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2화 (181/686)

3권 2화

제10장 풍운학관(風雲學官)(2)

“그 이름…….”

유준은 잠시 동안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무섭게 굳어진 그의 얼굴은 어딘가 고통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소호는 문득 자신이 괜한 걸 물어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물어본 건데. 의외로 심각한 일이었던 걸까?’

소호는 단지 추묵환에게 그의 제자를 만났다는 소식을 전하여 그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소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대답하기 곤란하면 안 해도 괜찮…….”

“아니! 아냐, 그냥 좀 놀라서 그랬어. 추묵환……이라는 분이 혹시, 네 할아버지시니?”

“흠……. 친할아버지는 아니에요. 하지만 가족이에요.”

“응? 그게 무슨 말이지?”

소호는 이해하지 못하는 유준을 보며 미소 띈 채 말을 이었다.

“제가 사는 은자촌에선, 같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가족이에요.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챙겨 주거든요.”

“……그래? 좋은 마을에 있었나 보구나.”

착각일까?

소호는 유준의 목소리가 살짝 차갑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럼 넌 추 씨는 아닌 거지?”

“네, 제 이름은 장소호예요.”

유준은 소호의 대답을 듣고 그제야 처음의 차분한 표정을 되찾았다.

“그랬구나. 추묵환 할아버지라……. 대답하기 전에 물어볼 게 있는데, 너…… 나에 대해 아는 게 있어?”

“으음, 그저 할아버지한테 유준이란 이름을 들었을 뿐이에요. 그게 언제였냐면…….”

소호는 추묵환에게 들었던 유준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간추려서 말해 주었다.

추묵환이 유준에게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는 아이라고 자신에게 자랑했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나중에 만나지 못하게 되었을 땐,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고 괴로워했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그랬구나.”

유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나는 예전 일들이 잘 기억이 안 나.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달까. 추묵환이란 이름은…… 굉장히 익숙한데 기억이 나질 않아. 그런데 너에게 그 이름을 들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어. 마치 그동안 기억했어야 하는 걸 잊고 살았던 것처럼.”

“그래요?”

소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

“어쩌다가 그런 일이 벌어졌어요?”

“이 자리에서 말할 이야기는 아니야.”

“그건, 그러네요.”

소호는 안타까운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는 새삼 신기하다는 듯한 얼굴로 유준을 응시했다.

“흐음…… 어쨌거나 이렇게 만난 게 되다니 신기하네요.”

“그러네. 정말 신기해.”

“할아버지를 한번 만나 보세요. 굉장히 반가워하실 거예요. 꼭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

“나도 만나 보고 싶어.”

“제가 대신 연락해 드릴까요?”

“으음, 아냐. 아직은.”

유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직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지만, 준비가 되면 꼭 만나도록 할게.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줘.”

“네, 얼마든지요.”

유준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응원하는 소호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이야기 해 줘서 고마워.”

“히힛. 아니에요.”

소호는 기뻐하면서 다시 선두의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한껏 기분 좋아 보이며 발걸음 또한 가벼웠다.

제자리에 우뚝 서 있던 유준은 천천히 눈을 뜨고 소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뿌옇게 백태가 낀 눈이지만 눈동자의 끝은 정확히 소호의 뒤를 쫓는다.

유준의 백안(白眼)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잠시 후, 유준이 눈을 감았다.

탁. 탁. 탁.

일정한 속도로 지팡이가 움직이며 유준을 기숙사로 인도했다.

***

“설지는 부끄럼이 많은 아이야.”

봉천은 그 점을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그렇지만 자기 생각은 확실하고, 똑똑해서 책 읽는 걸 좋아해. 속도 깊어서 남을 배려할 줄 알아. 얼핏 친해지기 어려워 보이지만…… 사실 좋은 아이야.”

봉천은 그 후로도 설지에 대해 칭찬을 계속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처음으로 보는 백호방의 기숙사 내부 전경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누가 들으면 친여동생인 줄 알겠네.”

마희희가 중얼거렸으나 봉천은 듣지 못했다.

백호방의 내부는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 너비의 복도를 조금 지나면 방 대여섯 개를 합쳐 놓은 크기의 거실이 있다.

단언컨대 백호방에 거주하는 모두가 모여도 공간이 남을 것처럼 큰 거실이다.

거실의 한쪽 벽면에는 ‘서(西)’라는 글자가 용사비등한 글씨체로 커다랗게 써져 있고, 좌측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양피지 두루마리가 잔뜩이었다.

우측에는 커다란 책장 안에 다양한 서책들이 정강하게 꽂혀 있었다.

“한비자에서 소림오권까지?”

섭주해가 책장 안에 꽂힌 서책들의 가치를 깨닫고 눈을 반짝이며 탄성을 내뱉었다.

봉천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 정도는…… 음, 기본서야. 무산학관에서 공부를 위한 서책은 아끼지 않고 지원해 주거든.”

“좋네요.”

“저기, 네가 섭주해? 지 시험장 합격자지?”

“네.”

봉천은 ‘역시나’라고 하는 듯한 표정으로 섭주해를 지그시 바라본 뒤, 옆에 있는 또 다른 지 시험장의 합격자 마희희와 윤지관을 잠시 바라보았다.

“저 두루마리들은 무공의 해설도(解說圖)야. 필요하면 언제든 와서 읽어. 음, 여긴 자유로운 공간이니까.”

봉천의 말에 반응한 것은 의외로 조서인이었다.

“어? 지 시험장?”

조서인이 눈이 튀어나올 듯 놀란 상태로 섭주해와 대미미를 번갈아 쳐다봤다.

중얼거리는 말 속에 경악이 묻어 나온다.

“그럼 용 시험장 출신이 저쪽……?”

마지막으로 대미미를 응시하며 입까지 쩍 벌렸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 이유를 깨닫지 못했다.

그사이에 소호가 도착했다.

뭔가 자랑스러운 일을 한 것 같은 개운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자, 그럼 다 왔지?”

봉천은 소호가 도착한 것을 확인한 뒤 책장 바로 옆에 있는 방문을 톡톡 두드렸다.

그제야 아이들은, 거실 책장 바로 옆에 한 사람의 방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다들 특이한 서책과 광장의 모습에 신경 쓰느라 기숙사 방의 모습은 뒷전이었던 것이다.

봉천은 창호지로 덧댄 나무문을 향해 말했다.

“설지야. 저기, 음, 신입생들이 왔어. 인사해.”

잠시 후 무표정한 얼굴의 소녀가 문을 열고 나왔다.

신입생 전원의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색목인(色目人)?”

마희희가 중얼거렸다.

이번엔 윤지관도 경솔하다고 말리지 않았다.

나이는 열셋 정도 되었을까?

워낙 키가 크고 성숙해 보여서 나이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소녀는 쏟아지는 시선이 익숙한 듯 무표정하고 무관심한 얼굴이었다.

색목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다는 백인(白人)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황금을 녹여 만든 듯한 금발머리, 청옥(靑玉)보다 더 영롱해 보이는 파란 눈은 색목인 자체를 처음 보는 아이들에겐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는 마성의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몸의 비율이다.

얼굴은 갸름했고, 팔다리는 길쭉길쭉하고 가늘었다.

그러면서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가서 몸 전체가 부드럽게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인사해, 얘들아. 음, 저기, 작년에 무산학관에 들어온 백설지야. 멀리 북쪽에서 왔고…… 너희보다는 일 년 선배야.”

봉천의 설명에 이어 백설지가 대답했다.

“안녕.”

짧은 한마디만 말한 뒤 그대로 침묵을 지켰다.

신입생들 사이에서도 침묵이 흐른다.

한어(漢語)를 잘 모를 수도 있으니 함부로 말하기가 어려웠다.

“어,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봉천이 뭐라고 말하려는 것을 끊고 백설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시험은 언제부터?”

“시험? 아, 그거. 응. 이제 슬슬 해야지.”

“그럼 해요.”

백설지는 겉치레라든가 화술 같은 게 전혀 없는 소녀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을 날릴 뿐이다.

신입생들은 만난 지 반각도 안 되었지만 백설지가 어떤 소녀인지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재밌다.”

소호가 나직하게 말하면서 씩 웃는다.

소호가 옆을 돌아보니 섭주해는 백설지를 바라보고, 조서인은 대미미를 바라보면서 멍하니 굳어져 있었다.

그 와중에 대미미가 소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오라버니, 재밌어!”

“그렇지? 오길 잘했지?”

“응!”

소호는 씩 웃었다.

백호방의 사람들은 각자 다 개성이 강해서 정말로 재미있다. 앞날이 기대된다는 건 이럴 때 써야 하는 말일 것이다.

“아니, 그렇지만…….”

“으하핫! 그래, 하자! 어차피 할 건데! 사실 무인은 무공으로 말해야지!”

소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따라왔는지 철웅이 뽀송뽀송한 얼굴로 씩 웃고 있었다.

머리는 잔뜩 젖어서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산발이었던 머리가 젖어서 딱 붙어 있으니 의외로 단정한 얼굴이었다.

“웅. 머리는 좀 말리고 오지 그랬어?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닌데.”

옆에 있던 맹인 소년, 유준이 일침을 날렸다.

“급한 일이 아니라니? 이렇게 재밌는 걸 기다릴 수 있겠냐!”

“그래도 씻는 건 제대로 해야지.”

“제대로 씻었다! 안 말렸을 뿐!”

철웅은 고개를 흔들어서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 냈다. 마치 목욕을 막 끝낸 사자견 같았다.

사방으로 물방울이 튀기니 아이들이 기겁하며 몸을 피했다.

유준은 지팡이를 움직여 날아오는 물방울들을 모두 완벽하게 쳐 내면서 말했다.

“제대로 안 씻으면 냄새가 날 거야.”

“으하핫! 이래 봬도 운동하고 매일 씻는다!”

철웅의 머리는 어느새 처음 봤을 때처럼 사방으로 뻗은 거친 형태가 되어 있었다.

“신입들! 무산제전에 대해서는 알고 있냐!”

아이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무산제전……?”

양손에 검은색 장갑을 낀 소년과 마희희 정도만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처음 들어보는 게 분명했다.

“설명해 주지.”

철웅은 호쾌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무산학관에선 학생들에게 아홉 개의 자치적 권한을 주었다.

그것이 구검패(九劍牌).

이 아홉 개의 검패는 동서남북 네 개의 기숙사에 각자 배당된다.

무산제전이 끝나는 시점에 검패 하나 당, 하나의 요구를 학관에 할 수 있는데 이 요구라는 것은 범위가 다채롭다.

돈으로 바꾼다면 은자 이백 개까지 가능하며 새로운 교관이나 배우고 싶은 종목을 요구할 수도 있다. 또한 기숙사 전용의 개인 교관을 요청할 수도 있다.

허나 대부분 검패를 이용해 기숙사에 필요한 시설을 짓는다.

연무장이나 내공수련실, 필요하다면 뛰어난 숙수를 고용할 수 있는 음식점이나 호수가 딸린 정자를 짓는 경우다 있다.

이미 지어진 건물의 증축 또한 가능하다.

무산제전이 끝날 때 갖고 있는 검패의 개수는 다음 해 기숙사의 미래를 좌우하므로 매우 중요하며, 지나친 독점을 막기 위해 한 기숙사에서 네 개 이상의 검패를 갖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즉, 한 기숙사에서 가질 수 있는 검패의 개수는 세 개까지다.

현재는 청룡방이 세 개, 현무방이 세 개. 주작방이 두 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검패를 기숙사끼리 합법적으로 빼앗을 수 있는 기회가 바로 무산제전이란 뜻이다. 어때? 두근두근하지?”

철웅은 말하면서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잠깐, 잠깐만요. 현무가 셋, 청룡이 셋, 주작이 둘, 그럼 우리 기숙사…… 백호방은요?”

마희희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아아, 한 개뿐이야. 우리가 가진 검패는.”

철웅은 품 안에서 손바닥 반 개만한 검패를 꺼내 들었다.

생긴 것은 작은 단검 모양.

재질은 황금이며, 무(武)라는 글자와 산(山)이라는 글자가 각각 칼날의 한 면에 한 자씩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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