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20화
제8장 진재자완(眞材自完)(5)
철표는 시험 성적 순서대로 호명을 하는 듯했다.
장소호가 제일 먼저 불렸고 그다음 문주희, 조서인 순으로 호명하였다.
“문주희, 남방(南方).”
문주희는 씩 웃은 뒤 주먹을 움켜쥐며 기뻐했다.
조서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자!”
“주작방에 원래 가고 싶었어?”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작방은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들이 가장 많은 곳이야. 그래서 가장 경쟁이 치열하기도 하지만……. 뭐, 그야 어디든 그렇겠지. 상인 출신들이 많아서 시설도 좋대. 원래 돈이 많은 곳이 가장 좋은 법이잖아?”
“그런 거야?”
“그럼! 돈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문주희의 눈이 금화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조서인은 이 정도 집착이라면 언젠가 그녀가 돈을 잔뜩 모아 거부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혹시 가기 싫은 곳도 있었어?”
“기숙사 중에?”
“응.”
“으음, 있지. 딱 한 곳.”
문주희가 불편한 표정으로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거기는 말이지. 선배들 성적이…….”
그때 철표가 조서인의 이름을 호명했다.
“조서인, 서방(西方).”
“…….”
문주희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조서인은 눈을 끔뻑거렸다.
“아, 음…….”
뽀얀 얼굴.
작은 눈에 길지 않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치가 그리 빠르지 않은 조서인이었지만 그래도 지금 만큼은 문주희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저기, 안 가고 싶었던 곳이……. 혹시 백호방?”
“으응.”
“거기에 내가 된 거네?”
“으응. 난 네가 주작방으로 올 줄 알았는데. 이상하네.”
어색한 대답이었다.
조서인과 문주희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문주희는 조서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그러고는 조서인의 등을 아프도록 팡팡 두드렸다.
“으악? 왜?”
“그렇다고 뭘 그렇게 풀 죽어 있어! 우리 아빠가 사내대장부는 항상 당당해야 한다고 그랬어, 바보야!”
“내, 내가 언제 풀이 죽었다고 그래.”
“풀 죽어 있었잖아. 바아아보야.”
문주희는 허리에 손을 얹고 소리쳤다.
“분명 백호방은 내가 가고 싶지 않았던 곳이긴 하지만 뭐, 어때! 기숙사는 달라도 수업은 같이 받는다구. 그 점에선 조금도 차이가 없어.”
“어, 그래?”
“그래. 그러니까 이 누나랑 떨어졌다고 울지 마, 알았지?”
난생처음 받아 보는 동생 취급에 조서인의 얼굴이 빨개졌다.
“내가 언제 울었다고!”
“으이그, 울기 직전의 얼굴이었거든?”
조서인은 손가락으로 코끝을 부비면서 고개를 돌렸다.
지금껏 자신에게 가장 잘해 준 소녀와 다른 곳으로 가는 건 슬픈 일이었지만, 모름지기 사내로 태어났기에 그걸 인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칫, 나이도 같으면서.”
조서인은 괜히 투덜거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백호방은……. 으음, 가 보면 알 거야. 나름 특이한 면이 있긴 한데 전체적으로 수업 성적이 안 좋달까……. 너무 따로 논달까. 그래도 아까 내가 말했듯이 우리 모두 수업은 다 똑같이 듣는 거야. 그러니까 기죽지 말고 계속 노력해. 알았지?”
조서인은 문주희의 어설픈 위로에 마음이 더욱 심란해졌다.
대체 백호방이 어떤 곳이기에 문주희가 저 정도로 위로를 한단 말인가.
“이동한다.”
발표를 마친 철표를 따라 무산학관의 중앙광장으로 갔을 때, 조서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광장 한편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었다.
황갈색 무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소년, 소녀들이 몇 개의 무리로 모여 커다란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 위에서 화려한 깃발을 흔들며 소리치는 선배들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저게 청룡방, 저건 현무방, 저 황금 섞인 깃발은……. 주작방. 과연, 제일 화려하네.’
조서인은 옆에 있는 문주희를 힐끗 바라봤다. 과연 눈을 반짝거리며 기뻐하고 있었다.
주작방의 화려한 모습에 마음이 들뜬 듯했다.
‘어? 그런데 백호방은?’
푸른색, 검은색, 붉은색 완장들은 보이는데 하얀색 완장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철표는 오십여 명의 합격자들을 쭉 열을 맞춰 세운 뒤 단상 앞으로 다가갔다.
나지막한 단상에는 범상치 않은 모습의 노사(老死)들과 덩치가 커다란 사내가 한 명 서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던 중 조서인은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덩치가 커다란 사내, 키는 칠 척. 머리는 뻣뻣해서 사방으로 뻗쳤고, 얼굴엔 묵직한 흑색 패왕 가면을 썼다.
두꺼운 목선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체형이 엄청났다. 체 시험장의 감독관이었던 중걸조차 그에 비하면 일반적인 사내의 모습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니, 단언코 그는 조서인이 살면서 본 가장 큰 사람이었다.
“반갑다. 나는 무산학관의 관장 철우라고 한다. 예전에 가면철왕이라고도 불렸지.”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닌데 낮고 울림이 큰 목소리가 커다란 광장을 가득 채웠다.
조서인은 등골이 자르르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에 압도당한다는 건 아마 이런 느낌일 것이다.
옆을 힐끔 쳐다보니 분홍빛 비단옷을 입은 건방진 원형주조차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다.
“너희는 지상 최고의 무림학관이자 인재 양성소에 들어온 것이다. 자부심을 가져라. 비록 무산학관의 역사는 길지 않지만, 앞으로는 무산학관 출신이란 것만으로도 전 무림강호가 인정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뭐든지 배우고 익혀라. 너희가 지금 할 일은 그것뿐이다.”
가면철왕 철우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자리로 돌아가 털썩 앉았다.
조서인은 단상 위에 있던 노인들이, 새로 들어온 학생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피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뭔가를 찾듯, 신중히 아이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가면철왕이야……!”
문주희가 들뜬 얼굴로 중얼거린다.
“가면철왕은 나도 알아. 무림맹 최고수지?”
“응. 선대 무림맹주의 수신호법이었잖아. 그런 사람이 무산학관 관장이라니. 그것만으로도 여기에 온 보람이 있어.”
조서인은 가면철왕 철우의 이름을 되뇌다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철표 교관님이랑 이름이 비슷하네?”
“몰랐어? 철표 교관은 가면철왕의 동생이야.”
“어어? 정말?”
“응. 관장님이 본가에서 부른 거라 들었어. 자세히 보면 꽤나 비슷한 점이 많아.”
문주희는 그것도 좋은 듯 얼굴이 발그레했다.
그때 한쪽에 모여 있던 선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작방은 이쪽으로 모여라!”
쿵. 쿵. 쿵.
주작방 붉은색 문양을 소맷자락에 새긴 학생들이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다들 웃는 얼굴.
주작방에는 황금 실을 두른 깃발처럼 화려한 외모의 소년, 소녀들이 즐비했다.
“현무방은 이쪽이다!”
지이잉.
검은색 현무 문양을 소매에 새긴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뒷짐을 지고 서서 외쳤다. 맨 앞에 있는 무표정한 얼굴의 소년이 징을 치며 시선을 모았다.
마치 작은 군대와 같은 모습이었다.
“청룡방! 모여!”
딱! 따닥!
짧고 강렬한 명령.
푸른빛 청룡 문양을 소매에 새긴 아이들이 손바닥만 한 대나무 막대 두 개를 묘한 박자로 두드렸다.
하나같이 다부진 몸매에 날렵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서인아, 그럼 난 가 볼게. 수업 때 보자.”
문주희는 조서인에게 쾌활하게 인사하고는 주작방 쪽으로 달려갔다.
조서인은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함께한 시간으로만 따지면 얼마 안 되었을 텐데도, 문주희는 꽤 깊은 존재감을 남긴 것이다.
옆을 돌아보니 아이들이 대거 빠져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무산학관 신입생 총원 오십 명.
그들이 공정하게 배정된다면 각 기숙사에 열둘이나 열세 명씩 배정될 것인데 어째선지 생각보다 더 많은 인원이 빠져나갔다.
“어어?”
문제를 인식할 때쯤엔 이미 대부분이 떠나 버린 상황이었다.
조서인은 당황했다.
광장에는 단 일곱 명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괜히 등에 메고 있던 창을 만지작거리며 우물쭈물했다.
기분 탓일까?
남은 일곱 명은 조서인 본인을 제외하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인물들뿐이었다.
“뭐야. 지 시험장 합격자가 다 여기 남은 거야? 이상하네. 이해할 수가 없어. 도대체 기준이 뭐야?”
살이 쪄서 둥글둥글한 소녀가 날카로운 말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신안 무학대사의 눈은 정확해. 그리고 백호방은 재미를 추구한다고 들었어. 나야 역사를 좋아하니까 그럴 만한데. 너는 뭘 좋아해?”
뻐드렁니에 주근깨가 가득한 소년이 물었는데 소녀는 “네가 알게 뭐야!”라고 소리치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게 어딨어? 말해 줘.”
“싫다니까?”
“신안 무학대사의 눈은 정확하다고. 넌 분명 좋아하는 게 있을 거야.”
뻐드렁니 소년은 굴하지 않고 집요하게 소녀에게 질문을 던져댔다.
‘저 둘은 지 시험장에서 왔나 보네.’
어렵다던 시험을 합격했다니 대단해 보였다. 시선을 옆으로 돌려보았다. 한 구석에 키가 작고 성깔 있어 보이는 모습의 소년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서 있었다.
‘쟤는 인상이 무서워.’
소년은 한마디도 말을 꺼내지 않아서 조서인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눈매가 날카롭고 양손에 장갑을 끼고 있다는 게 특이했다.
‘그리고…… 문제의 세 명.’
조서인은 자신이 이들과 같은 기숙사에 배정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오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가 봐도 이번 시험에 파란을 일으킨 주역들이다.
장소호와 그 외 두 명.
세 사람은 서로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특이해……!’
저들이 지, 용, 체 시험에서 각각 수석을 차지했다는 소년, 소녀들이다.
조서인은 자신이 이런 특이한 집단에 소속되었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이동!”
“이동한다!”
그때 깃발을 든 선배를 중심으로 주작방, 현무방, 청룡방이 제각각의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어?”
장내는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단상 위에 있던 철우와 노사들이 광장을 빠져나갔고, 그에 뒤따르듯 세 개의 무리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백호방 소속 신입 일곱 명은 광장에 덩그러니 남겨져 버렸다.
어이가 없는 상황에 당황하길 잠시, 그들은 알아챘다.
딱 한 명.
원래 선배들이 대기하던 곳에 누워서 자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으이익우윽.”
그 사람은 길쭉한 팔다리로 격렬하게 기지개를 켜더니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났다.
“어어어?”
졸린 듯한 눈으로 일곱 명의 신입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올해는 좀 많네?”
그는 세상만사 귀찮은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때가 탄 소맷자락. 처음엔 흰색이었을 것 같은 백호 문양이 아이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여치 같은 인상이었다.
팔다리가 길고 얼굴도 말처럼 길다. 눈은 의외로 동그랗고 큰데 입은 아기처럼 조그마했다.
“어…… 그러니까……. 반갑다. 난 백호방의 방장 봉천이야.”
그는 자신이 열다섯 살이고 용 시험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누가 봐도 스물은 되었을 것 같은 외모인데 놀라운 이야기였다.
조서인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뚱뚱한 소녀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 뻐드렁니 소년도 난감한 듯 어색하게 굳어 있다. 인상이 사나운 소년은 눈을 감더니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반가워요!”
그 시점에서 들려오는 쾌활한 인사에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장소호가 햇살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가식이 아니라 진심이란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맑은 미소였다.
장소호뿐만이 아니다.
함께 있던 소년과 소녀도 꾸벅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정말…… 신기한 애들이야.’
이런 상황에서 저런 해맑음이라니.
조서인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반가워.”
봉천은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웃더니 몸을 돌렸다.
“그럼 가자. 백호방으로 안내해 줄게.”
귀찮다는 듯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를 따라 모두 일곱 명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조서인은 뚱뚱한 소녀의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았다.
“저기요, 봉천 선배.”
“으응?”
“왜 백호방에선 선배밖에 안 온 거죠? 다른 기숙사에선 잔뜩 와서 응원했잖아요? 후배들을 무시하는 건가요? 아니면 이런 행사에 참석하지 않을 만큼 자기 단체에 대해 소속감이나 자존감이 없나요?”
뚱뚱한 소녀의 지적은 조서인이 깜짝 놀랄 만큼 성숙하고 날카로웠다.
“으음, 그런 이유가 아니야. 우린 좀…… 특이하거든. 그냥 그래서 그래. 무시하거나 자존감이 낮다든가 그런 게 결코 아냐.”
“이해가 안 되는 답변이에요. 후배는 선배에게 배워야 하는 법인데. 지금 모습으론 배울 게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시작부터 자존심 상하고 침울해졌어요.”
옆에서 뻐드렁니 소년이 소녀를 만류했다.
“야야.”
“뭐! 맞잖아?”
선배는 화를 낼 것인가?
조서인이 당황하며 기다렸는데 봉천은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어색하게 웃으며 난감해했다.
“으음, 다들 나를 처음 보면 믿음이 안 간다고 하더라. 웅이나 설지도 그랬어. 그런데 배울 게 없다는 건 틀려. 우리 방엔 굉장한 사람들이 있거든.”
“굉장한 사람이라고요? 뭐가 굉장한데요? 무공이요?”
뚱뚱한 소녀가 비웃듯이 말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봉천은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있어, 정말로. 무공이 굉장한 사람.”
***
탁. 탁. 탁.
일정한 박자로 나무 지팡이가 바닥을 짚었다.
어둡고 고요한 밤의 오솔길.
당장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아직 청년이라 부를 수 없는 맹인 소년이 걸음을 멈췄다.
소년은 눈을 감은 채 좌우를 살피더니 잔잔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날이 아직 쌀쌀하네요. 기다리기 힘들죠?”
그 말에 답하듯 수풀 속에서 세 사람이 뛰쳐나왔다.
날렵한 몸놀림, 곧바로 검에 손을 가져가는 모습에선 그동안의 풍부한 경험이 드러난다.
“드디어 잡았다. 가주를 시해한 괴물.”
분노와 멸시의 시선이 쏟아지는 데도 불구하고, 소년의 얼굴엔 미동도 없다.
소년은 눈을 감은 채 하늘을 한번 올려다본 뒤 부탁하듯 말했다.
“이러다 늦겠네. 빨리 하죠.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서.”
소년 맹인의 지팡이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