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3화
제10장 풍운학관(風雲學官)(3)
철웅은 검패를 보여 준 뒤 다시 자신의 목에 목걸이처럼 걸었다.
아이들은 모두 눈을 빛내며 검패를 응시했다.
“하나뿐이라고 무시하지 마. 우리는 숫자가 적어서 무산제전에서 활약할 기회도 적었거든. 그나마 이 하나를 지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몰라. 나름대로 한 종목에서 일위를 했다는 증거라고.”
철웅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씩 웃었고, 마희희는 다소 불만스러운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인원수로 따졌을 때 백호방의 규모는 다른 기숙사의 십분지 일밖에 안된다.
그걸 감안한다면 철웅의 말대로 그나마 하나를 지켜 낸 것도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말이지. 이번만큼은 다를 거다. 너희가 들어왔으니 숫자도 충분해. 더 많은 수의 검패를 따오고 말 거야.”
철웅의 눈빛의 활활 불탔다.
“무산제패! 최강백호!”
철웅은 버럭 소리친 뒤 음흉하게 웃었다.
“연무장은 충분해. 흐흐. 이제 비싼 수련 기구를 들여놓을 거다. 쓰다가 부서져 버리는 허접한 기구 말고, 제대로 된 장인의 손길이 닿은 걸로! 평생 써도 안 부서지는 좋은 놈으로 말이야!”
“안 돼.”
봉천은 폭주하는 철웅을 단호하게 막았다.
“수련 기구는 충분하잖아?”
“……!”
철웅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도리어 아무 말도 못 하는 현상에 휩싸였다.
어찌 그럴 수 있냐는 듯 배신감이 가득한 눈빛이다.
옆에서 유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이해해 줘. 웅은 수련 기구에 대한 집착이 거의 광적이거든. 변태 수준이야.”
다시 한번 굳어지는 철웅이다.
“음, 아무래도 지금 가장 필요한 건…….”
“그렇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역시…….”
봉천과 유준이 각자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욕탕……이라고 생각해.”
“식당이지.”
봉천과 유준이 깜짝 놀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모두를 위해서도…… 저기, 욕탕이 가장 좋은 선택 아닐까?”
“식당이지. 식사를 하기 위해 매번 중앙 본관까지 가야 하는 건 시간 낭비야.”
봉천의 눈빛이 흔들렸다. 유준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으음…….”
“흐음?”
두 사람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유준과 봉천 모두 상대방의 요구를 인정할 수 없는 듯 보였다.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거기에 백설지까지 끼어들었다.
“다 틀렸어요. 필요한 건 돈이에요.”
그녀는 단호해 보였다.
“돈이 있어야 다음 무산제전을 대비하죠. 지금 우리가 약한 건 가난해서예요.”
“설지야, 검패를 돈으로 바꾸자고?”
“네.”
봉천이 내키지 않는 듯 조그만 입을 우물거렸다.
“으음, 돈이 생겨 봤자 결과는 비슷하지 않을까?”
“아니에요.”
백설지의 생각은 확고했다.
“작년 무산제전을 생각해봐요. 함정이나 기관 장치를 설치할 돈만 있었어도 모의전(謀議戰)은 우리가 이겼어요. 아니면, 우리가 공격할 때 쓸 만한 장비라도 샀어야 해요.”
“장비? 갑옷이나 암기 같은 거?”
“네.”
“무인이 갑옷을 입는 건…….”
봉천은 난감한 듯 조그만 입을 우물거렸다.
반박하고는 싶은데 그러면 백설지와 싸워야 하니 망설이는 모습이 너무나 봉천스럽다.
“하핫! 오히려 잘됐잖냐!”
철웅이 웃음을 터뜨린 건 바로 그 때였다.
“생각이야 각자 다를 수도 있지. 뭐가 정답인지는 한번 해보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겠냐? 다들 제법이야. 주장이 그럴듯해! 물론 난 당연히 수련 기구가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만, 여기선 관용을 갖고 모두의 의견을 존중해야겠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수련 기구를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유준이 송곳처럼 날카롭게 반박했다.
“마, 맞아.”
“수련 기구는 아니죠. 애초에 쓰는 사람은 한 명뿐이고.”
봉천과 백설지도 반대한다.
철웅은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하는 건지 모를 유쾌한 얼굴로 ‘짝’ 소리가 나게 손뼉을 쳤다.
“모두의 의견이 ‘백중세’로 비슷비슷해서 결정하기 어렵지만, 마침 우리에겐 능력을 알고 싶은 신입생들이 잔뜩 있잖아? 어때? 딱 제격이지? 매년 신입생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이 좀 더 재밌어지지 않겠어?”
봉천, 백설지, 유준.
모두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 말은……?”
“재밌네요.”
“흐음?”
의견이 대립하던 세 사람이지만, 의외로 별로 고민할 것도 없이 철웅의 제안을 승낙했다.
마치 제비가 물을 차고 날아오르듯 모든 것이 재빨리 결정되어 버렸다.
그들은 봉천을 중심으로 모여서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며 뭔가를 논의했다.
“누구랑 누구를……?”
“일단 맡을 방향부터…….”
당황스러워진 것은 신입생들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상황에 미아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것이다.
잠시 후, 그들만의 회의가 끝난 듯 봉천이 앞으로 나섰다.
“음, 우리 백호방은 신입생이 들어왔을 때 실력을 시험하는 전통이 있어. 작년엔 설지가 우리 들 중에 한 사람과 대련을 했었고, 이번엔 너희와 대련을 해볼까 해.”
옆에서 철웅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 전에, 너희 중에 지 시험 출신이 누구냐? 손 좀 들어 봐. ……어? 셋이나 돼?”
봉천은 놀라는 철웅에게 그렇다고 말해 주었다.
“호오? 그렇단 말이야?”
철웅은 흥미가 생긴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팔짱을 낀 채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뜨거운 눈으로 세 사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거 재밌어지는데? 어쨌든 너희 셋은 날 따라와. 지 시험의 선배이자 우리 백호방의 최고참을 만나 보자고.”
철웅은 얼른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한 뒤 성큼성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섭주해는 당황하며 소호를 쳐다봤다.
그리고 웃고 있는 소호를 보며 묘한 표정이 되었다.
“소호 형.”
“응?”
“아니, 아니에요. 선배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어 주세요.”
섭주해는 소호에게 기대한다는 듯 부드럽게 웃은 뒤 철웅의 뒤를 따라 갔다.
나머지 두 사람, 마희희와 윤지관도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섭주해의 뒤를 쫓았다.
“음, 그럼 이제 숫자도 맞지? 웅이는 다시 돌아올 거야.”
백호방의 선배는 봉천, 철웅, 백설지, 유준으로 네 사람.
신입생 역시도 지 시험 출신 세 사람을 제외하면 딱 네 사람이다.
“히힛.”
소호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싸움이라는 건 소호에게 놀이와 다름없다.
주변을 돌아보니 대미미를 포함한 신입생 모두가 긴장하여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다.
소호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눈앞에 있는 선배들과 실력을 겨뤄보다니.
은자촌에 있을 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즐거운 일이 아닌가.
‘어떤 무공을 쓸까? 선배들은 어떤 특기를 갖고 있지?’
소호는 참으려고 했지만 웃음이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걸 막지 못했다.
그 와중에 시선을 느꼈다.
유준이 눈을 감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호는 분명히 유준의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규칙은 간단해. 우린 기숙사의 동서남북 방향에 한 사람씩 서 있을 거야. 대련도 하고, 기숙사의 구조도 익힐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해. 음…… 여길 보면, 우린 각자 이렇게 생긴 동그란 구슬을 목에 걸고 있어.”
봉천은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유리구슬을 보여 주었다.
“니들이 어느 정도 이상의 실력이 있다고 평가되면 우리가 이 구슬을 넘겨줄 거야. 나중에 이 구슬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기숙사에서 가장 좋은 방을 배정해 주도록 할게. 다른 걸 원하면 그것도 가능한 한 들어줄 거고. 이를테면 백호방의 검패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편해.”
봉천이 어눌한 목소리로 설명하는 사이, 유준을 비롯한 선배들이 출구를 통해 사라졌다.
모두가 한꺼번에 나간 탓에 누가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봉천은 여치 같은 얼굴로 툭 튀어나온 두 눈을 끔뻑거리며 웃었다.
어딘가 즐거운 듯한 모습.
축제 직전의 들뜬 기분이 신입생들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자, 이제 시작할게. 너희끼리 누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 정해도 좋고. 한꺼번에 와서 한 명씩 대련해도 좋아.”
봉천이 긴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밖으로 나간다.
선배들이 모두 나가 버리자, 백호방의 중앙 휴게실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장소호, 대미미, 그리고 소년 두 사람이 남았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소호였다.
“난 장소호라고 해. 너희는 이름이 뭐야?”
순박하고 착하게 생긴 소년이 쑥스러워 하며 대답했다.
“어…… 저기, 난 조서인.”
소호는 창으로 보이는 긴 막대를, 천으로 둘둘 말아 등에 매고 있는 모습에 시선이 갔다.
“창이야?”
“응, 우리 집안은 대대로 창을 썼어.”
“와아, 우리 아버지도 창을 쓰시는데.”
소호는 장기린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래? 어떤 종류? 장창? 낭선? 당파? 아니면 대도?”
조서인은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처럼 보였으나 창 이야기가 나오니 눈을 빛내며 돌변했다.
“자세한 이름은 나도 몰라. 그런데 대도인 것 같아. 칼날이 넓고 컸거든.”
소호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구나. 그럼 너도 창을 써?”
조서인이 신이 난 듯 소호의 대답을 재촉했다.
“아니. 아버지가 안 가르쳐 주셨어. 난 내가 원하는 걸 배우래.”
“으음…… 이상하다. 보통 아버지는 아들이 가문의 무공을 잇길 바라던데.”
“그래?”
소호는 대답 후 마냥 해맑은 얼굴로 조서인을 바라봤다. 조서인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뭔가 아버지와 관련된 슬픈 사연이 있는 듯했다.
소호는 화제를 돌려야 함을 직감했다.
“너는 이름이 뭐야?”
양손에 검은색 장갑을 낀 소년은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눈썹이 짙었고 눈꼬리가 위로 올라가 자칫 오만한 인상을 받게 만든다.
“은위군.”
“특이한 이름이네?”
“난 동으로 간다.”
은위군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톡 쏘는 말투에 눈빛이 날카롭다. 야생동물을 떠올리게 하는 소년이었다.
‘저 녀석은 왠지 깜돌이 같네.’
소호는 은자촌에서 보았던 거대하고 커다란 곰을 떠올렸다.
어릴 적엔 깜돌이도 저렇게 까칠했었다. 말을 걸 때마다 이빨을 드러내며 소리를 질러댔었다.
물론 나중에는 ‘설득’하고 대화해서 친해졌지만 말이다.
“다 같이 갈 거야? 아니면 각자 방향을 정해서 갈까?”
“몰려다녀서 좋을 게 뭐지?”
은위군은 각자 방향을 정해서 가고 싶다는 의견이 확고했다.
“난 같이 가도 좋……. 아니, 아니야. 따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조서인은 우물쭈물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선배랑 대련하면 질 게 뻔한데, 그걸 친구들한테 보여 주기는 좀…….”
“후…….”
옆에서 은위군이 코웃음쳤다.
“네 무공은 보여 주지 못할 정도인가 보지?”
“……!”
순식간에 조서인의 얼굴이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은위군은 여전히 냉담한 얼굴이다.
둘은 친해지기가 쉽지 않겠다고 소호는 생각했다.
“미미는 어떻게 생각해?”
“나도 따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미미는 의외로 생각이 확고했다.
“그래?”
“응, 나도…… 부끄러워.”
대미미의 새하얀 볼이 살짝 붉게 물든다.
소호는 빙긋 웃었다.
역시 미미는 미미다.
옆에서 티격태격하던 조서인과 은위군도 순수한 미미를 보며 말을 아꼈다.
둘 사이의 긴장이 약간 풀렸다.
“좋아, 그럼 따로따로 가자. 위군은 동쪽이라고 했고, 미미랑 서인이는 어디로 갈래?”
“음, 글쎄? 난…… 남쪽으로 가 볼래.”
“어디든 괜찮아.”
조서인은 남쪽을, 미미는 어디든 괜찮다고 말했다.
소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미미는 북쪽, 서인이는 남쪽, 나는 서쪽으로 갈게.”
“그래, 그러자.”
“훗.”
조서인과 은위군이 몸을 돌렸다.
“소호 오라버니. 서쪽으로 가는 이유가 있어?”
“그냥. 백호방이 서쪽이니까. 왠지 서쪽이 재밌을 것 같아.”
소호는 씩 웃었고, 대미미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네 사람은 각자 대미미는 북쪽, 은위군은 동쪽, 조서인은 남쪽의 방향으로 서로의 행운을 빌며 흩어졌다.
소호는 마치 소풍을 나온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기숙사의 서쪽으로 향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은 느낌부터가 다른 법이다.
빈방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서쪽으로 갈수록 은은한 목재 향기가 점점 더 강해졌다.
나무 기둥은 처음 세워졌던 그대로 매끈하다.
바닥과 문지방 근처엔 회색 먼지가 잔뜩 쌓여 있다.
소호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서쪽으로 향했다. 마침내 서쪽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갔을 때,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역시! 왠지 서쪽이 제일 재밌을 것 같았는데!”
소호의 목소리는 밝았다.
눈은 반짝반짝 빛났고, 개구쟁이 같은 입술은 큰 기쁨을 참지 못하고 자꾸만 위로 올라갔다.
“그래? 나도 왠지 그런 느낌을 받았었는데.”
하얀색 무복을 입고 지팡이를 든 소년.
목에는 유리구슬이 걸려 있다.
차분한 목소리에 지그시 감은 두 눈이 매력적이다.
“그럼, 이제 네 실력을 한번 볼까?”
유준이 지팡이를 거꾸로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