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16화
제8장 진재자완(眞材自完)(1)
회갈색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십여 명의 인물들이 가파른 산길을 빠른 속도로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은밀하고 신중했다.
항상 세 명이 먼저 앞서서 주변을 정찰하며 움직였으며, 혹시 사람의 기척이라도 느껴지면 그 즉시 수풀과 나무 사이로 흩어져 숨었다. 그 모습은 마치 야생동물을 방불케 했다.
그들은 그러한 상태로 산을 거의 다 올라갔다.
정상에서 바라본 아래 풍경들이 까마득해 보일 정도가 되자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모두를 멈춰 세웠다.
“긴장해. 거의 다 왔다.”
순간, 그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임무에 등급이 있다면, 이번 일은 ‘특급’이라는 단어로도 모자란 최고 등급일 것이다.
앞으로의 인생이 걸린 일에서, 가슴이 뛰고 손이 떨려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몇 명은 품속의 무기를 괜스레 손으로 더듬거렸고, 또 다른 몇 명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마치 폭풍 전야 같은 고요함이 감돌고 있었다.
어디선가 모르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고생하는구먼.”
한겨울에 찬물을 뒤집어 쓴 듯한 충격이 모두를 강타했다.
쒜엑.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지시를 내리던 대장이다.
번개처럼 내던진 단검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날아갔고, ‘적’의 손가락 사이에 ‘척’ 하니 붙잡혔다.
“누구냐.”
대장이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열두 명의 복면 사내들이 일제히 손바닥 두 뼘만 한 칼을 품 안에서 뽑아 들고 진형을 갖췄다.
“무례한 놈이군. 보자마자 단검을 내던지는 건 어디서 배워 먹은 버르장머리냐.”
갑자기 나타난 인물은 길목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태연히 앉아 있었다.
하얗게 센 짧은 머리에 눈가에는 세월의 주름이 깊게 새겨져 있다.
검은색 복면에 온통 새카만 무복을 입은 그는, 은자촌의 여섯 번째 노인. 일야회주 묵신(黙神)이었다.
“흘흘, 제법 기척을 잘 숨기던데, 어디서 왔느냐? 살수인가? 아니면 동창인가?”
대답이 없었지만, 묵신은 그들의 허벅지 부근에서 답을 찾아냈다.
“각검대(脚劍隊)로군.”
회색 무복 허벅지 바깥쪽엔 검 모양의 문양이 작게 수 놓여 있었다.
대장에겐 검 문양이 네 개.
나머지는 모두 검 문양을 두 개씩 새기고 있었다.
꽤나 정예 병력이란 뜻이었다.
“동창 각검대가 뭐 때문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이상은 들어갈 수 없다.”
묵신은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막소? 우린 그저 확인할 게 있을 뿐이오.”
각검대주는 뒤를 슬쩍 쳐다보다가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그르릉.
각검대의 사내들 역시도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퇴로라고 할 수 있는 산의 아래쪽.
웬만한 마차 한 대 만큼 거대한 곰이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 털을 빛내며 터벅터벅 다가오고 있었다.
쿵. 쿵. 쿵.
거대한 네발짐승이 움직일 때마다 강렬한 위압감이 그들을 짓눌렀다.
“제법 잘 숨으면서 올라왔다만……. 은신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동물한테는 안 되지. 진흙탕을 구르지 않는 다음에야 체취 만큼은 어쩔 수가 없는 법이거든.”
“큭, 왜 들켰나 했더니.”
각검대주는 고작 짐승 때문이라는 사실에 분개하며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회갈색 복면인들은 잘 훈련된 움직임으로 전투를 준비했다.
일촉즉발의 결연한 분위기가 흘렀다.
“흘흘. 기다려들 보거라.”
그런데 묵신은 바위 위에 앉은 채로 움직이질 않았다.
새카만 큰곰도 퇴로만 막았을 뿐 덤벼오지 않았다.
“내가 말이지. 젊은 시절에 피는 볼 만큼 봐서. 웬만하면 더 이상 원한을 지고 싶지는 않구먼.”
“……우릴 봐주겠다는 소리요?”
“내가 평소엔 말이 별로 없는 편인데. 오늘은 내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하네.”
동창 각검대 대원들이 당황한 사이 묵신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살면서 내 진신무공을 가르쳐 준 건 지금껏 딱 세 명뿐이라네. 하나는 요절한 아들 놈. 다른 하나는 아들을 요절시킨 제자 놈. 그 뒤로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무공은 전수하지 않겠다라고 다짐했었는데 말이지. 방금 전에 세 번째로 내 진신무공을 배운 녀석이 먼 길을 떠났단 말이야? 흘흘, 헌데 기분이 굉장히 오묘해. 너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술이나 진탕 마시면서 멍하니 뻗어 있었을 게야.”
묵신은 팔짱을 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번 들어 봐. 난 지금껏 내 무공을 누군가에게 가르치면 큰일 난다 생각하고 벌벌 떨며 살아왔거든? 근데 그 아이에겐 내 무공이 아무것도 아니더라 이거야. 제대로 가르쳐 주니까 삼 일 만에 똑같이 따라하고, 오 일 째엔 오의(奧義)를 파악해 버렸어. 그럼 다 배웠냐고? 물론 그건 아니지. 숙련도의 차이가 있으니까. 근데 그런 거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완성될 테니 큰 문제는 아니야. 그러니 내 마음이 어땠겠느냐 말이야. 정말 허탈했어. 내가 겨우 이깟 것 때문에 다 때려 치고 숨어 살았나 싶더라고. 내가 특별하기라도 하면 말을 안 해. 그 아이는 나보다 더 대단한 인간들한테 이것저것 배웠다니까? 난 그냥 장식 정도야. 이 몸께서, 그 아이에겐 그냥 ‘장식품’이었다고.”
묵신은 껄껄 웃었고 각검대주는 난감한 얼굴로 한마디 거들었다.
“공동전인이란 말이오?”
“비슷한 거지. 물론 전인이나 제자보단 공동손자에 가깝지만.”
“그래서 그 아이가 밉소?”
자신보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을 미워하는 것.
적어도 주변에 하나쯤은 찾아볼 수 있는 널리고 널린 흔한 일이었다.
“아냐, 아냐. 무슨 소릴.”
묵신은 손을 내저은 뒤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아이를 봤어야 해. 태양 같은 아이야. 나한테 고맙다고 했지. 흘흘, 그 한마디면 모든 게 의미 없어지는 게야. 보물 같은 아이거든.”
각검대주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묵신이 단검을 가볍게 막아 내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이쯤 되니 각검대주와 각검대원들은 묵신의 실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천재여도 그렇지. 어떻게 뛰어난 상승무공을 삼 일만에 똑같이 따라할 수 있겠는가.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노인의 무공이 별거 아닌 것이다.
‘가 봐라.’
각검대주가 등 뒤에서 손가락 세 개를 쫙 펴서 신호를 보냈다.
“어허.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이런 짓을 하면 쓰나.”
그 순간, 지시를 받고 움직이려던 대원들 세 명이 앞으로 털썩 고꾸라졌다.
그들 뒤엔 대체 언제 움직인 건지 모르게 노인이 서있었다.
노인의 손에는 세 명이 뿌리려던 마비산 세 포가 고스란히 들려 있었다.
주변에 있던 나머지 아홉 명의 각검대원들이 깜짝 놀라며 일제히 단검을 내던졌다.
쉬익.
피슉!
아홉 명이 단검을 두 개씩 던졌으니 총 열여덟 개의 공격이었다.
헌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노인은 그저 각검대주를 향해 걸음을 옮길 뿐인데, 신기하게도 날아간 단검들이 자기들끼리 피해가는 것처럼 노인을 스치지도 못 하고 지나쳤다.
“……!”
대원들이 잘못 던진 게 아니다.
저건 분명 노인이 대단한 것.
각검대주가 눈을 한번 깜빡이자 다가오던 노인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자세히 보니 검은 복면을 쓴 노인은 원래 앉아 있던 바위 위에 고요한 물처럼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
“이제 알겠소.”
각검대주는 검 끝을 내리며 탄식하듯 말했다.
“모습을 감출 때는 화려하게, 움직일 때는 고요한 물처럼. 당신이 바로 살수 중에 최초로 신(神)이란 글자를 별호에 붙였다는 ‘일야회주 묵신’이로군.”
묵신은 고개를 저었다.
“전(前) 일야회주겠지.”
“그런가. 하긴 당대의 일야회주는 월신(月神)이라고 들었소.”
묵신은 나직하게 웃었다. 세월의 회한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흘흘, 계속할 텐가?”
“아니. 당신이라면 우리로선 상대할 수 없소.”
각검대주는 잠시 고민하다 검 끝을 내렸다.
차라리 무공으로 싸우는 정면 대결이었다면 모를까. 동창 각검대가 암살과 신법의 달인을 상대로 싸우기는 상성이 너무 안 좋은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습격이 아니오. ‘마을’의 지도자를 만나러 왔소. 급하고 중요한 일이오.”
“우리 촌장을?”
묵신은 혀를 찼다.
“그럼 며칠만 일찍 오지 그랬나. 지금 그는 마을에 없다네. 큰 사건이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잠시 갔거든.”
“그럼 지금 누가 책임자로 있소?”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은 있지.”
“그럼 그분과 만날 수 있겠소?”
묵신은 잠시 각검대주의 눈을 응시했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구만. 알았네. 여기서 기다리면 만나게 해 주지.”
“고맙소.”
각검대주는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이건 궁금해서 묻는 건데, 아까 떠나보냈다는 공동손자는 누구요? 당신을 장식품 취급했다니 믿기지가 않소.”
“흘흘, 장식품이란 건 그렇게 나쁜 의미가 아닐세. 그저 늙은이의 투정일 뿐. 내가 장식이나마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지.”
“당신 정도나 되는 인물을 그렇게 말하게 만들다니……. 믿기지가 않소. 그 정도로 대단한 아이인 거요?”
“그 아이가 대단하냐고?”
묵신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흘흘, 근데 재밌는 게 뭔지 아나?”
“무엇이오?”
“우리 마을엔 그만큼 대단한 아이가 둘이나 더 있다는 걸세.”
묵신은 놀라는 각검대주를 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우워! 우워어!”
“우오오오! 말도 안 돼!”
“잠깐, 저게 가능은 한 건가?”
“이봐. 교관님. 혹시 저거 불량품이었어?”
“멍청아! 내가 아까 시험 쳐 봤잖아! 저건 진짜라고!”
용(勇) 시험장의 분위기는 마치 축제처럼 들썩이고 있었다.
교관은 요동 출신의 거인이자 외공(外功)의 고수로 이름 난 철거사(鐵居士) 중걸이었다.
키는 칠 척 반. 몸무게는 이백오십 근.
그가 절대고수는 아니지만, 그 어떠한 고수도 중걸 앞에서 신력(身力)을 논하지는 않는다.
현(現) 무산학관의 관장 정도나 가능할까.
순수한 육체의 힘만을 따지면 중걸의 상대가 되는 사람은 전 중원에 몇 안 된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그런 중걸이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용 시험장의 지원했다는 건 나름대로 다들 자기 힘에 자신이 있는 호걸들이라는 것.
도저히 십 대 초반의 소년들이라곤 믿기지 않는 거구들이 잔뜩 흥분해서 짐승 같은 함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지금 그들의 눈앞엔 귀엽게 생긴 소녀가 커다란 목나한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어, 저기…….”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분홍빛 꽃무늬가 들어간 무복을 입은 소녀.
대미미는 난생처음 받아 보는 뜨거운 관심에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이, 이거 그냥 눕히면 되는 거예요?”
중걸 교관은 벌리고 있던 입을 닫지 못한 채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면 된다.”
“그럼 여기에……. 아앗!”
대미미는 목나한을 내려놓을 곳을 찾다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설마 한계가 온 것인가!
지켜보던 호걸 소년들이 당황하는 사이, 대미미는 머리가 신경 쓰이는지, 한손으로 왼쪽의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푸, 풀렸어.”
땋은 머리가 풀린 모양이었다.
소녀는 부끄러움과 난감함으로 울상이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소년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소녀를 응원했다.
“괜찮아! 괜찮아!”
“멀쩡해! 예쁘다!”
함성을 지르던 중 누군가가 의문을 제기했다.
“잠깐, 아직 목나한을 들고 있잖아?”
“뭣!”
“오오! 정말이다! 한손으로!”
대미미는 한손으로 목나한을 들어 올린 채, 한손으로 머리를 다시 정리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우오오오오!”
소년들은 아니, 중걸을 포함한 시험장의 모두가 불꽃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어어?”
뜨거운 반응에 당황한 대미미는 일단 목나한을 바닥에 내려놓고 머리를 다시 땋아야겠다고 판단했다.
황급히 목나한을 바닥에 내려놓았는데, 당황해서 너무 세게 내던졌는지 목나한이 ‘쩍’ 소리가 나면서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꺅!”
쇳덩어리처럼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대미미는 흘깃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중걸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대미미!”
“네, 네?”
쿵쿵거리며 다가온 중걸이 솥뚜껑만 한 손으로 대미미의 어깨를 두드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합격!”
침묵은 잠시.
다시 한번 뜨거운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오오오! 대단해!”
“박살이 났다! 완전히!”
“목나한을 박살을 냈어! 목나한을 부숴 버렸다아!”
우르르 달려든 소년들이 따뜻한 눈빛으로 대미미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쳐댔다.
대미미는 나중에 천하무적 무산 철공주(天下無敵 武山 鐵公主)라 불리게 되지만, 그건 훗날의 일.
용 시험장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이나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 시끌벅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