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25화
제9장 연옥일서(煉獄一曙)(4)
“몇 가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습니다.”
간평은 진정하지 못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몇 번이나 스스로 붙잡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마지막에 살아남는다고 해도 말이죠. 그 녀석이 모두를 합친 것 만큼 강한 건 아니잖습니까? 그저 잔인해질 뿐 아닙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모두를 남겨 두고 다 같이 강하게 만드는 게 어떨지……?”
“일반적으로 그렇긴 하지.”
양선후는 의외로 순순히 수긍했다.
“평균적인 능력을 일(一)로 잡을 때, 최후에 살아남는 놈은 아마 이(二)나 삼(三). 많아야 오(五)정도 될까. 그렇다면 일짜리 서른 명이 남아 있는 게 이득이다, 이 말이지?”
“제 말이 그겁니다. 왜 이런 불합리한 짓을……?”
“흐흐, 근데 그건 말이야. ‘집혼기(集魂器)’가 없을 때의 이야기야.”
“예?”
양선후는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는 간평의 모습이 재밌다는 듯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대의 비술이 담긴 무구(巫具)지. 보통 손바닥만 한 칼의 형태를 하고 있어. 이게 황실 무덤에서 도굴된 건데, 이 칼에 찔리면 산 제물의 생명과 영혼을 빨아들이지. 과연 귀물이야.”
“생명을 빨아들인다? 신기합니다만……. 그게 있으면 무엇이 달라지는 겁니까?”
“달라지지. 죽이면 죽일수록 그만큼 힘이 되니까.”
양선후는 즐거운 듯이 킥킥 웃으며 말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잖나?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 열 명을 죽이면 귀신. 만 명을 죽이면 영웅. 딱 그 말대로야. 집혼기가 있다면 일 더하기 일은 이(二)로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한마디로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의 힘을 하나로 합칠 수 있다는 거지.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엄선된 최고의 인재 서른 명을 하나로 합치게 되면 뭐가 튀어나올 것 같아?”
간평은 마침내 양선후의 진정한 뜻을 깨닫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덩어리’에 약간의 방향성을 부여하는 것뿐이야.”
간평이 혼란스러워 하는 동안 양선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춘절 선물을 기대하는 어린아이처럼 들떠서 발을 동동 굴렀다.
“말이 길었군. 흐흐, 시간이 되었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쾅’ 하고 폭발하듯 문이 열렸다.
연옥 안쪽에선 두 사람이 한데 엉켜 구르듯이 튀어나왔다.
둘 다 피투성이가 되어 있어서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간평은 둘 중, 한쪽의 덩치가 비정상적으로 크다는 것만은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교관인가? 아니군. 모르는 얼굴이야. 저렇게 큰 애가 있었나?’
의아해 하는 것도 잠시.
덩치가 큰 쪽이 바닥에 깔리고, 손바닥만 한 단검에 ‘퍽’ 하고 가슴이 관통당했다.
그 모든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커허……!”
덩치가 큰 쪽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새빨간 칼날이 위험하게 빛났다.
“큭?”
소년이 위에서 몸을 덜덜 떨었다.
탄탄한 체구에 눈매가 사납다.
한쪽 귀는 잘려 나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턱 선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소년은 칼날을 쥔 오른손을 왼손으로 붙잡고 몸을 비틀었다.
칼에서 손을 떼려는 듯한 모습인데 잘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우웅.
칼날이 떨린다.
소년은 혼란스러워 하더니. 아무것도 없는 오른쪽을 보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고 납득한 듯 일어섰다.
“후우. 후우.”
소년이 숨을 몰아쉰다. 몹시 혼란스럽고 괴로워 보였다.
소년은 이마를 붙잡고 비틀거리더니 이내 중심을 잡고 앞을 노려보았다. 소년은 정확히 양선후를 노려보았다.
눈빛이 번뜩인다. 강렬한 살기가 안개처럼 퍼져 나왔다.
“아아……?”
간평은 화들짝 놀라며 부들부들 떨었다.
과연 엄청난 살기였다.
소년이 그저 바라봤을 뿐인데 양선후의 정신은 아득해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흐흐흐흐, 후화하하핫!”
반면에 양선후는 파안대소(破顔大笑). 그는 환희를 감추지 못하며 외쳤다.
“성공했다! 이 몸이 성공한 것이야!”
소년은 양선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누가 봐도 명백히 적의를 갖고 있었다.
간평은 숨도 쉬지 못한 채 집중해서 지켜보다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노, 노사. 괜찮은 겁니까?”
“응? 뭐가? 아 우리가? 흐흐, 당연하지. 겁쟁이 간평. 우린 아직 할 일이 많다.”
양선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닥에서 긴 쇠사슬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촤르르륵.
소년은 펄쩍 뛰어올라 쇠사슬을 피하려 했는데, 그 순간 벽과 천장에서도 철추가 끝에 달린 쇠사슬이 튀어나왔다.
쇠사슬의 특징은, 휘말려서 감길수록 더욱 강한 힘으로 조인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소년의 몸과 팔다리가 쇠사슬로 칭칭 감겼다.
“크으으윽!”
소년은 눈을 부릅뜨고 힘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한쪽 팔을 당기는 순간, 쇠사슬 하나가 허공에서 끊어졌다.
“허어, 힘이 대단하구만.”
양선후는 여전히 여유만만이다.
쇠사슬이 끊어지는 순간, 벽면에서는 또 다른 쇠사슬이 하나 튀어나왔다. 그것은 곧 소년의 몸을 휘감았다.
“기관 장치……입니까?”
“천금을 들였지. 황실 제일의 기관 장인이 만들었어. 단 한 명만을 포박할 수 있는 기관이다.”
양선후는 허허 웃으며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소년은 버둥거리고 있었으나 쇠사슬에서 빠져나오진 못했다.
“역시 네가 되었군!”
“큭.”
소년은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양선후를 노려보았다.
“성적이 더 좋은 아이들도 있었지만 너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었지. 항상 기묘한 분위기가 흘렀어. 난 왠지 네가 살아남을 것 같다고 예상했었다.”
양선후는 품 안에서 긴 목함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는 십 촌이 넘는 길이의 장침(長針)을 꺼내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말해 봐. 신화가 된 인물과 그 신비가 깃든 땅. 이곳 시황제의 무덤에서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
“큭, 네놈 때문에……! 네놈 때문에 모두가……!”
소년은 쇠사슬에 묶이고, 공포스러운 장침이 눈앞에 있음에도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네가 본 ‘그것’도 평범한 것은 아닐 테지. 넌 그동안 무엇과 대화를 나누었냐?”
“이걸 풀어!”
“대답이 어렵나? 그럼 질문을 바꿔 보지. 칼을 잡아 보니 어땠느냐? 뛰어난 인재 백 명의 생명력을 빼앗아 네 몸에 넣으면 어떤 기분이지?”
줄곧 한결같았던 소년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백 명……?”
“그래 백 명. 지난 십 년 간 낙오한 인재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딱 일 백 명이다.”
소년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지난 십여 년 간, 지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안내 받았던 아이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걔들은 돌아갔잖아. 보내 준 것 아니었어?”
“신수 계획에 후퇴는 없다. 전진만이 있을 뿐.”
“이, 개자식!”
쇠사슬이 철컹거리며 소년을 붙잡는다.
단단한 흙벽에서 가루가 우수수 떨어졌으나 끝끝내 쇠사슬은 끊어지지 않았다.
“진정해라.”
양선후는 재빠르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긴 장침을 소년의 정수리, 백회혈에 찔러 넣었다.
“으아아아악!”
“움직이지 마라. 병신 된다.”
“이거 놔아아아아!”
격렬한 감정의 폭발.
오른손에 쥐고 있던 칼날이 붉게 빛났다. 이내 칼날 주변을 묶고 있던 쇠사슬 몇 개가 터져 나갔다.
“양 노사!”
간평이 다급하게 외쳤다.
붉은색 칼날이 양선후의 옆구리로 향한다.
양선후는 그 상태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소년의 머리에 장침을 몇 개 더 박아 넣었다.
“으아아아아아!”
찰나의 순간 승부는 갈렸다. 소년의 눈에서 초점이 서서히 사라진다.
소년이 내뻗은 칼날은, 양선후의 허리에 생채기를 조금 남기는 것이 다였다. 소년의 팔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양선후는 낄낄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너는 그동안 무엇을 보았지?”
“친구…….”
“또래의 아이였나?”
“월……. 나와 반대의 ……아이.”
소년은 멍하니 대답했다.
조금 전의 그 아이와 동일한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유순한 대답이다.
“그랬나. 그 아이가 연옥일서(煉獄一曙). 어둠 속에서 떨어진 한 줄기 빛이었던 거군.”
건평은 숨죽인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소년은 양선후의 질문에 모두 대답했고, 양선후가 궁금해 하던 지식을 모두 충족시켜 주었다.
“과연. 흐흐, 네가 무엇인지 알 것 같구나.”
소년은 초점 없는 눈으로 양선후의 말을 듣고 있었다.
“백택이 조언자였다면, 너는 진정한 무력(武力)이다. 두 번째지만 첫 번째. 고대부터 내려오는 오행사상(五行思想)에서 동서남북의 중앙이며. 사후세계의 수호자.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덕의 화신. 삼백육십종 모든 짐승들의 왕. 천년의 세월을 살고, 너를 보면 길조, 너의 시체를 보면 흉조다. 모든 신수들 중에 유일하게 제 짝이 있어 한 쌍이 하나가 되는 자.”
양선후는 신처럼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선언했다.
“너는 기린(麒麟)이다. 앞으로 명제국의 국운을 좌우할 길조(吉兆)이자 흉조(凶兆)가 되리라.”
***
“그래……서요?”
남궁연은 분노와 경악, 그리고 복수심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그걸로 끝난 건 아니죠? 그 미친 늙은이를 가만 두지 않았죠? 그렇죠? 예?”
남궁연은 장기린 본인보다 더 분노하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하면 지금 당장 모든 남궁세가의 병력을 출동시켜 잡아 죽일 기세였다.
가족으로서 공감하고 분노해 주니 고맙긴 한데, 지금의 장기린으로서는 난감할 따름이다.
“그는…… 죽었소. 천벌이랄까. 주독(酒毒)이 쌓여 몸이 피폐해진 탓에 실수를 했고, 그 때문에 그토록 충성했던 황실에 의해 처형당했지.”
“아주버님이 복수한 건 아니군요?”
“안타깝지만 아니오. 침술(鍼術)과 세뇌가 강력해서 나는 그에게 손을 댈 수가 없었으니. 대신 영락제 폐하께서 복수를 해 주셨소.”
남궁연은 불편한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찝찝하네요. 아주버님의 손으로 갚았어야 하는데. 그 늙은이는 좀 더 처참한 대가를 치렀어야 했어요. 세상에. 그 어린애들을 데려다가!”
“그 부분은 충분하오. 처참한 최후였다고 들었소. 괜찮소, 이미 내 한은 풀렸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남궁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장기린을 바라봤다.
“세뇌는…… 이제 어떤가요?”
“시험해 볼 기회가 없었기에 확인할 방법이 없었소.”
“지금껏 문제는 없었나요?”
“전혀.”
장기린은 확고하게 대답했다.
남궁연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장기린을 잠시 응시하다가 다시 원래의 주제로 되돌아갔다.
“좋아요. 그럼 관계자는 다 죽었다는 뜻이네요. 교관들도 모두 죽고, 양선후라는 늙은이는 처형당했고. 신수 계획은 사장된 거나 다름없군요. 그런데 아주버님께선 뭘 걱정하시는 거죠?”
“딱 하나…… 깨끗이 마무리되지 못한 게 있소. 그래서 휴의 말에 걱정하고 있는 것이오.”
장기린은 자신의 왼쪽 가슴. 심장의 아래쪽에 있는 커다란 흉터를 쓰다듬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이름이…… 건평, 건평이었을 거요.”
“네?”
“그 당시 양선후의 부관 역할을 한 건평이란 자가 아직 살아 있소.”
***
“우와아아아.”
소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아이였다.
무산학관 서쪽에 위치한 기숙사는 드넓은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시야의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펼쳐진 넓은 땅에 이층짜리 전각이 올라가 있고, 그 주변을 성인 남성의 목 높이 정도까지 되는 나지막한 담벼락이 둘러싸고 있었다.
연무장은 대리석은 아니지만 꽤나 튼튼한 돌로 만들어졌고, 자그마한 호수엔 햇빛을 막아 주는 정자(亭子)도 하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커다란 소나무다.
무산학관의 역사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백 년은 족히 넘었을 이 커다란 소나무는, 무산학관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어, 그러니까…… 제법 크지?”
백호방 방장 봉천이 커다란 두 눈을 끔뻑거리며 자랑하듯 말했다.
“백호방이 다른 건 몰라도 기숙사는 정말 커. 한 사람당 방도 세 개씩 쓸 수 있어. 숙소 하나, 짐 두는 방 하나. 수련하는 연습실 하나. 이건 다른 기숙사에선 못 줘. 우, 우리 백호방만 주는 거야.”
“사람이 적어서 방이 남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에요?”
자랑스러워 하는 봉천에게 뚱뚱한 소녀, 마희희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건, 그래…….”
봉천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뻐드렁니 소년, 윤지관이 마희희의 팔을 찔렀다.
“아, 왜!”
“야, 넌 왜 눈치가 없냐.”
“내가 뭐!”
윤지관과 마희희가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티격태격 했다.
한편 소호는 반짝이는 눈으로 커다란 기숙사를 바라봤다.
“세 개! 최고다! 우리 집에서도 방은 하나밖에 못 썼는데!”
“그, 그렇지?”
돌연 봉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네가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어. 방이 많으면 좋아. 모으고 싶은 물건을 모으거나, 책을 잔뜩 갖다 둬도 되고.”
“히힛, 정말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어! 다 할 수 있어!”
소호의 두 눈이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지켜보던 섭주해와 대미미가 서로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자! 그, 그럼 이제 선배들을 소개해 줄게. 지금쯤 선배들 전용 연무장에 있을 거야. 항상 그러거든……. 기숙사 뒤쪽으로 가 보자.”
봉천은 먼저 걷기 시작했고, 모두가 그의 뒤를 따랐다.
“응?”
그때 소호가 멈춰 섰다.
소호가 멈추니 뒤를 따라가던 섭주해와 대미미도 멈춰 섰다.
조서인만이 멈춰선 소호를 봤지만, 잠시 갈등하다 봉천을 따라갔다. 다른 아이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소호 형?”
“오라버니?”
소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기이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소호는 뒷목의 솜털들이 곤두서고 가슴이 찝찝해지는 이 느낌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으음.”
소호는 잠시 갈등하다가 뒤돌았다.
“에이, 아무것도 아냐. 미안해. 얘들아, 가자.”
소호는 봉천을 쫓아갔다.
섭주해와 대미미도 의아해 하면서도 소호의 뒤를 쫓았다.
잠시 후, 백호방의 입구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청년이라기엔 아직 어리고 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성숙한 소년.
두 눈을 감은 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는 맹인 특유의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