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49화 (178/686)

2권 24화

제9장 연옥일서(煉獄一曙)(3)

소년은 딱딱하게 부어오른 이마를 붙잡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난장판,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서로 싸워 대는 아이들 틈에서 괴성에 비명, 핏물이 낭자했다.

“크아아!”

그때 도마뱀 같은 아이가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바위를 두부처럼 뚫어 버리는 ‘용조수(龍爪手)’가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닥쳐.”

소년은 놈의 턱을 강하게 걷어찬 뒤 목 뒤를 한 발로 눌렀다. 버둥거리는 진동이 불쾌했다.

제정신일 때도 못된 녀석이었다. 그 아이의 옆구리를 무릎으로 찍으니 잠잠해졌다.

‘왜 다들 싸우고 있는 거지?’

지하실의 아이들은 물론이고, 얼굴이 익숙한 교관들까지도 모두 한데 뒤엉켜 마치 개처럼 싸우고 있었다.

충격적인 상황이다.

소년은 소리쳐 보았다.

“멈춰! 멈추라고!”

소리를 질러도 아무 소용없었다.

오히려 소리를 지른 탓에 눈에 띄었는지 근처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아!”

푸확!

가장 눈에 띄는 건 검술 교관이다.

그는 새빨간 칼을 손에 쥔 채 놀라운 검술로 아이들을 공격했다.

광기로 강해진 아이들이었지만 검술 교관에겐 상대가 안 되었다. 아이들이 달려드는 족족 검술 교관의 칼에 심장이 꿰뚫린 채 바닥에 널브러진다.

“크르륵.”

기분 탓일까?

검술 교관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면서 점점 더 강해지는 듯했다.

“말해 봤자 소용없어. 못 들을 거야. 다들 뭔가에 미쳐 있는 것 같아.”

월은 소년의 뒤쪽에서 어두운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차가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더니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저 연기가 가장 수상해. 저기에 있는 향, 보여?”

“……향?”

소년은 바닥에서 뭉클뭉클 피어나는 연기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 사태가 벌어질 때쯤의 기억이 애매했다.

뿌연 연기.

몽롱한 목소리.

그리고 양선후가 기억에 떠오른다.

“맞다. 그 늙은이!”

“흥분하지 마. 숨을 조절해. 숨이 가쁘면 나눠서 조금씩 들이켜, 그리고 저 칼은 되도록 쳐다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묘한 기운이 있어.”

소년은 월의 조언에 따라 숨을 조금씩 들이키며 덤벼 오는 공격들을 피해 냈다.

월은 어두운 구석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싸움엔 재능이 없는 녀석이다.

실제로 지난 삼 년 간 함께 운동했음에도 키만 컸지 근육은 거의 안 생겼다.

‘언젠가 도움이 될 거라더니, 진짜네.’

모두가 미쳐 있는 이 상황에서 소년에게, 제정신으로 냉철히 조언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큰 도움이었다.

소년에게 덤벼 온 건 일곱 명의 아이들이었다.

덤벼드는 아이들은 제정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배운 기술들을 모두 정확히 사용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발동작, 어깨선, 허리의 중심축. 모조리 그동안 배운 무술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크아아아!”

쾅!

발경(發勁)이 실린 정권이 소년의 몸을 스치고 옆의 벽면에 거미줄처럼 금을 새겼다.

소년은 추가로 날아오는 정권 지르기를 손바닥으로 콱 움켜쥐어 막았다.

“힘이 세졌구나, 너.”

또다시 소년은 오른쪽 팔을 있는 힘껏 당기며 왼쪽 손바닥으로 팔꿈치를 올려 쳤다.

“크아아악!”

‘퍽’ 소리와 함께 팔이 거꾸로 꺾인다. 어깨가 빠져 버린 건 덤이다.

소년은 눈빛을 활활 불태우며 호전적으로 씩 웃었다.

“이제야 싸울 만하네.”

잔뜩 흥분한 소년과 광기에 미쳐 버린 아이들.

그때부터 제정신이 아닌 싸움이 시작되었다.

달려드는 아이들의 공격을 피하고, 꺾고, 걷어차고 때리고.

무기가 날아오고, 머리를 붙잡아 벽에 처박는다.

지하실에서 고도로 훈련받은 아이들은 이미 보통의 열세 살짜리 아이들 수준이 아니었다.

숙련된 전문가들의 전투가 벌어졌다.

상대의 움직임을 눈썹 하나까지 다 파악하지 못하면 이뤄질 수 없는 동작들이 반복되었다.

힘의 차이가 있으면 봐줘야 한다?

소년은 그 정도까지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다. 게다가 고작 열세 살이다.

전혀 절제가 안 되는 게 당연했다.

소년은 솔직히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적과 나 자신조차 잊을 만큼 싸움에 극도로 몰입했다.

“허억. 허억.”

소년은 숨을 몰아쉬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근처에 서 있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소년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검술 교관이 남았는가?

아니었다.

검술 교관은 우르르 달려든 아이들의 손에 피투성이가 된 채 붉은색 칼을 빼앗기고, 도리어 그 칼에 심장이 꿰뚫렸다.

이제 남은 건 아이들인데 아이들 사이의 투쟁은 금방 끝났다.

한 아이가 두각을 나타내 모두를 죽여 버린 것이다.

마치 짐승을 보는 것 같았다.

놀라운 신체 능력으로 펄쩍펄쩍 뛰어다니더니, 맹수가 사슴의 목덜미를 물어뜯듯 붉은색 칼로 아이들의 숨통을 정확히 끊어 버렸다.

소년과 월은 그 모습을 놀라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그 아이는 특이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단단한 체구에 사나운 눈매.

거기에 이빨이 반 이상 없어 입모양이 합죽했다.

“저 녀석…….”

“응.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쓰러졌던 애야.”

월의 설명에 기억이 더욱 선명해졌다.

자기보다 약한 아이의 것을 뺏는 데 주저함이 없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분명 소년이 이빨을 박살 내서 응징했었다.

“후우. 후우.”

이젠 그 아이와 소년, 그리고 월. 세 사람만이 남은 상황이다.

이빨이 없는 아이가 말했다.

“하나뿐인…… 후우, ……자리는 후우, 내 거야……. 아무에게도 못…… 줘!”

소년은 솔직히 놀랐다.

모두가 광기에 휩싸여 짐승이 된 상황에서 처음으로 이성이 남아 있는 아이를 본 것이다.

“너, 생각할 수 있나? 그럼 당장 그만둬. 그 늙은이가 우릴 속인 게 분명해.”

“속여……?”

“그래. 이런 짓 한다고 해서 우리가 얻는 건 아무것도 없어.”

“흐흣.”

이빨이 없는 아이가 비웃었다.

“모르는 건…… 후우, 너다…… 후우.”

“뭐?”

“얻는 것…… 있다.”

저벅. 저벅.

이빨이 없는 아이가 다가오다가 갑자기 옆에 쓰러져 있는 한 아이의 등에 칼을 꽂았다.

“무슨 짓이야!”

소년이 기절만 시킨 아이였는데 방금 전의 일격으로 목숨이 날아갔다.

우웅.

착각일까?

칼날의 문양이 짙어졌다.

“나는…… 후우, 점점…… 후우, 강해진다…….”

충혈된 두 눈이 번뜩인다.

“온다!”

월의 경호성이 들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이빨이 없는 아이가 달려들었다.

펄쩍펄쩍 뛰는 듯한 가벼운 동작인데 몸놀림은 맹수처럼 재빠르다.

소년은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그 순간 ‘퍽’ 하고 뒤쪽에 쓰러져 있던 다른 아이들의 몸에 칼이 꽂혔다.

우웅.

다시 한번 칼이 진동했다. 붉은 문양은 더욱 짙어졌다.

“흐흐흐.”

이빨이 없는 아이가 섬뜩하게 웃는다.

어느새 이두박근과 상완근이 커다랗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시퍼런 힘줄이 손끝에서부터 어깨까지 불룩하게 돋아났다.

“피하면…… 후우, 얘들이 죽는다?”

어눌한 발음이 점점 또렷해졌다.

소년은 저 칼이 모든 것의 원흉임을 직감했다.

“막아야 해.”

“안 돼! 위험해! 피하면서 틈을 노려야 해.”

월이 소년과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피하면 또 다른 애들이 죽을 거야.”

“……어차피 쟤를 못 막으면 다 죽어.”

“너답지 않네. 목숨은 함부로 뺏으면 안 된다고 했었잖아? 그럼 여기서 막아야지.”

소년은 월을 힐끗 쳐다보았다.

월이 어두워진 얼굴로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응, 그랬지. 그랬었어.”

“너랑 내가 바뀐 것 같네. 여기선 막아야 해. 게다가 죽이면 죽일수록 더 강해지는 것 같고.”

“알았어. 조심해.”

“맡겨 둬.”

소년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이젠 공격을 피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이빨이 없는 아이는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노려보다가 덤벼 왔다.

펄쩍 뛰어올라 덮치는 공격.

소년은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자세를 한껏 낮췄다가, 몸을 튕겨 내며 왼손을 쭉 뻗었다.

용의 수염(龍髥)자세라고 배웠던 창술의 일종이다.

목덜미를 노려 한번에 숨통을 끊는 호전적인 기술.

역수(逆手)로 잡고 내리찍는 칼과, 목을 노리는 손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소년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몸을 살짝 비틀었다.

‘픽’ 하고, 칼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화끈한 통증이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소년은 상대방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소년과 이빨이 없는 아이는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잡았나?’

소년이 승리를 예감한 순간, 상대방의 목 근육이 확 부풀더니 뒤로 물러나면서 하체가 앞으로 나왔다.

근육의 탄력이 엄청났다. 가슴팍을 걷어차는 왼발에서 바람소리가 났다.

‘피하고.’

소년은 오른발을 왼발의 왼쪽으로 붙이며 빙글 회전했다.

강렬한 파공음이 소년의 오른쪽 귀를 스쳐 지나갔다.

힘차게 오른발 진각.

몸을 낮추며 오른쪽 팔꿈치를 함께 뻗어 명치 부근에 내문정주(裡門頂肘)의 일격을 내지른다.

‘속이고.’

완벽하게 공격이 들어갔지만 상대방은 손바닥으로 팔꿈치를 막아 냈다. 관절을 움켜쥐는 악력이 엄청나다.

재빨리 팔을 빼며 왼발을 내딛는다.

쿵.

왼주먹 발경(發勁)과 오른손 장저(掌底)를 동시에 내뻗는다.

한 발은 발차기를, 한 손은 명치를 방어한 불안정한 자세로 상대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동작과 각도였다.

장기로 치면 외통수.

헌데 이빨이 없는 아이는 소년의 상상을 초월했다.

퍼퍽!

“!”

소년의 공격을 그대로 맞고선 오히려 다시 한번 발차기를 날린 것이다.

“컥.”

소년의 몸은 허공으로 떠올라 삼 장이나 되는 거리를 날아 벽면에 처박혔다.

‘쾅’ 하고, 소년의 정신이 아득해졌다가 새카만 어둠과 흐릿한 빛이 눈앞에서 깜빡깜빡 점멸했다.

‘엄청나구만. 갈비뼈가 부러졌나?’

소년은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 냈다.

타격을 받은 것은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회복력이 달랐다.

“케헥! 켁!”

몇 번이나 기침을 하면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잠시 주저앉더니, 이내 몸을 꼿꼿이 세우고 다시 멀쩡하게 일어났다.

“안 돼!”

월이 비명을 지르며 어둠 속에서 달려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안 되는 건 너야, 월.’

소년은 이를 악물고 다시 몸을 움직였다.

벌떡 일어서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흐흐흐.”

그사이, 이빨이 없는 아이가 피식피식 웃으면서 기절한 아이들의 몸에 칼을 꽂고 있었다.

월이 말리려고 달려들다가 가벼운 몸동작에 뒤로 튕겨 나갔다.

퍽. 퍽. 퍽.

일정한 속도로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빨이 없는 아이에 의해 아이들 가슴에 칼이 꽂히는 소리다.

“으아악!”

월의 비명이 들렸다.

소년은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이 어두웠다.

애써 눈을 떠 보니 월이 쓰러져 있었다.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질질 끄는 듯한 발소리와 함께 이빨이 없는 아이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네가 마지막이다.”

“큭, 너 이 자식……!”

목을 턱 하니 붙잡힌 채 새빨간 칼날이 가슴에 닿았다. 그러나 살갗을 파고들진 않았다.

“아니, 아니지. 네가 내 이빨을 다 뭉갰었지?”

이빨이 없는 괴물이 섬뜩하게 웃는다.

그는 손을 뻗어 소년의 몸에서 뭔가를 뜯어 냈다.

“으아아악!”

소년은 비명을 질렀다.

오른쪽 턱 선을 타고 핏물이 흘러내린다. 한쪽 귀에선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가 났다.

“흐흐, 내가 이긴 거다. 혼자서 중얼거리기나 하고. 미친놈. 지하실의 왕? 하! 애들이 널 무서워한 줄 알아? 하도 이상해서 놔둔 거다. 머리가 어떻게 된 놈이라고.”

소년은 비웃음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귀가 찢겨 나간 고통이 너무 컸고, ……그리고 방금 들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이상했다.

“……혼자 중얼거려?”

“아까부터 계속 중얼거리던데. 대체 네놈은 누구랑 이야기하는 거냐. 귀신이라도 보는 거냐?”

소년은 시선을 돌렸다.

이빨이 없는 괴물 너머. 삼 년 간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월이 있는 곳으로.

‘뭐야, 있잖아.’

소년은 안심했다. 월이 쓰러져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건 이 녀석이다. 그게 당연했다.

“그게 아냐.”

소년은 움찔 몸을 떨며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괴물의 바로 옆에서 월이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말 그대로 숨을 쉬면 괴물에게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였다.

괴물은 반응하지 않는다.

월이 없는 사람처럼 인식조차 못 한다.

월은 새하얀 얼굴, 단정한 이목구비를 가진 깨끗한 모습으로 존재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어린 모습 그대로였다.

다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없다.

쓰러져 있던 월이 없다.

“이젠 때가 되었어. 넌 충분히 성장했으니까.”

소년은 멍하니 굳어졌다.

심장이 멎어 버린 것 같았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칼날을 잡아.”

소년은 월이 시키는 대로 새빨간 칼날을 붙잡았다.

괴물이 깜짝 놀란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다시 뛴다.

온몸이 전율하고,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핏속으로 스며들어 전신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제물은 충분해. 끝을 내.”

월이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넌 신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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