀는 시험을 통과한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조서인의 옆에서 계속 재잘거렸다.
그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智) 시험장 쪽에서 최단 기록이 나왔다면서 흥분한 시험관의 외침이 들렸고, 체(體) 시험관에선 목나한을 박살 낸 괴물이 나타났다며 경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서인은 궁금했지만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체 시험장의 마지막을 장식할 소년의 모습이 궁금했던 것이다.
“장소호.”
철표의 호명을 시작으로 마지막 응시자, 장소호가 시험대에 올랐다.
“히힛.”
조서인은 장소호가 웃는 모습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저렇게 해맑게 웃을 수 있는지 조서인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소호는 흥미로운 놀이를 눈앞에 둔 것처럼 볼을 상기시킨 채 통나무와 그 옆의 함정 기관들을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쟤, 뭔가 특이하네.”
문주희의 말에 공감하며 맞장구를 치려는 순간.
바람이 갈라졌다.
“……!”
조서인은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장소호가 징검다리 위를 평지처럼 내달리고 있었다.
날아온 쇠뇌가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빗겨 나갔다.
바닥에서 솟구친 창대는 조약돌을 지나치듯 살짝 뛰어서 지나갈 뿐이다.
손을 사용해 막거나, 억지로 회피하려는 동작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동서남북. 머리 위와 발밑까지.
마치 기관 장치의 모든 무기들이 알아서 장소호를 피해 주는 것 같았다.
조서인은 멍하니 굳어 버렸다.
그 모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하다 더듬더듬 생각의 결론을 내렸다.
‘세상 모든 천지자연이 돕는 것 같아.’
그렇게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아잣! 성공!”
장소호의 기쁨에 찬 외침이 굳어 있던 모두를 깨워 냈다.
장소호는 상기된 얼굴로 철표를 바라보고 있었다.
즐거워하며 두근두근 기대하고 있다는 유쾌한 감정이 보는 그대로 전달되는 솔직한 얼굴이었다.
“합……격.”
천하의 철표도 말을 더듬었다.
조서인은 생각했다.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고.
마지막에 등장한 소년은,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