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17화
제8장 진재자완(眞材自完) (2)
“왜 저렇게 시끄러워?”
지(智) 시험장의 감독관 제갈승조는 긴 속눈썹과 쌍커풀을 파르르 떨며 용 시험장 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에선 거센 환호성과 짐승 같은 포효 같은 것이 한참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이성과 합리를 숭상하는 제갈승조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간 용문(勇門) 출신들은 시끄러워.”
그는 약간의 짜증을 담아 들고 있던 섭선을 “탁” 소리가 나게 접었다.
제갈승조는 입고 있던 새하얀 백포의 매무새를 정리하고 습관적으로 머리 위의 검은색 문사건을 똑바로 가다듬었다.
“설명을 계속하겠어. 너희는 무림강호에서 군사(軍師)가 주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라 생각하지?”
지 시험장에 모인 열다섯 명의 소년, 소녀들 중 가장 체형이 뚱뚱한 소녀가 손을 번쩍 들고 대답했다.
“진형과 진법을 연구해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요!”
“편견이야.”
제갈승조는 단박에 일축했다.
“너, 이름이 뭐지?”
“마희희예요.”
“뭐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지? 어디 보자. 넌 분명히 빌어먹을 삼국지연의를 읽은 적이 있을 거야. 그렇지?”
“네? 아, 네.”
마희희는 총명한 눈을 지녔지만 아직은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두 눈에서 차가운 노화를 활활 태우는 제갈승조에게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삼국지는 분명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안 좋은 면이 있다. 화자의 입장이 너무 명확해서 읽는 사람한테 고정된 인상을 주입시킨다는 점이지. 삼국지는 역사서가 아니야. ‘촉’의 입장에서 그들을 영웅시하며 그려 냈어. 당연히 촉을 방해하는 위나라나 오나라는 방해 세력이자 야비하고 잔혹하다는 인상을 갖게 만든다. 거기에 ‘짜.증.나.게’도 제갈량을 희대의 모사로 그려 내면서 뛰어난 전략을 짰다는 것에 치중해서 묘사했다. 그러니 그 후에도 군사라고만 하면 다들 전략이니 진법 같은 것만 떠올리게 되었지. 안타까운 일이야. 그런 것들을 내가 아까 뭐라고 했지?”
소년, 소녀들이 나직하게 말했다.
“편견…….”
“그래. 편견이다. 앞으로 너희가 군사가 되려면 명심해야 할 것들이다. 편견은 냉철하고 날카로운 이성을 무디게 만드는 주적이다. 앞으로도 멀리하는 게 좋아.”
앞쪽에서 뻐드렁니가 두 개나 튀어나온 주근깨 소년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편견 없이 보면 촉나라는 별로인가요?”
“아니. 촉나라는 분명 대단한 곳이다.”
제갈승조는 인정할 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넌 이름이 뭐지?”
“윤지관입니다.”
“윤지관. 촉나라는 척박한 땅에서 소수 정예의 인원만을 데리고 패권을 넘보는 나라까지 만들어 냈어.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에게 그 시절 뛰어난 인물을 뽑으라면……. 나는 거짓말쟁이에 의리만 따지는 건달 유비보다는 만능수재 조조를 높게 쳐 주고 싶다. 실제로 역사상의 승자도 위나라지.”
삼국지만을 믿고 오호대장군과 와룡을 숭상해 온 소년, 소녀들은 깊은 고민에 빠진 듯 멍한 얼굴이 되었다.
짝!
제갈승조는 박수를 한번 쳐서 모두의 시선을 다시 집중시켰다.
“어쨌거나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군사가 정말로 중요시하고 매일 해야만 하는 일은 전략을 짜는 일 따위가 아니다. 아니, 지금이 전국시대냐고. 살면서 몇 만 대 몇 만이 부딪치는 싸움을 볼 수나 있을 것 같아? 게다가 황실도 아니고 무림강호의 군사가? 마희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넌 살면서 그런 싸움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아니요…….”
“그래, 그런 거다. 너희가 무림강호의 군사 역할을 하는 이상 기껏해야 몇 십 명. 많아야 백 단위 싸움을 주로 보게 될 거다. 게다가 무림인들이 보통 병사야? 화살 따위는 검으로 쳐 내버리고 담벼락을 훌훌 넘어 다니는 무림인들에게 다수의 전법이 제대로 적용이나 될 것 같냐고.”
“하, 하지만!”
마희희가 다시 한번 손을 번쩍 들며 되물었다.
“전국에 있는 개방의 방도는 십만. 그리고 녹림수로맹도 분명 만 명이 넘는 인원이…….”
“걔네는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다 못 모여. 다 모이면 반역죄거든.”
“…….”
마희희는 마침내 침묵했다.
“잘 생각해 봐. 너흰 나름 총명하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아이들일 테니까. 군사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뭐지?”
제갈승조가 시험을 보러 온 아이들을 쭉 둘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의 두 눈에 실망의 기색이 어리려는 순간, 뒤쪽에서 한 아이가 손을 들어 올렸다.
“내정(內政) 아닐까요?”
어째선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
아픈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창백한 피부에 여자 만큼이나 길게 기른 새카만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는 소년이었다.
“내정이라……. 예를 들면?”
“인사(人事)와 정보(情報).”
“핫!”
제갈승조가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정답이다.”
시험장에 있던 아이들이 모두 뒤를 돌아보았다. 특히 마희희가 눈빛을 활활 불태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정답이란 소리에 병약해 보이는 소년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넌 이름이 뭐지?”
“섭주해라고 합니다.”
“섭주해, 잘 맞혔다. 적재적소에 적절한 인물을 배치하는 인사 문제. 갑자기 발생할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정보 파악. 실제로 무림맹의 군사라면 매일 같이 하는 일들이다. 단언컨대 쓸 일도 별로 없는 전략을 짜는 것보다는 이게 몇 배나 더 중요해.”
앞에서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윤지관이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사서(史書)에서 제갈량도 전략보단 정치가로서 더욱 뛰어났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윤지관.”
“네?”
“앞으로 내 앞에서 제갈량 이야기는 가능하면 자제하도록.”
“어, 아……. 네.”
제갈승조는 진지한 눈빛으로 아이들을 응시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지금 하는 이유는, 너희가 앞으로 군사가 될 마음을 가진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시험에서 떨어지더라도 오늘의 이야기는 잊지 마라. 내가 선배이자 지도자로서 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다. 아무리 싸움에 강하더라도 내정에 실패하면 그 조직은 망한다. 명심해.”
아이들의 얼굴에 긴장감과 결연함이 생겼다.
그랬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지금 그들은 무산학관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걸린 시험을 치는 중이었던 것이다.
“자, 이제 시험을 시작하겠다. 모두 자리에 앉아라.”
모든 소년, 소녀들이 미리 준비된 다탁에 앉았다.
시험장의 중심 부근에 비어 있는 공간에는 제갈승조가 앉았다.
그러자 제갈승조의 분위기가 변했다.
고요하고 냉철한 눈빛이 모두를 압도했다.
“지금부터 너희는 임시적으로 우리 무산학관의 군사가 되어 우리가 처한 위험을 알아낸다. 실제로 무림맹의 군사실도 이런 식으로 생겼지. 너희의 옆에 있는 대나무 바구니가 보이나?”
소년, 소녀들이 각자 자신의 다탁 옆에 있는 커다란 대나무 바구니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각각 서른 개의 서찰이 들어있다. 그게 인근의 한 마을에서 하루 동안 얻는 정보량이야.”
아이들은 바구니를 뒤적거리며 신기해 했다.
“이게 하루?”
“이렇게나 많이……!”
제갈승조는 다시 한번 박수를 쳐서 시선을 집중시켰다.
“자, 지금부터 너희는 일시적으로 우리 무산학관의 군사가 되어 그 정보들을 분석하고 위험을 색출해 낸다. 상황은 이렇다. 오늘 어떤 집단에서 무산학관을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적이 누군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공격할지 그리고 어딜 노리는지도 모른다. 상황은 시급하다. 학관의 관장님께서는 우리 군사단에게 일 각 안에 답을 내길 바란다고 하셨다. 너희는 우리의 적이 누군지 찾아내고 습격을 막아야 한다.”
제갈승조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의 위치를 가늠해 보고 말했다.
“주어진 시간은 일각이다. 여기까지 질문 있나?”
마희희와 윤지관이 거의 동시에 손을 들었다.
“정답은 있나요?”
“알맞은 정보가 이 안에 있습니까?”
제갈승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정답은 있다. 그것을 너희가 어떻게 찾는지를 모를 뿐이야.”
아이들의 얼굴이 멍해졌다.
“자, 시작하도록.”
착.
제갈승조의 섭선이 촤르륵 펼쳐지며 시험의 신호를 알렸다.
십 대 초반의 아이들에게 출제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려운 문제였다.
게다가 주어진 시간은 일각뿐이라니.
소년, 소녀들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신의 바구니에 담긴 서찰들을 재빨리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서찰을 읽느라 전력을 다해 집중했다.
저마다가 내뱉는 숨소리까지 다 들릴 만큼 조용해진 시험장.
그 안에서 서서히 각자의 개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그곳에서 섭주해는 웃고 있었다.
시험이라고 해서 단순히 외운 지식을 시험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상당히 재미있지 않은가.
‘흥미롭네. 무산학관.’
섭주해는 세 번째 서찰을 꺼내 읽으며 시험의 의도를 파악했다.
바구니 속의 서찰은 정말로 한 마을의 온갖 정보를 모아 놓았을 뿐이었다.
그날 마을의 농부가 밭을 얼마나 갈았는지.
시장에선 뭐가 제일 잘 팔렸는지. 누구의 무덤에서 제사가 있었는지. 오늘 마을 객잔에 어떤 손님이 찾아왔는지.
의미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전혀 상관없는 그런 일들이 쭉 나열되어 적혀 있었다.
‘진짜로 군사단에서 하는 일 같네. 실제로 군사들이 모여서 이런 걸 쭉 읽은 뒤에 토론하겠지?’
섭주해는 생각을 이어 갈수록 시험의 의도가 좀 보이는 듯했다.
“그렇구나……!”
섭주해는 시험관인 제갈승조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섭선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채 시험 보는 소년, 소녀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섭주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죽은 듯이 고요한 가운데 몇 명이 돌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마희희란 소녀는 바구니를 냅다 쏟아서 갖고 있는 서찰들을 온통 바닥에 펼친 뒤 일어서서 한꺼번에 읽고 있었다.
윤지관이란 소년은 다탁에 있던 세필로 글을 읽는 것과 동시에 뭔가를 끊임없이 적고 있었다.
‘으음, 근데 조금 부끄러운데.’
섭주해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소호라면 자신을 반드시 응원해 주었을 거라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섭주해는 자신에게 주어진 서찰들을 맥락만 파악하며 속독으로 재빨리 읽어 버렸다.
주어진 서찰을 다 읽고 나니 시간은 벌써 반각이나 지나 있었다.
섭주해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장 가까이에 있는 다른 소년의 바구니에서 서찰을 하나 뽑았다.
“어?”
졸지에 자신의 서찰을 빼앗긴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그건 내꺼야!”
“알아.”
섭주해는 무시하고 서찰을 속독으로 쭉 읽어 내렸다.
그러고는 이내 확신을 가졌다.
“역시.”
섭주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야. 네 거 읽어. 왜 내 거를 가지고…….”
“신경 쓰지 말고 넌 네 거나 계속 읽어. 시간 없어.”
소년이 황당해 하며 멍하니 굳어졌다.
소란스러웠던 탓일까.
모두의 시선이 섭주해에게로 향했다.
섭주해는 그 뒤로 두 개 정도의 서찰을 더 읽은 뒤에, 자신의 서찰 바구니를 들고 시험장의 중앙으로 와서 ‘턱’ 하니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엔 왜 가운데를 비워 놓았는지도 몰랐지.’
섭주해는 작게 웃으며 제갈승조에게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핫!”
제갈승조는 두 번째로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시험장 바깥쪽으로 이동했다.
섭주해는 중간에 마련된 공간에서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한 소년, 소녀들에게 말했다.
“다 읽은 사람은 여기로 모여 줘. 그리고 아직 다 못 읽은 사람은 계속 읽으면서 들어.”
주변에서 웬 이상한 놈을 보듯 경계하는 눈빛이 쏟아졌다.
섭주해는 움찔했지만, 전에 낭인들이 쫓아오면서 살기를 뿜어내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 눈빛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다.
“내가 읽은 ‘우리 마을’은 성 외곽의 시골 마을 같아. 그래도 쓸 만해 보이는 정보는 몇 가지 있어. 첫째, 오늘은 마을에서 무산학관에 고기와 식재료를 공급하는 날이다. 둘째, 무림맹에서 찾아온 사절단이 오늘 오후에 무산학관에 들어간다. 셋째, 마을객잔에 자신들을 붉은 모래(赤沙)라고 부르는 자들이 들어왔다.”
섭주해는 다 이야기한 뒤 차분하게 반응을 기다렸다.
그때, 처음으로 섭주해에게 서찰을 빼앗겼던 소년이 눈을 찌푸리며 불만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뭐하는 거야? 각자 알아낸 것 가지고 서로 토론이라도 하자고?”
“맞아.”
“우리가 왜 너랑 정보를 공유해야 해? 이건 시험이니까 우린 경쟁자야. 넌 네 것만 가지고 시험을 쳐야지.”
섭주해는 고개를 저었다.
“음……. 그러니까…… 우린 지금 일시적으로 같은 곳의 군사들이야. 그리고 정보는 공유해야해. 시험이 걱정이라면……. 나중에 각자 판단해서 답만 자기 생각대로 내면 되지.”
“그게 무슨 말이야?”
소년이 비웃었다.
주변의 시선들도 여전히 차가웠다.
섭주해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으음, 소호 형처럼은 안 되는 걸까?’
애써 냈던 용기가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다.
그때, 돌출 행동을 보이던 두 사람이 제각각 탄성을 내질렀다.
“아! 그렇구나!”
“흐응, 그렇네?”
윤지관은 재밌다는 듯이, 마희희는 불만스럽게 섭주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 나도 ‘우리 마을’에 대해 이야기할게.”
뻐드렁니가 눈에 띄는 소년, 윤지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