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5화
제10장 풍운학관(風雲學官)(5)
“으음, 이걸 어째야 하나.”
철웅은 지상 최대의 난제를 만난 것처럼 고민에 빠졌다.
“이것 참. 하필 널 만나다니. 난 시험 수석을 만나 보고 싶었는데. 좋아, 이렇게 하자. 너랑 나랑 간단하게 승부를 보는 거야. 그리고 난 다른 녀석들 싸움을 구경하러 가는 거지. 봐주는 건 없어. 전력을 다하는 게 규칙이거든. 너무 무정하다고 울면 안 돼. 규칙은 규칙이니까 어쩔 수 없어.”
철웅은 왼쪽 손을 내밀었다.
“넌 오른쪽 손으로 내 손을 붙잡아. 그리고 서로 당기는 거야. 무인(武人)의 균형 감각과 근력, 그리고 내공을 동시에 시험할 수 있는 좋은 승부지. 당겨져 바닥에 넘어지면 지는 거다?”
철웅은 자신이 내린 결론에 매우 만족하였다.
이 얼마나 합리적인 승부인가.
실력 차를 명확히 비교할 수 있고, 거기에 한쪽이 지더라도 상대가 그리 다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보기엔 그냥 소녀지만…… 어쨌든 체 시험장을 통과했을 테니 기본은 되어 있겠지. 그럼 이 정도가 적당해.’
그나마 평소에 단련된 오른손을 내밀지 않은 것이 여자아이에 대한 배려였다.
철웅으로서는 눈이 똘망똘망한 귀여운 여자아이를 절망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작은 소녀 대미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얼굴에서 쑥스러워 하던 느낌이 사라졌다. 오히려 토라진 듯 볼이 부풀어 올랐지만 자아도취에 빠진 철웅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 시작하자!”
소녀가 새하얀 손을 내밀었다. 철웅의 손가락과 미미의 손가락 사이가 얽히며 단단하게 깍지가 껴졌다.
손깍지는 단단하다.
한쪽이 풀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손깍지는 풀리지 않는다.
철웅은 소녀의 손이 매우 부드러우며, 한편으론 소녀 치곤 손이 꽤 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슬슬 당겨야겠다고 생각한순간, 철웅의 육신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어?”
허공에서 흩어진 단말마의 비명이 커다란 반원을 그렸다.
귓가에 바람이 스쳐간다.
풍압에 볼살이 밀려난다.
이 모두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다.
철웅은 순식간에 땅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안 돼!’
“우랴럇……!”
쿠웅!
‘안 된다’고 생각하며 한 발을 더 내딛어, 균형을 잡은 것이 그나마 철웅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 주었다.
철웅의 눈빛이 거센 풍랑을 맞은 배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철웅은 등판이 찌릿찌릿함을 느꼈다. 급하게 짚은 다리에 발목이 시큰거렸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철웅의 근육이 너무 놀라 한계까지 늘어났었다는 뜻이다. 무산학관 최고의 근력을 지닌 천하의 철웅이 근육통을 느낀 것이다.
“너……?”
철웅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고, 볼을 살짝 부풀린 채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린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불만이 가득해 보였다.
그녀의 원망이 향하는 건 한 사람.
바로 철웅이다.
“이얍!”
귀여운 함성이 들리고 철웅의 왼 손깍지를 통해 감당할 수 없는 힘이 밀려들었다.
그건 늪이었고, 갈고리였으며, 거대한 대자연의 힘이었다.
철웅의 몸이 뒤집어졌다.
바람에 날리는 연처럼 날아올라 등짝부터 번개처럼 바닥에 내리꽂혔다.
쾅!
거센 진동이 백호방 전체를 울렸다.
쩌저적!
바닥에 깔린 돌바닥이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흥.”
대미미는 드물게 화난 얼굴로 머뭇거리다가 철웅에게 충고했다.
“거만한 사람은, 약해요.”
미미의 이 한마디는 철웅에게 평생의 상처를 남겼다.
***
검은 만병지왕(萬兵之王)이라는 말이 있다.
허나 그것은 맞는 말이기도, 틀린 말이기도 하다.
다른 맹수들과 비교해 육체가 강한 것도, 그렇다고 송곳니나 발톱이 날카로운 것도 아닌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것.
그것이 도구이며, 또한 병기이다.
병기의 발전은 나뭇가지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꺾인 나뭇가지를 몽둥이로 사용했으나, 그것은 무기로 쓰기엔 너무 쉽게 부서졌다.
그래서 사람은 돌멩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무데서나 찾을 수 있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뼈를 부술 수 있는 무기가 돌이었다.
사람들은 돌을 깎아서 날카롭게 만들었고, 그것은 곧 인류 최초의 칼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맹수와 싸우기엔 충분했다.
사람들은 돌칼을 나무 막대 끝에 달아 창을 만들었고, 가죽 끈을 이용해 돌멩이를 던지는 투석(投石)의 원리도 깨달았다.
인류는 맹수들을 제압해 나갔고, 자연에 적수가 없어지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인류라는 적을 만난다.
각각 계파로 나누어 맹수가 아닌 인간들끼리의 싸움을 시작하자 이내 돌칼은 부족해졌다.
때문에 병기의 재질은 점점 더욱더 단단한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다.
청동, 철, 강철.
무기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먼 거리를 제압하는 활부터, 중거리를 장악하는 장창. 근거리를 지배한 건 방패와 중병기다.
각자의 상성에 따라 싸우고, 상처 입고, 무기는 더욱 발전했다.
두꺼운 게 깎이고, 무른 건 단단하게 바꾸었다.
그렇게 도달한 게 바로 ‘검’이다.
공방일체.
사람의 손을 연장한 듯 편하게 다룰 수 있는 검은, 최초의 무기인 몽둥이와 닮아 있었다.
결국 무거운 중병, 긴 막대 따위는 덤일 뿐이다.
그렇게 검(劍)은 인류의 보편적인 무기가 되었다.
소호는 검(劍)이라는 게 이렇게나 무서운 무기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었다.
전후좌우, 옴짝달싹 못하는 게 마치 그물에 걸린 것 같았다.
처음에 유준이 지팡이를 휘두를 때만 해도 할 만했었다.
물론 지팡이의 공격은 빨랐다.
하지만 은자촌의 노인들을 상대로 단련된 소호가 보기엔, 유준의 지팡이는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공격은 손쉽게 피해 냈고, 뒤로 물러나 유준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어떻게 하면 저 목걸이를 빼낼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며 빈틈을 노려댔다.
“역시.”
유준이 변한 건, 그 말을 한 직후였다.
지팡이에서 검이 뽑혀져 나왔다.
검날의 은빛이 번뜩이는 순간부터 소호는 수세(守勢)에 몰렸다. 소호가 반격을 노리는 일 따윈 생각할 수도 없었다.
검의 움직임과 다음 검의 움직임이 물 흐르듯이 이어지며 움직임을 옭아매고 있었다.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아니, 폭풍보다 해일이랄까.’
좌측 아래에서 시작된 공격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우측 상단에서 끝난다.
유준과 달리 맨손인 소호는 공격을 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워낙 유준이 빈틈없이 촘촘하게 초식을 짜 놓아서 쉽지 않았다.
“이얍!”
소호는 가볍게 몸을 띄우며 허공에서 반원을 그리는 원앙각을 차 냈다.
이는 상대방의 목덜미를 노리는 각법이다.
빠르고 정확한 일격이었지만, 유준의 검이 더 빨랐다.
“우왓?”
‘쉭’ 하고 날카로운 칼날이 어깨 부근을 스쳐 지나갔다.
소호의 옷자락이 너무나 쉽게 잘렸고, 따끔한 느낌이 드는 걸 보니 피부도 베인 듯했다.
첫 번째 상처였다.
소호는 재빨리 몸을 낮춰 양발이 땅에 닿자마자 허리를 한계까지 뒤로 젖혔다. 동시에 왼쪽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피융.
허공을 찌른 유준의 검에서 섬뜩한 파공음이 났다.
유준의 몸동작은 정확하고 간결했다.
군더더기가 없어 더욱 날카롭다.
소호는 유준이 검으로 왼쪽 다리를 노려오자 재빨리 다시 발을 빼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한 걸음만 물러선 것이 아니라 일 장 간격으로 펄쩍.
완전히 뒤로 물러서서 상대를 지켜본다.
“후우.”
크게 한숨을 내쉬며 노려보니 유준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마치 어둠 속에서 사냥감을 관찰하는 표범인 듯 소호에게로 시선을 맞출 뿐이다.
‘눈은 분명히 감고 있는데, 희한하게 시선이 느껴진단 말이야.’
소호는 어느새 멈춘 유준을 방심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멀리 떨어진 것 같아도, 유준의 실력이라면 거리를 좁히는 건 한순간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네. 으음, 나와서 처음으로 만나는 강적이네. 이럴 땐…… 진구 삼촌이 뭐라고 했더라?’
소호는 예전에 진구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한창 장기린의 소맷자락 잡는 걸 힘들어할 때 해 주었던 조언이다.
‘하하핫! 큰형님의 소매를 잡아? 그거 참 어렵겠네! 그럴 땐 말이지. 상대방의 상상을 뛰어넘어야 해. 여기서 상상이상이란 건 꼭 실력을 말하는 게 아냐. 예를 들면 말이지, 네가 한 걸음에 일 장 정도를 뛰어넘는다고 치면, 상대는 거기까지만 예측을 할 수 있어. 일 장 거리를 뛰겠거니 생각하곤 대비한단 말이야. 그렇다고 있는 힘을 다해서 일 장 반을 뛰어도 상관없어. 그 정도는 예상 범위거든. 그럼 어떻게 하느냐? 아예 뛰질 않는 거야. 그렇게 상대방을 머릿속에서부터 뛰어넘는 거지.’
소호는 진구의 조언을 떠올렸고, 다시 떠올려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걸 깨달았다.
‘으음, 아예 안 뛰는 게 어떻게 해결책이지?’ 평소에 일 장을 뛸 수 있지만, 안 뛴다.
그 말만이 소호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사실 아직까지도 완전히 이해는 잘 안 된다. 하지만 소호는 왠지 용기가 샘솟았다.
‘지면 또 어때, 일단 한번 해 볼까?’
소호는 씩 웃었다.
고민할 필요 없다. 현재 유준과 겨루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밌으니까.
소호는 유준에게 슬금슬금 다가가다가 한순간에 펄쩍 뛰어 다가갔다. 유준은 겨울철 꽁꽁 얼어붙은 솔방울 같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섣불리 만지면 따갑다.
소호는 묵신 할아버지에게 배운 보법을 사용했다.
속도의 완급을 조절해 마치 아지랑이가 일렁이듯 잔상을 남기는 상승 보법이다.
처음의 목표는 좌측 사각지대.
쉬익.
‘역시.’
유준은 빨라진 속도에 대응했다. 소호의 움직임이 끝날 때쯤 이미 검 끝이 중단을 노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 보법을 사용해 보았다.
이번엔 오른쪽.
쉬익.
그래도 유준은 반응해 왔다.
이번엔 더욱 빠른 속도로 반응했다.
소호의 움직임을 순식간에 익히는 것이다.
“히힛.”
그 순간 소호는 오른쪽 발로 강하게 땅을 내리찍었다.
“타핫!”
단단한 돌바닥이 대번에 박살이 난다.
강렬한 기합성이 보이지 않는 물결이 되어 포탄처럼 유준을 직격한다.
“큭?”
유준은 처음으로 타격을 입은 듯했다.
차가웠던 얼굴이 일그러지고, 미륵여래 같던 평정심이 깨져 몸이 비틀거렸다.
귓속의 반고리관이 흔들린 것이다.
맹인은 본래 청각에 더 예민하다.
유준에겐 더더욱 치명적인 한 수였다.
“……사자후?”
유준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작게 중얼거린다.
소호는 생각했다.
파계승.
불요신승 각요 할아버지에게 배운 기술이었다.
배울 때도 재밌었는데 역시나 제대로 사용하니 더 재미있다.
소호는 씩 웃으며 유준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직 유준의 경직이 풀리지 않은 시점이었다. 유준의 검 끝은 소호의 중단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래도 소호는 방심하지 않았다.
유준의 시선은 여전히 소호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후읍!”
소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배가 빵빵해져 터지기 직전까지.
그 상태로 양손을 나란히 땅바닥에 댄다.
아랫배에 모인 따끈한 기운이 손바닥 장심(掌心)에 모이는 순간, 전신의 근육을 모조리 앞쪽으로 수축시켰다.
“읏쌰아!”
‘콰득’ 하고 양손이 돌바닥을 파고드는 감촉을 느꼈다. 소호는 지룡폭(地龍爆)을 처음 배울 때의 기억을 되짚었다.
은자촌 네 번째 할아버지. 북두신군은 말했었다.
‘중요한 건 힘을 내뿜는 게 아니라 끌어당기는 것.’
양손이 땅바닥을 파고드는 순간, 가슴이 팽팽하게 느껴질 정도로 양손을 등 뒤 한계까지 끌어당긴다.
마치 천근 쇳덩이를 끌어당기는 느낌.
‘펑’ 하고 공기가 끌려 나오고, 그 순간 바닥의 돌덩이들이 포탄이 터진 것처럼 전방위를 장악한다.
“크윽!”
유준의 온몸이 돌덩이에 얻어맞았다.
돌멩이가 크진 않지만 ‘퍽, 퍽’ 소리가 날 정도의 크기는 된다.
이로써 유준의 자세는 완전히 무너졌다.
치명타를 먹일 수 있는 기회. 소호는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공격을 가하려는 순간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의식적으로 아무 행동도 안 하는 자연체의 모습이다.
“……!”
소호는 유준의 얼굴이 회심의 미소에서 경악,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빛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유준은 뒤로 넘어질 듯한 자세에서 검을 대각선으로 쭉 뻗고 있었다.
소호가 뛰어들었다면 옆구리가 꿰뚫렸을 위치였다.
‘진구 삼촌의 조언이 맞았네?’
일 장 거리를 뛰다가 갑자기 뛰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막상 해 보니 먹혔다.
소호는 유준이 검을 다 뻗는 순간 움직였고, 검날 옆을 미끄러지듯 파고들며 유준의 품 안에서 허리를 띄웠다.
‘내가…….’
‘퍽’ 하고, 소호의 오른발이 유준의 목덜미에 닿았다.
‘이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