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21화
제8장 진재자완(眞材自完)(6)
침울한 기운이 감도는 남궁세가에 손님이 찾아왔다.
그 손님은 검은색 군마(軍馬)를 타고 벼락처럼 들이닥쳤다.
그는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나타나자마자 단신으로 남궁세가의 대문을 박살을 냈으며, 달려드는 무인들을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날려 버리면서 가주전(家主殿)까지 일직선으로 돌파했다.
안휘성의 패자(覇者)인 남궁세가로서 그런 상황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곧바로 가문 전체에 비상 신호가 울려 퍼졌고, 가주 직속 창천일대가 내문(內門)에서 뛰쳐나와 방어벽을 펼쳤다. 외문(外門)에 머무르던 뇌공대는 결사(決死)의 각오로 달려들어 급히 그 ‘손님’을 포위했다.
가장 먼저 손님을 알아본 가신(家臣)은 뇌공대주 유자항이었다.
그는 분노로 가득한 채 뛰쳐나왔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검 끝을 내렸다.
“남궁세가의 중문(中門)이 무너진 건 십삼 년 만이군요. 오랜만입니다, 대인. 전혀 변하지 않으셨군요.”
푸르륵.
잔뜩 흥분한 말이 거칠게 투레질을 해 댔다.
검은색 군마(軍馬)는 마치 제왕처럼 오만했다. 인간을 내려다보며 발굽으로 땅을 쿵쿵 밟는다.
그때마다 근처의 무인들이 움찔거렸다.
“큭.”
“으윽……!”
허나 검은색 말 뿐인가?
흑마 위에 타고 있는 사내의 존재감에 비하면 사실 말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
짙은 살기와 분노의 기백.
삼국시대의 여포가 이랬을까 싶다. 지금 이 자리에 남궁세가의 무인 기백 명이 서 있지만 다들 위압감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잠시간 침묵 후, 흑마 위의 사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휴는 어디에 있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뇌공대주 유자항의 태도는 전에 없이 정중했다.
마침내 검은색 군마에서 내리는 자.
장기린이다.
평범한 옷에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지만, 분노로 가득 찬 그의 존재감은 남궁세가 전체를 집어삼킬 듯 점점 커져만 갔다.
유자항이 눈짓하자 주변의 무인들이 서둘러 길을 열었다.
장기린은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는 가주의 내전으로 들어가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서둘러 움직여!”
“토혈을 하셨다!”
“뜨거운 물! 깨끗한 천을 더 가져와라!”
“주문한 약재는 왜 안 오는 거야!”
그곳은 무기만 없을 뿐이지 이미 전쟁터나 다름없다.
의원들 십여 명이 정신없이 움직이며 무언가를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밖으로 나오길 반복했다.
나오는 의원들의 손엔 예외 없이 피에 절은 천이 들려 있었다.
한창 치료가 진행 중인 것 같았다.
“가문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치료 중입니다만…….”
유자항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살 수는 있는 건가?”
“…….”
유자항은 대답하지 못했다.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을 뿐이다.
“휴를 보고 싶소.”
“잠시 들어가시지요.”
장기린은 입구에서 잠시 멈췄다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짙은 약재 향이 코를 찔렀다.
그리고 보인다.
죽어 가는 그의 형제.
장기린은 들끓는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이성을 잃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었는데 그 결심이 흔들리려 하고 있었다.
“흉수는 누구였소?”
“믿기지 않지만…….”
유자항은 주변의 귀를 의식한 듯 가까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십오 세 정도의 소년이었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맹인이었다는군요.”
“……휴가 십오 세 소년에게?”
정녕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장기린은 그것이 말도 안 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세상엔 타고난 이들이 얼마든지 있고, 그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장기린 자신이 그랬듯이.
“살수였소?”
“정면…… 비무였다고 합니다.”
유자항은, 이는 가주인 남궁휴의 증언이라고 했다.
“제왕검형은…… 쓸 수 없었…… 쿨럭, 너무 빨라. 이미 뇌전검을 익혀서 대책을 세울 틈이……. 마치…… 객주님 같은…… 알려야……!”
유자항은 비통한 심정으로 그때 들은 말을 장기린에게 이야기 해 주었다.
그 말을 남기고 남궁휴는 깨어나지 못했다. 더불어 의원들도 난색을 표하고 있다고 했다.
‘나와…… 같다고?’
장기린은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남궁휴가 괜한 말을 했을 리가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중대한 문제점을 시사하고 있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장기린은 자신의 마음속에 드는 의문을 애써 부정했다.
“상처는 명확합니다. 어깨를 꿰뚫리고, 그다음에 대각선의 참격. 내장 기관도 상했습니다. 누군지 몰라도 뇌전십삼검을 귀신 같이 파훼한 게 분명합니다. 비무가 시작되자마자 일격에……. 큭. 역시, 우리가 호위를 했어야 했는데.”
유자항은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비무가 시작되자마자 당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소?”
“왼쪽 어깨가 비는 건 뇌전십삼검 기수식의 약점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암습이면 무리 없이 막으셨을 터. 가주께선…… 방심한 탓에 대비할 틈도 없이…….”
유자항 자신이 뇌전십삼검의 고수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상대는 이미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뜻이었다.
뇌전십삼검의 치명적인 약점을 찾아내서 철저히 초반에 빈틈을 노린다.
게다가 상대는 십오 세 소년이다.
당할 수밖에 없는 작전이었다.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객잔에 있을 때 이미 전투요결을 배운 남궁휴였다.
장기린은 십삼년의 세월을 거쳐 남궁휴가 얼마나 강해졌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단지 작전 뿐만이 아니다.
상대 소년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터.
‘게다가 뇌전십삼검의 파훼법은 어디서 얻었지?’
장기린은 문득 십삼 년 전에 목격했던 하나의 사건을 떠올렸다.
남궁세가의 가주와 총관이 벌였던 가문 쟁탈전.
그때 무공이 강한 건 총관이었으나, 누구나 무공이 약할 거라 생각했던 가주가 도리어 총관의 무공을 연구하고 또 연구해서 철저히 파훼해 이기지 않았던가.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땐 그나마 두 사람이 같은 가문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다.
헌데 이번엔?
그 소년은 대체 누구기에 뇌전십삼검을 미리 익히고 철저히 파훼해 낼 수 있었는가.
‘뭔가가 더 있어.’
장기린은 누굴 만나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유 대주. 이건 우 노사께서 보낸 약이오.”
“우 노사라면……?”
“무림에선 흑신의라 불린다고 알고 있소.”
“흑신의!”
유자항은 장기린이 건넨 목함을 천하의 보물을 받듯 공손하게 받았다.
“지금 마차를 타고 오고 계시니 오늘 안에 도착할 것이오. 휴는 그분께 부탁드리는 게 어떻소?”
“그런……!”
유자항은 너무 감격한 탓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신의라 불리는 사람들은 물욕이 없고 종잡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왕후장상이라도 그들에게 치료를 받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장기린은 정신을 잃은 남궁휴에게 다가가 곁에서 조용히 말했다.
“휴, 믿는다. 반드시 일어나라.”
남궁휴의 눈썹이 꿈틀 움직인 듯한 건 착각이었을까.
장기린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유 대주. 남궁연을 만나고 싶소.”
“이쪽으로.”
유자항의 공손한 안내를 받아 장기린은 남궁연이 있을 ‘천안각(天眼閣)’으로 향했다.
***
“아주버님.”
장기린을 만난 남궁연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귀밑쯤에서 파격적으로 짧게 자른 머리와 옥빛 비단옷이 잘 어울리는 여인이다.
아름답다기 보단 단아하단 말이 잘 어울리는 여인. 특히 지혜롭게 빛나는 두 눈은 여전했다.
운화와 연이 맺어질 만하다.
헌데 며칠이나 잠을 못 잔 듯 얼굴이 너무 초췌했다.
“음…….”
장기린은 잠시 말을 잃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두터운 종이 더미가 사람의 허리 높이까지 잔뜩 쌓여 있었다.
“복수는 좋지만. 본인이 쓰러지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오.”
“명심할게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남궁연의 두 눈에선 포기하는 기색이 없었다. 장기린은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 짓는 것만이 남궁연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운화에게 이야기는 들었소. 흉수는?”
남궁연의 눈빛이 불타올랐다.
“아직 잡히지 않았어요. 쫓아간 가신 두 명이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인근 가도에서 마차를 타고 도주했습니다.”
“방향은 알고 있소?”
“아마도 하남 서부? 부끄럽지만 완전히 놓쳤어요. 도주에 능숙한 자들이 돕고 있었거든요. 흔적을 지우고 대상을 실종시키는 데 전문적인 자들이에요. 미끼까지 써서 시선을 분산시켰습니다.”
장기린은 묵묵히 기다렸다.
내용상으론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상황이지만, 남궁연은 그런 걸로 포기할 여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흉수가 아니라 흉수를 돕는 자들로 추적 방향을 바꿨어요. 그랬더니 결국 찾아냈습니다.”
남궁연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실제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황실 동창. 그것도 최고위급 실권자의 지시였어요. 이 일은 관이 개입되어 있었던 겁니다. 관에서 지시를 내려서 남궁세가의 가주를 습격했어요.”
장기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혹시나 했건만…….’
예측이 들어맞는 게 이렇게나 안타까웠던 때가 또 있을까.
“관이란 곳은 지도자가 바뀐 것만으로도 단번에 성향이 달라지는 곳이지. 알고는 있었지만……. 안타깝군.”
“관이 습격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대천문.”
남궁연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맞아요. 제 생각도 그래요. 더불어 권력욕도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권력?”
장기린은 곰곰이 생각해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은거한 사람에게 권력이라니. 혹시 내 직위 때문이오?”
“영락제가 임명한 황사의 직위는 그들에게 발밑의 화약고 같을 테니까요.”
“소심하군.”
“원래 가진 게 많을수록 소심한 법이에요. 게다가 아주버님께선 젊죠. 천하를 노린다고 해도 충분한 나이에요. 실제로 부르기만 하면 달려올 병력도 있잖아요?”
남궁연의 말투는 의미심장해서 장기린의 속내를 찔러 보는 느낌이었다.
‘가질 테냐? 천하를 가져 볼 테냐?’라고 도발하는 느낌도 들었다.
“난 그런 것에 관심이 없소.”
“아주버님께선 그러시지만 세상이 자꾸 한쪽을 선택하도록 몰아가고 있잖아요?”
“…….”
“저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아주버님께서 한번 나서서 다 쓸어버렸으면 좋겠어요. 나라에 하등 도움도 안 되는 것들을 이참에 다 제거하지 않고 어영부영 넘기면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테니까요.”
남궁연은 평소의 지혜로운 성격은 어디에 갖다 버렸는지 급진적인 이야기를 했다.
“위험한 발언이오.”
“만약 결심하시면 미리 말씀해 주세요. 준비해 둘게요.”
장기린은 남궁연의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장기린을 과대평가하고, 하는 일에 한계가 없는 것.
어디로 보나 남편인 부운화와 완전한 판박이가 아닌가.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요.”
“무엇이오?”
“최근에 찾아낸 것입니다. 저들이 저러는 이유 말입니다……. 한 가지 더 있는 것 같은데, 근데 사실 이건 아직 확실하지 않아요.”
“뭘 찾아냈소?”
장기린은 대답을 머뭇거리는 남궁연을 눈으로 재촉했다.
“으음…….”
남궁연은 한참 고민하다가 장기린의 눈치를 보며 이야기했다.
“……황실 극비(極秘). 신수(神獸) 계획이에요.”
“!”
장기린은 근 십 년 내에 이렇게나 심신이 흔들린 적이 없었을 만큼 크게 놀랐다.
“그걸…… 대체 어디서 들었소?”
“역시 알고 계셨군요?”
장기린은 조금 고민하다가 털어놓았다.
남궁연은 이미 가족이었다.
털어놓지 못할 이유가 없다.
“안다기보다…… 실은, 내가 그 계획의 결과물 중 하나요.”
남궁연은 놀라지 않았다.
초췌한 안색임에도 두 눈에 활기를 띈다. 그녀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 같았다.
“그럼 기린이란 이름도?”
“첫 번째가 백택. 두 번째가 기린. 내가 두 번째였고, 그다음은 계획이 폐기된 걸로 알고 있소.”
“백택이라. 들어 본 적 있어요. 선덕제 폐하의 비밀스러운 호위무장 아니었나요? 흑색 삿갓을 쓴 자랑 더불어 흑백쌍위라고 불렸던 것 같은데.”
“그랬지. 그는 선덕제 뿐만 아니라 명태조 때부터 존재했소.”
남궁연이 처음으로 당황하였다.
“명나라 건국 때부터 존재했다고요? 대체 나이가 몇 살이기에?”
“나도 모르오.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십 년 전에 봤을 때까지 조금도 변화가 없었으니.”
남궁연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불사(不死)의 육체를 가졌단 건가요?”
“불사(不死)라……. 죽을 만큼 상처를 입혀 본 적도, 언제까지 살 수 있는지도 모르니 답하기 어렵소.”
“명태조 때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살고 있다면 충분히 불사라고 불러야 할 것 같네요.”
“그럴지도.”
“진시황제가 부러워하겠어요.”
남궁연은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장기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혹시 아주버님도……?”
“난 아니오. 백택과는 만들어진 과정이 달랐으니까. 실제로 이 육신은 분명 나이를 먹으면서 변하고 있소.”
장기린은 자신의 얼굴에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장기린이 알기로 백택은 수염조차 길어지지 않는다.
반면에 장기린은 매일 수염을 다듬어야 하는 삶이다.
“나를 교육시킨 것을 끝으로 황실에선 이 계획을 실패로 보고 모든 걸 폐기했었는데……. 사실 이번 일에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소.”
“그게 뭔가요?”
“마지막에 휴가 했다던 말.”
남궁연은 총명한 여인이었다.
이번 일과 그 말을 연결해 보고 장기린의 뜻을 눈치챘다.
“그럼 혹시……?”
“아무리 빈틈을 노렸다 해도 어린 소년이 남궁세가의 가주를 이긴다는 건 어려운 일. 게다가 휴가 그 소년에게서 나를 떠올렸다면……. 그건 흔한 경우가 아닐 것이오.”
장기린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런 적은 드문데, 감정이 잘 정리되지가 않았다.
“진재자완(眞材自完).”
남궁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뜻을 되뇌었다.
“진정한 재능은 스스로 완성된다?”
“그렇소.”
장기린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을 더듬었다.
“나를 만들어 낸 교육관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오.”
“아주버님, 실례가 안 된다면 신수 계획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실 수 있을까요?”
장기린은 꽤나 오랜 침묵 끝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