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3화 (172/686)

2권 18화

제8장 진재자완(眞材自完)(3)

“우리 마을은 아무래도 무산학관 바로 위쪽에 있는 마을 같아. 상점들이 되게 많고 학관의 학생들이 자주 놀러 나온대. 특이한 점이라면 오물 버리는 것을 조심하는 것 같아. 왜냐하면 지하수가 무산학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래. 그 밖엔 특이한 점이 별로 없었어. 아! 하나, ‘춘문회’라고 유력한 문인(文人) 가문의 자제들이 자주 모이는 것 같아. 모여서 시를 짓는다나 뭐래나. 역사서를 보면 후한 말에 제갈……. 케헥! 켁! 크흠! 음, 아무튼 예전부터 문인 자제들이 모이면 항상 사고를 치니까 조심해야 해.”

윤지관은 옆에서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제갈승조를 보며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때쯤 지켜보던 아이들의 눈빛이 변했다.

지(智) 시험장에 모인 아이들은 다들 총명하다.

이젠 ‘우리 마을’이 무슨 뜻인지 다들 알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구나……!”

“각자 다른 마을의 정보를 받은 거야. 내 마을이랑 네 마을이 다른 거지.”

“그럼 혼자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네.”

고작 십 대 초반의 아이들이 서로 진지하게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게 시험관의 의도였어.”

“어쩐지. 난 아까 분명히 들었어. ‘우리 군사단’이라고 말했었다고.”

“거기서부터 단서가 있었구나. 협동심을 시험한 건가?”

수군거리던 아이들이 이젠 적극적으로 다가와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다들 다시 봤다는 듯이 약간의 경탄을 담은 시선을 섭주해에게 힐끗 보냈다.

섭주해는 기분이 좋아져서 빙긋 웃었다.

“대충 알겠네. 어쩐지 내 바구니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마희희는 도도한 표정으로 턱을 살짝 쳐들었다.

“우리 마을은 평범한 농가였던 것 같아. 마을의 정보가 한 장밖에 안 돼. 그나마도 누구네 소가 옆집에 놀러갔니 하는 사소한 내용뿐이고. 근데 나머지 종이엔 최근에 움직인 요주의 단체들이 등급 별로 나뉘어져서 쭉 적혀 있었어. 특급부터 하급까지. 특징이랑 목표, 주요 활동 지역도 적혀 있어.”

마희희는 서찰들을 직접 꺼내서 보여 주었다.

정말로 몇 십 개의 위협적인 이름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섭주해는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며 물었다.

“혹시 붉은 모래랑 관련된 것도 있을까?”

“있어, 여기.”

마희희는 이미 단체들의 이름과 특징을 다 외운 듯 망설임 없이 한곳을 짚었다.

“서장마교의 암약단체 이름이 적사단이야. 이미 서장 쪽에선 과격하기로 유명하고, 몽고의 잔당이랑 연관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있어. 주요 활동 방식은 야습과 암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흥미롭게 듣고 있던 아이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서장마교!”

“우리 아버지가 서장마교는 괴이하고 잔인하니 조심하라고 했어!”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미지의 두려움이, 확신으로 변해 갔다.

“흉수는 서장마교구나. 붉은 모래가 위험 요소야.”

아이들이 확신을 가질 때쯤 섭주해가 한 마디를 더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마희희가 가진 목록을 읽어 보고 다른 단체가 더 있는지 살펴보는 게 어떨까?”

아이들이 서로를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지 뭐.”

“좋아. 확실히 해야 하니까.”

아이들은 처음과 달리 섭주해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고 있었다.

“거월방이라는 곳이 있네? 우리 마을에 모여 있어. 산적 출신이래.”

“거긴 아냐. 산적들이 무산학관을 그냥 무력으로 습격할 거라곤 보기 힘들어.”

“그래. 무력 충돌을 하려면 강해야 한다고. 보자……. 거월방은 여기 있다. 하급이야. 하급이 무력으로 무산학관을?”

“에이. 아니지.”

“어? 춘문회가 또 나왔다.”

“뭘 하고 있는데?”

“그냥. 몇 명이 몸이 아파서 의원에 갔대.”

“그럼 상관없네.”

“곽가상회가 의심스러워. 이상할 만큼 표사들을 많이 고용해서 마을로 왔어.”

“가져온 물건이 뭐래?”

“대량의 폭죽.”

“흐음?”

그 뒤로도 몇 가지 단체와 그들의 특징들이 나왔지만 딱히 눈에 띄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붉은 모래다!”

“역시!”

“뭘 하고 있는데?”

“사나운 인상의 사내들이 밤마다 관제묘 언저리에 모인대. 동네 주민들이 신경 쓰여서 관제묘 주변을 피해 다닌다는데?”

여러 곳에서 ‘과연’이라던가 ‘역시’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대충 짐작 가는 대로 지도를 만들고, 알고 있는 정보들을 이어서 큰 그림을 그려 나갔다.

이름이 많이 나온 빈도도 표시했다.

지 시험장의 아이들은 각자 개성이 강해서 지도를 잘 그리는 아이도 있고, 속기(速記)가 가능한 아이도 있었다.

“붉은 모래야!”

“곽가상회야!”

한동안의 토의와 토론을 거쳐 의심스러운 단체는 이제 한 손 안에 꼽을 만큼으로 줄어들었다.

아이들은 각자 믿는 바를 주장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들은 대부분 얼굴이 상기된 채 즐거워했다. 진짜 군사가 된 듯한 시험과정 자체가 재밌었기 때문이다.

헌데 그 와중에 섭주해, 윤지관, 마희희 이 세 사람의 얼굴은 점점 더 신중해졌다.

윤지관과 마희희는 다른 아이들의 서찰을 종합적으로, 섭주해는 마희희가 갖고 있던 위험 단체 목록에 더욱 더 집중했다.

극과 극의 표정이 된 아이들.

어느새 그들에게 주어진 일각의 시간이 다 지나갔다.

***

“왜 왔어?”

바깥쪽에서 지 시험장의 풍경을 조용히 지켜보던 시험관.

제갈승조는 섭선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채로 퉁명스럽게 물었다.

“흐흐, 우리는 시험이 빨리 끝나서. 올해 먹물들은 어떤가 구경 왔다.”

제갈승조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자. 곰 같은 거구를 지닌 용 시험장의 교관 중걸이었다.

제갈승조는 중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뒤 인상을 팍 찌푸렸다.

중걸은 평소랑 달리 굉장히 으스대는 듯한 들뜬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갈승조는 그 표정을 알고 있었다.

처음으로 무산학관 관장과 대련을 했을 때, 그리고 그 뒤에 무산학관의 교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 표정은 뭐냐.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있었지. 아암! 있었고말고!”

“허어?”

제갈승조는 섭선을 접어서 불쾌한 감정을 담아 탁탁 두드렸다.

“듣고 싶지? 네놈이 듣고 싶다면 특별히 이번 한번만 말해 주마.”

“필요 없다. 꺼져.”

중걸은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하! 그리 아닌 척해도 소용없다. 넌 분명히 듣고 싶을 테니까.”

“……곰 같은 놈이 미쳤구나. 오늘 산에서 이상한 버섯이라도 먹은 거냐?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제정신이 아니지. 아암. 아니고말고. 우리 용 시험장의 최고 기록이 깨졌다. 어마어마한 아이가 들어왔단 말이야. 내공도 없이 목나한을 한 손으로 들어서 박살을 냈어.”

중걸은 아무리 매도해도 즐거운 듯 껄껄 웃고 있었다.

제갈승조는 정말로 중걸이 독버섯을 먹은 게 아닌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용 시험장 최고 기록이라고?’

제갈승조는 이미 중걸이 히죽거릴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직접 귀로 들으니 솔직히 충격이었다.

목나한을 설계한 사람이 바로 제갈승조다.

겉은 중후한 원목 조각. 하지만 속은 철을 녹여서 만든 철나한.

처음 만들 때부터 무게중심을 바닥으로 몰아 놔서 쉽게 움직이지 않는 데다가, 오뚝이처럼 벌떡벌떡 다시 일어난다.

관절의 구조를 교묘하게 비틀어서 사람을 넘어뜨릴 때 쓰는 기술도 안 먹힌다.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

목나한과 양손을 마주 잡고 순수하게 일정 이상의 힘으로 눕히는 것뿐이다.

그런데 십 대 초반의 아이가 그걸 무식하게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제작자로서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그 아이는 사람이 아니다.

‘원숭이와 혼혈인가? 어찌 그럴 수 있지?’

제갈승조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아이가 나타났음을 직감했다.

“믿기지가 않는군. 그 녀석, 나이라도 속인 것 아니냐?”

“파하핫! 아니. 절대 그럴 리 없다. 겉모습만 봐도 알 거든. 그 아이는 진짜 꼬마야.”

“……흥. 뭐, 지켜봐 주마.”

“직접 봤을 때 네놈이 놀랄 걸 생각하니 웃음이 멈추질 않는구만.”

제갈승조는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는 중걸을 지켜보고 있자니 심사가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이미 입학한 학생들까지 포함해서 지 시험장과 용 시험장 사이엔 미묘한 알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올해에는 굉장한 인재가 들어왔어.”

제갈승조는 입꼬리를 슬쩍 올린 채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중걸의 눈이 반짝 빛났다.

“호오? 칭찬에 인색한 네놈이 그리 말하니 신기하군. 괜히 지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건 아니겠지?”

“뭐라? 사람을 뭐로 보고!”

“크흐흣. 알았다, 알았어. 그 인재는 누구냐. 저중에 있는 거냐?”

제갈승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너는 아까부터 저곳 아이들을 보고 있었지? 저 아이들의 대화 내용을 들은 감상이 어땠나?”

“어떻긴.”

중걸은 팔짱을 낀 채 송충이 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징그럽다.”

“……뭐라?”

“무슨 십 대 초반의 아이들이 저렇게 조숙해? 종이랑 글자들을 잔뜩 늘어놓고 즐거워하다니. 믿기지 않을 뿐더러 이상하고 징그럽다.”

제갈승조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생각했다.

역시 뇌까지 근육 덩어리인 짐승과는 친해질 수 없겠다고.

“징그럽긴 네놈들 쪽이 더하다! 용 시험장 출신들을 보면 제 또래 애들보다 다섯 살은 더 많아 보여! 그게 어디가 십 대 초반의 아이들이냐. 애 아빠래도 믿겠다! 그러고 보니 네놈도 그랬지. 십 대 때부터 늙은 얼굴이었어!”

중걸은 충격을 받은 듯 입을 쩍 벌렸다.

애 아빠라니.

지금까지도 총각의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는 중걸에겐 모욕 중의 모욕이었다.

“그, 그 애들이 얼마나 순수한데!”

“흥, 순수하니 더 징그럽지. 목나한을 한 손으로 박살을 내는 순수한 아이라니. 난 들어 본 적도 없다.”

제갈승조는 붉으락푸르락하는 중걸의 얼굴을 확인하자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저기 중심에 있는 꼬마가 보이나?”

“창백한 병자 같은 애 말이냐?”

“……이놈. 언젠가 결판을 내자. 내 장담컨대 저 아이가 올해 최고의 두뇌다.”

중걸과 제갈승조는 서로 잠시 노려보다가 동시에 섭주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아이가 최고의 두뇌라……. 시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아는 거냐?”

“흥, 너희 무식한 용 시험장과는 다르다. 이미 과정만 봐도 결론은 났어.”

제갈승조는 중걸에게 이왕 온 거 한번 지켜보라고 말한 뒤 아이들에게로 다가갔다. 일각의 시간이 다 지나 있었다.

***

“충분히 생각했겠지? 이제 무산학관을 공격할 집단이 어딘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공격할지 답을 내려라.”

제갈승조는 깊은 고민에 빠진 아이들을 한 명씩 불러 작은 종이에 세필로 답을 적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열다섯 명의 아이들이 각자 생각하는 바를 적었다.

섭주해가 말한 대로 모여서 함께 고민하되 답은 각자 내린 것이다.

“그렇군. 예상대로다.”

제갈승조는 답지들을 쭉 읽어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를 발표하겠다.”

제갈승조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고 기다렸다.

아이들의 얼굴에 조급함과 긴장감이 가득했다.

“적은 붉은 모래. 무림맹 사절단을 야습, 혹은 암살이 열두 명.”

아이들 중 대부분이 움찔하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토론으로 싸우긴 했지만, 가장 위험하게 알고 있던 서장마교 출신의 붉은 모래단을 대부분이 가장 큰 위협으로 뽑은 것이다.

“적은 곽가상회. 음식에 독이나 약을 타서 학관에 납품. 두 명.”

윤지관과 마희희가 두 명이라는 소리에 움찔하며 주변을 돌아보다 서로 눈이 마주쳤다.

“켁.”

“칫.”

두 사람은 유쾌하지 못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린 뒤 다시 제갈승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

제갈승조가 피식 웃으며 한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적은 춘문회. 무산학관으로 이어지는 수원(水原)에 독을 살포. 한 명.”

모두의 시선이 휙-하고 돌아가 모이는 곳.

섭주해가 난감한 얼굴로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정답은…….”

제갈승조의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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