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4화 (173/686)

2권 19화

제8장 진재자완(眞材自完)(4)

“없다.”

모든 소년, 소녀들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정답이 없다?

장난치는 거냐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일각 동안 얼마나 고민해서 내놓은 답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답이 없다고 해 버리냔 말이다.

제갈승조는 그런 아이들의 속마음을 짐작한 듯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하지만 오답은 있지. 붉은 모래를 고른 너희 열세 명은 모두 탈락이다. 다음 기회를 노리도록.”

“……!”

뜬금없고 냉철한 결론에 열세 명의 아이들은 당황했다.

제갈승조는 마희희, 윤지관, 그리고 마지막으로 섭주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날의 상황을 설명해 주겠다. 무산학관은 곽가상회의 납품을 보류하고 춘문회를 억류해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실제 현실에 정답은 없지. 의심스러운 부분엔 모두 대응했고 그날 있었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 낸 것이다. 전부 군사단의 업적이다.”

마희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 일, 진짜로 있었던 일이었어요?”

“그래.”윤지관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결론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결론? 흐음, 실제로 공격이 어땠냔 말이지? 그게 궁금하냐?”

“네!”

제갈승조가 피식 웃으며 답을 해 주려할 때쯤, 탈락된 열두 명의 아이들 중 한 명이 화가 잔뜩 난 채 소리쳤다.

“납득할 수 없어요! 왜 우리가 탈락이에요? 이건 누가 봐도 서장마교의 붉은 모래단이 위험해 보이는 거잖아요. 정답이 없다면 우리도 합격이어야죠!”

섭주해가 서찰을 볼 때 화를 냈던 소년이었다. 소년은 숨을 씩씩거리며 이를 앙다물고 있었다.

어린아이다운 치기(稚氣)다.

제갈승조는 싸늘한 눈빛, 차가운 얼굴로 소년을 응시했다.

“그 ‘누가 봐도 정답’인 걸 확인하라고 군사를 뽑는 줄 아나? 그럴 거면 아무나 데려다 군사 자리에 앉혀도 되지. 왜 이런 학관에서 군사를 뽑아 양성하겠나?”

“그건…….”

“왜 합격시켰는지 궁금하면 합격자의 말을 들어 보면 되겠군. 섭주해, 말해 봐라. 넌 왜 붉은 모래를 고르지 않았지?”

갑작스레 모든 시선이 섭주해에게 집중되었다.

“어…… 저 말입니까?”

섭주해는 창백한 안색으로 잠시 당황하다가 말했다.

“붉은 모래단은 분명 위험도 최상급의 단체지만……. 암살과 기습이 특기라고 적혀 있었는데 너무 스스로 주변에 알리면서 돌아다니는 게 의심스러웠어요.”

“아!”

아이들이 당황하며 탄성을 내뱉었다.

암살자들이 대놓고 자기가 암살자라고 하면서 돌아다니지는 않는다.

간단한 이치지만, 원래 한번 고정관념이 박히면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법이었다.

“정체가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암습은 힘들어지잖습니까? 저는 그래서 그들이 진짜 붉은 모래가 아닐 거라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게다가?”

섭주해는 담담하게 답했다.

“시험관님께서 처음에 ‘편견’은 지양하는 게 좋다고 언급하셨던 것이 하나의 단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객관적으로 판단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핫!”

제갈승조는 짤막하게 웃은 뒤 옆에 있는 마희희와 윤지관을 바라봤다.

“너희는? 똑같이 생각했나?”

윤지관은 즐거운 듯이, 또 마희희는 살짝 질투하듯 섭주해를 힐끔거리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제갈승조는 화를 내던 소년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편견을 갖지 마라. 나는 분명히 단서도 줬고, 주어진 정보들 속에 붉은 모래가 아니라는 사실들도 끼어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붉은 모래단이 아니었다. 이름만 사칭했을 뿐 삼류 무인들이었어.”

아이들은 충격을 받은 듯 안색이 창백해졌고, 이내 납득하며 하나둘씩 시험장을 떠났다.

분개했던 소년은 끝까지 제갈승조와 합격한 세 명을 노려보다가 사라졌다.

“다들 갔군.”

제갈승조의 표정이 변했다.

냉철한 시험관에서 직전 제자를 보는 듯 따뜻한 눈빛이 되었다.

“자, 이제 선언하지. 너희 셋은 합격이다. 축하한다.”

씩 웃는 섭주해.

윤지관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방방 떴고, 마희희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콧대를 세웠다.

“그리고 실제 정답은 춘문회였다. 고위 관직자의 자식들. 그들은 무림인들이 강성해지는 것을 싫어했고, 나라를 위한다는 명목하에 학관으로 흘러드는 수원(水原)에 독을 타려 했던 모양이야. 어긋난 애국심이 이렇게나 무서운 거지.”

“아……!”

마희희가 당황하며 물었다.

“그럼 곽가상회는?”

“오해였었다. 표사를 늘린 건 최근에 표국끼리 경쟁이 치열해져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랬다더군. 대량의 폭죽도 실제로 행사에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럼…… 저희는 왜……?”

자존심이 매우 상하지만, 그렇기에 마희희는 더욱 묻는다.

정답이 춘문회라면 섭주해만 합격했어야하는 것 아니냐는 뜻이다.

제갈승조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시험의 목표는 ‘편견’을 갖지 않고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느냐는 거였다. 그에 대해서 너희 셋은 동일한 점수로 다 합격이야. 실제로 곽가상회는 마음만 먹으면 무산학관에 위협을 끼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실제로도 우리 군사단에서 사람을 보내 대응했었다. 섭주해 네가 춘문회를 고른 건 그들의 ‘동기’에 주목했기 때문일 테지?”

“예.”

섭주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지관과 마희희는, 시험 시간이 끝나기 직전까지 위험 집단 목록을 뚫어져라 읽고 있던 섭주해의 모습을 떠올렸다.

윤지관은 ‘과연’이라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마희희는 분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정답은 정답이다.

두 사람은 섭주해에게 진 것이다.

“확실히 곽가상회는 춘문회에 비해 무산학관을 공격할 이유나 명분이 없지. 정답이지만, 때론 논리적이지 않은 사건도 터지는 법이다. 세상엔 미친놈들이 많거든. 그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대비하는 것 또한 군사가 해야 할 일이야. 편견을 갖지 않는다는 ‘편견’에 빠지지 마라.”

섭주해는 잠시 눈빛이 흔들린 뒤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울 점이 많았던 시험이었다.

“너희 셋 모두. 지 시험을 통과한 것을 환영한다. 너흰 이제부터 무산학관의 학생들이야. 앞으로 서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해서 뛰어난 군사가 되길 바란다.”

기쁘고 뿌듯한 선언이었다.

어렵고 혼란스러웠던 지 시험장의 시험은 그렇게 끝이 났다.

***

“휴우.”

조서인은 이차 시험까지 통과한 뒤에야 마침내 마음을 놓고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이차 시험은 간단하면서 이상했다.

앞머리가 벗겨진 대머리 중년 사내의 앞에 앉아서 가만히 서로 눈을 마주치는 것이다.

대머리 중년 사내는 무서울 정도로 무심한 얼굴로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이상한 패기에 짓눌린 조서인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버텨 냈다.

뒷목이 간질간질하고 섬뜩했다.

이게 대체 무슨 시험이고, 뭘 근거로 평가하는지도 몰랐지만 왠지 모르게 눈을 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대머리 중년 사내는 마지막에 딱 두 마디만 말했다.

“합격, 서(西)”

그 뒤엔 귀찮다는 듯 손짓으로 내보내졌다.

조서인은 아직까지도 그게 대체 어떤 시험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합격했으니 다행이라 생각할 뿐이다.

“합격했네!”

합격자 대기실로 들어가니 안면이 있는 문주희가 반겨 주었다.

“으응, 간신히.”

“합격했으면 합격한 거지. ‘간신히’가 뭐니. 간신히가.”

문주희가 힘내라는 듯 등을 팡팡 두드려 주었다.

“그렇지만 진짜 간신히 됐어. 다들 생각보다 너무 뛰어나더라고. 내가 체 시험 마지막 합격자야.”

“그랬니?”

“응. 한 명이라도 나보다 빨랐으면 떨어졌을 거야.”

조서인은 다시 생각해 봐도 간담이 서늘했다.

“뭐 어때. 넌 합격할 만하니까 합격한 거야. 이왕 들어왔는데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고마워. 그렇게 말해 줘서.”

조서인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웃었다. 문주희는 속이 따뜻한 소녀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그거 알아?”

문주희는 고양이 같은 얼굴로 주변을 휙휙 돌아보더니 조서인의 귀에 조용히 말해 주었다.

“지금 시험관들 다 난리 났어.”

“어? 왜?”

“체, 용, 지 시험 모두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했대. 있을 수 없는 인재들이 들어왔다나 뭐라나.”

조서인은 자신도 모르게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있을 수 없는 인재라면 한 명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장소호.

세상 모든 것이 그를 돕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던 소년.

장소호는 함께 도착했던 아이들과 함께 셋이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소호가 조서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돌렸다. 조서인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대단하네.”

“그렇지? 근데 더 신기한 게 뭔지 알아?”

“뭔데?”

“체, 용, 지 시험의 수석 합격자들이 모두 같은 일행이라는 거야.”

“……!”

조서인은 다시 한번 장소호 일행을 쳐다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아야만 했다.

믿기지가 않는다.

그렇다면 장소호와 함께 온 소년, 소녀가 각자 용과 지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는 것 아닌가?

특히 소년 쪽은 얼핏 봐서 엄청나게 병약해 보였는데, 대체 어떻게 용 시험을 우승했는지 궁금했다.

“그게 가능해?”

“그러게 말이야! 지금 시험관들이 그 셋이 어디서 온 거냐고 궁금해 하고 난리더라구.”

조서인은 그런 정보를 용케 알아오는 문주희가 더 궁금했다.

“대단하긴 하네.”

“그 셋이 같은 방(邦)에 소속되면 더욱 충격일 것 같지만.”

“방? 방이 뭐야?”

“방이 뭐냐면…….”

문주희가 설명해 주려는 때, 체, 용, 지 시험의 교관들이 다 함께 들어왔다.

소년, 소녀들의 시선이 한데 모인다. 세 교관들 중 가운데 서 있던 검은 무복의 사내, 철표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이 방에 있는 너희는 무산학관에 합격한 최종 합격자들이다. 축하한다. 앞으로 더욱 단련하여 훗날 무산학관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 되길 바란다.”

방 안의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씩 웃었다.

소년, 소녀들은 주변을 돌아보며 서로의 얼굴을 대충 익혔다.

“이제부터 너희가 소속될 방을 알려 주겠다. 혹시 방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간단히 설명해 주마. 너희가 앞으로 지내게 되는 기숙사이자, 너희를 이끌어 줄 선배들의 이름이다. 무산학관의 동, 서, 남, 북 사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방신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중추절 축제 때는 아마 기숙사의 이름을 걸고 경쟁하게 될 것이다. 이상. 이제 너희가 소속될 기숙사 이름을 호명하겠다.”

조서인이 놀라서 옆을 쳐다보니 문주희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소속되는 기숙사는 상당히 중요해. 각 기숙사마다 특성이 너무 강해서 어느 기숙사에 소속되느냐에 따라 우리의 앞날이 좌우 되거든. 이차 시험 때 한 게 그거야. 본성을 꿰뚫어 보는 신안(神眼) 무학(無學) 대사가 우리를 평가했잖아?”

“그 대머리 중년 아저씨?”

“응? 하핫! 뭐야. 너 몰랐구나? 대머리 중년 아저씨라니!”

문주희가 즐거운 듯 킥킥대며 웃었다.

“당연히 모르지. 난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

조서인이 살짝 토라져서 중얼거리자 문주희가 다시 그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후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어차피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구.”

“으응.”

“그 대머리 중년 아저씨가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신안이라구. 우리 마음을 우리보다 더 잘 꿰뚫어볼걸? 그리고 어차피 결정되는 건 같을 거야.”

꿰뚫어 본다.

결정된다.

조서인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팟’ 하고 머릿속에 뭔가가 떠올랐다.

“자, 잠깐만. 그럼 지금 결정된 기숙사가 평생 바뀌지 않는 거야?”

“응, 물론이지. 한번 정해진 기숙사는 변하지 않아.”

“어, 그럼 우리 둘이 다른 곳으로 배정되면?”

“계속 다른 기숙사인거지.”

문주희는 헤어지면 섭섭하겠냐고 물으면서 은근한 눈길을 주었다.

조서인은 얼굴이 빨개졌다.

“기숙사마다 특징은 확실해. 실제로 신안 무학대사는 아이들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지 파악해서 결정을 내린대.”

문주희는 자기가 알아 온 정보를 아낌없이 조서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문주희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정의로움을 중시하는 현무방(玄武邦).

힘을 중시하는 청룡방(靑龍邦).

성공을 중시하는 주작방(朱雀邦).

재미를 중시하는 백호방(白虎邦).

“자, 호명하겠다. 우선 각 시험의 수석부터 시작하도록 하지.”

이어서 철표의 호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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