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22화
제9장 연옥일서(煉獄一曙)(1)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부모의 이름도 모르는 고아였지만 자신이 동쪽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선 남들보다 더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교관은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너희는 행복하다. 세상에는 훨씬 더 불행한 아이들이 많다. 삶을 극복하고 싶다면 노력해라. 삶이 뒤처지는 것 같고, 힘들다면 그건 네가 더욱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재자완(眞材自完).
진정한 재능은 스스로 완성되는 법이다.
더 노력하고 더 완성시켜라.
능력을 증명하면 언젠가 국가의 부름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평생 밥을 굶지 않아도 된다.
명나라에 감사하라.
너희가 지금 안전하게 먹고 살 수 있는 건 나라가 있는 덕분이다.
교관은 그밖에도 많은 말들을 했지만 당시의 소년은 그런 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만은 명확히 이해했다.
같은 곳에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이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다.
그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는 컸다.
진지한 마음으로 매사에 임하는 아이들은 금세 좋은 결과를 보이고 위쪽으로 치고 올라갔다.
반면에 한번 밀려난 아이들은 대부분 다시는 올라오지 못했다.
도태된 아이들은 삶의 기력을 잃어 갔고 아무 말도,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은 채 죽은 나무처럼 말라붙어 갔다.
교관은 그런 아이들이 죽기 전에 데리고 사라졌다. 새로운 아이는 매달 보충되었다.
소년의 나이가 열 살이 넘어갈 때부터 경쟁은 최고조로 격해졌다.
이곳에 들어온 지 오래된 아이들부터 이성을 잃어 갔다.
한곳에 갇혀 경쟁을 강요받다 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싸움은 일상이었고, 이젠 피를 보는 걸 넘어서 죽는 아이들도 나왔다.
‘월(月)’이라는 아이를 만난 건 바로 그 시절이었다.
***
“그만해, 충분하잖아?”
소년은 자신의 손목을 붙잡는 녀석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얼굴이 하얗고 갸름한 아이였다.
몸과 팔도 가늘어서 아무리 봐도 싸움을 잘할 체형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막았다.
주변의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악하는 것만 봐도, 이 모습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지를 알 수 있다.
“너, 새로 들어온 애였나?”
“맞아. 새로 들어왔어.”
“이 녀석과 아는 사이냐?”
“아니.”
소년은 단단한 자신의 주먹과, 밑에 깔린 채 얼굴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아이를 무심히 바라보고 다시 얼굴이 하얀 아이를 쳐다봤다.
얼굴이 하얀 아이는 당당하고 선한 눈빛으로 소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애가 누군지 모르지만,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건 알아.”
소년은 불쾌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 녀석이 뭘 했는지 알아?”
“몰라.”
“그런데 왜 막는다는 거야?”
얼굴이 하얀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돼.”
“이 녀석은 사람이 아냐.”
“그래도 안 돼.”
“왜지?”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소년은 잠시 미간을 좁히고 생각하다가 붙잡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도끼처럼 내리쳤다.
‘퍽!’ 하고, 밑에 깔린 아이의 입에서 누런 이빨 몇 개가 튀어 나갔다.
섬뜩한 비명이 지하실 내부를 쩌렁쩌렁하게 흔들었다.
“이 녀석은, 가장 약한 아이의 음식을 뺏어 먹었어. 걔가 그걸 못 먹으면 못 버틴다는 걸 알면서도. 그건 여기서 가장 악질인 짓이다.”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얼굴이 하얀 아이는 안타까운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 그 눈빛이 자꾸만 마음에 거슬렸다.
“날 위해서? 개소리하지 마.”
소년은 짐승처럼 이를 드러냈다.
“여기서 남을 위해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소년이 주변을 둘러보자 그 어떤 아이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소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터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소년이 사라지고, 얼굴이 하얀 아이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지하실엔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한참 동안 울려 퍼졌다.
***
얼굴이 하얀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월(月)이라고 소개한 뒤 소년의 뒤를 계속 쫓아왔다.
소년은 할 수 있는 위협을 다해 보았지만 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의외로 성격에 강단이 있다.
나중엔 소년이 먼저 지쳐 버렸다.
“도대체 왜 내 옆에 붙어 있으려는 거야?”
“그게 내가 여기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거든.”
월은 뻔뻔해 보일 만큼 당당했다.
“내 특권 이래 봤자 음식을 먼저 집을 수 있는 것뿐이다. 왜 붙어 있겠다는 거야? 음식 때문에? 아니면 싸움을 피하려고?”
“둘 다야.”
“네가 필요한 건 알겠어. 그런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언젠가 넌 내가 필요해질 거야. 약속할게.”
소년은 이해할 수 없었다. 비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왜인지 내치기는 싫었다.
“맘대로 해.”
소년은 결국 포기했고, 그와 월의 관계는 그 뒤로 삼 년 간 지속되었다.
***
“양 노사. 이제 포기해야 합니다. 황태자 주표가 죽고 건문제가 즉위하면서 모든 계획이 취소되었어요. 금전 지원도 끊겼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우린 없는 사람 취급될 겁니다. 어서 이 계획을 폐기하고 우리 살길을 도모해야 한다고요. 제발 부탁입니다. 이제 끝냅시다. 지금이 손을 뗄 적기란 말입니다.”
신수(神獸) 계획의 책임자인 양선후는 간평이 아무리 간절히 부탁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술독이 오른 것처럼 코가 붉고 머리가 벗겨진 칠십 대의 노인.
양선후의 집착과 장인 정신은 광기(狂氣)에 가까웠다.
“클클. 겁쟁이 간평아.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냐. 이건 성공해. 분명히 성공한다고.”
“양 노사는 그렇게 말하지만……. 윗사람들은 그걸 안 믿어요. 잘 아시잖습니까. 그들에겐 결과만이 중요합니다.”
양선후는 코웃음 쳤다.
“멍청한 것들이야. 나라를 세 번 세우는 것보다 이게 더 큰 가치를 갖고 있는데. 애초에 지들 저택 지을 돈은 있으면서 기술을 연구할 돈은 왜 없다는 거냐. 썩어 빠진 멍청한 것들.”
언제나와 같이 불평을 토해 내는 노인을 향해 간평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글쎄, 저 사람들은 그걸 모른단 말입니다. 애초에 왜 이미 성공한 백택을 계속 만들지 않는 것인지 거기서부터 불안해한다고요.”
“백택은 실패작이야!”
양선후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상단전을 다 열고 뇌를 심부(深部)까지 다 활성화시키면 무얼 하나! 신수(神獸)를 만들면 뭐해! 아무리 강해도 우리가 통제할 수 없으면 그건 실패작이야! 그 망할 은혜도 모르는 놈이 자유를 얻자마자 한 일이 뭐였는지 벌써 잊었어?”
간평은 씁쓸한 목소리로 답했다.
“연구 시설과 관계자들을 다 몰살시켰지요.”
“그래! 우린 살아남은 것만 해도 기적이란 말이야! 그걸 몰라 윗놈들이! 지금 백택을 진정시킨 건 연왕 주체가 뛰어난 덕분이지 우리의 성공이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그 짓을 한번 더 하자고?”
양선후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자살이지, 자살이야. 애초에 그만큼 신기(神氣) 있는 재목을 찾는다는 보장도 없고.”
“그래서 더 불안해하는 겁니다. 애초에 확실히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에 비해 위험성은 너무 크잖습니까?”
“성공만 하면 다 해결된다니까!”
양선후는 자신의 이론을 빼곡히 적어 놓은 서찰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사람은 신분의 귀천과 상관없이 딱 두 개를 공통적으로 갖고 태어나. 첫째 지성. 둘째 육체. 백택 때는 너무 지성에 치우쳤다. 그러니 강한 힘을 몸이 버텨 내지 못해서 균형이 깨진 거야. 원인을 알았으면 고치면 되지. 이번엔 정기신(精氣身)을 조화시켜 완성할 거야. 이미 잘되고 있어. 재능 있는 녀석도 찾았다고. 이건 분명히 성공해!”
양선후는 자신의 일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해서 설득이 불가능했다.
간평은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해 강하게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금전 지원이 끊겼습니다. 이 계획은 여기서 끝이에요. 이젠 재능 있는 아이도 더는 못 데려와요.”
“……어떻게도 안 돼?”
“안 됩니다.”
“거부(巨富)한테 투자를 받는다든가. 어디 상회에서 좀 빌린다든가.”
“신수 계획은 국가의 기밀입니다. 역적으로 몰려서 다 같이 줄초상 치르는 꼴 보고 싶으십니까?”
“계획만 성공한다면. 상관없어.”
“노사!”
간평은 잠시 숨을 가다듬으며 애써 감정을 절제했다.
“노사의 열정은 잘 압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어요. 믿어 주세요. 저는 정말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끄응.”
양선후는 다행히 간평의 진실성만큼은 믿는 사람이었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인가…….”
“예?”
양선후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쯧, 이건 하기 싫었는데. 할 수 없지.”
그때 그의 눈빛이 너무나 차가워서, 간평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간평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장인의 천재성과 광기는 종이 한 장 차이이거늘.
이때의 그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무공이 뭐라고 생각하냐?”
월은 소년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한 기술이라고 들었어.”
“그런 말도 있지.”
“아냐?”
“교관은 우리가 여기서 배우는 건 무공이 아니라더라. 생존능력과 생명력을 기르는 거라더군. 우린 무공을 배울 필요가 없대.”
소년은 찢은 옷자락을 주먹에 감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지난 삼 년 간 두 사람은 많이 친해져 있었다. 많은 싸움과 고난을 겪었고, 그때마다 위기를 넘기며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소년은 지하실 안에서 ‘왕(王)’이었다.
다만 군림하거나 통치하지 않고, 그저 혼자 조용히 지내는 왕이다.
지하실은 십 자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한쪽 방향은 전부 소년의 구역이었다.
그 어떤 아이도 그 소년 왕의 구역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월만을 제외하고.
“우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소년은 월을 잠시 힐끗 바라본 뒤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곳을 나가면 명나라를 위해 싸우겠지.”
“넌 그러고 싶어?”
소년은 월의 질문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듯 보였다.
“당연한 것 아닌가? 밖에 비하면 우린 행복하고. 잘만 풀리면 평생 먹고 살 걱정 없는 군인이 될 수 있을 텐데?”
“……그런가?”
지하실의 생활은 단순했다.
아침에는 기본적인 문자와 학문을 익혔다.
더불어 체력을 단련하는 훈련과 무기를 다루는 기술을 두 시진씩 익힌다.
식사는 한번만 주어졌다.
그래도 워낙 배가 고프니 지하실에 있는 이끼나 도마뱀도 잡아먹는다.
그 외엔 뭘 하든 자유였는데, 아무것도 할 게 없어서 보통 잠이 든다.
“넌 군인이 되면 뭘 가장 하고 싶어?”
“글쎄다.”
소년은 잠시 고민하다가 목을 조금 움츠리며 답했다.
“달빛을 받으며 실컷 뛰어다니고 싶다.”
“왜 하필 달빛이야?”
“햇빛은 너무 밝아.”
앞뒤가 안 맞는 말 같지만, 월은 왠지 소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하실에 갇혀 사는 동안 햇볕은 너무 먼 존재가 되어 버렸다.
“우리의 행복은…….”
월이 뭔가 말하려 할 때 지하실 중앙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집합 신호였다.
“너희 모두 잘 해 주었다. 철이 들기 전부터 있었던 녀석도 있고, 뒤늦게 합류한 녀석도 있지. 어느 쪽이건 오늘까지 버텨 낸 건 칭찬받아 마땅하다. 대단하다! 너희는 내 자랑이다!”
코가 빨갛고 나이가 많은 늙은 교관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소리쳤다.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왜 저래?”
“죽을 때가 된 건가?”
“안 하던 짓을 하는데?”
어두운 얼굴의 아이들이 독설을 내뱉어도 교관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이해를 못하는군. 너희가 고생하는 건 오늘이 끝이란 말이다. 오늘이 지날 때까지만 남으면……. 너흰 여기서 나갈 수 있다.”
아이들의 얼굴이 변했다.
끝이라니.
그동안 지겹게 이어지던 이 감옥 생활이 끝난다니 믿기지 않았다.
아이들은 환희를 감추지 못했다.
“정말로……?”
“……이제 끝인 건가?”
교관은 품 안에서 향을 열 개 꺼내 화섭자로 불을 붙여 바닥에 꽂았다. 금세 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이들은 약간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 이 말을 깜빡했군. 지금 여기 있는 게 서른 명이지? 사실은 말이다. 나갈 수 있는 자리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러니까…….”
교관 양선후의 입가에 돌연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서로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