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57화 (186/686)

3권 7화

제11장 세 명의 신인(新人)(1)

무산학관이라는 곳은 상당히 특이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무한히 자유로운 듯하면서 한편으론 굉장히 억압적이다.

소호는 동도 트지 않은 새벽에, 시끄러운 종소리로 인해 깨어나 그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부터 너희는 무산학관의 학생으로서 건전한 육체와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태극권(太極拳)’의 수련을 함께 한다. 여기엔 어느 시험 출신이든 관계없다. 모두가 평등하다. 지 시험장 출신이라도 같이 해야 한다는 소리다.”

철표의 목소리는 준엄했고, 어떠한 반론도 용납지 않았다.

무산학관의 재학생은 총 이백 명 정도.

그 많은 인원이 중앙 광장에 모여 같은 동작을 수련하는 모습은 꽤나 장관이었다.

청룡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현무방과 주작방이 세 덩어리로 나뉘어 전면을 차지하고 있었고, 백호방은 맨 뒤쪽에 작은 원을 그렸다.

선배일수록 앞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입관식 때 본 깃발을 든 선배들이 대부분 앞쪽에서 태극권을 수련하고 있다.

‘헤에, 재밌네.’

소호는 태극권의 단순한 동작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적당한 기마자세, 허리를 곧게 편 채 두 손바닥을 크게 좌우상하로 원을 그리듯 부드럽게 회전시키면 끝이다.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누구나 따라할 수 있도록 만든 것에서 창작자의 고뇌가 느껴졌다.

‘너무 쉽긴…… 한데.’

동작 따윈 한번만 보고 다 외웠다. 소호는 그다음을 바라보았다.

‘누구든 따라할 수 있고, 누구나 건강해질 수 있는 무공. 대단하네. 이런 방식의 무공도 있구나.’

천축 유가부터 소림의 동공(動功)까지 여러 종류의 양신법(養身法)을 습득한 소호였기에, 태극권의 본질을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소호의 무공을 보는 안력(眼力)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태극권의 동작과 동작 사이.

철표 교관이 가르쳐 주지 않는 부분의 연결 고리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본래 작은 차이가 큰 변화를 만들어 내는 법이다.

발을 좀 더 앞으로 내밀어 무게중심을 옮긴다든가, 같은 동작을 하면서 손끝이 아니라 허리 근육에 신경을 쓰는 것만으로도 태극권의 움직임이 전혀 달라졌다.

‘어라. 이거…… 이렇게 하면 움직임에 따라 내공도 움직이네?’

소호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동작을 조금씩 바꿔 보기 시작했다.

상단에서 하단으로.

명치 부근에서 양손이 교차할 때 손목의 방향을 조금 틀자 단전의 기(氣)가 좀 더 민활하게 꿈틀거렸다.

‘와아.’

소호의 눈이 반짝였다.

타고난 재질에 숨겨져 있던 탐구자(探究者)로서의 재능이다.

소호는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새벽 수련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한편 열의를 내뿜고 있는 소호의 곁에선 태극권 따위에 전혀 관심도 없는 백호방 신입생들이 대충 동작을 따라하고 있었다.

섭주해, 대미미, 은위군, 윤지관, 마희희, 조서인.

그들에게 태극권은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해야 하는 노동에 불과했다.

뻐드렁니 윤지관이 물었다.

“너 마희희 맞아?”

“그래서 뭐, 불만이야?”

머리는 산발이고 눈이 퉁퉁 부어 누군지 못 알아 볼 것 같은 소녀가 잔뜩 성이 난 고양이처럼 되물었다.

그녀는 통통한 팔로 허공에 커다란 원을 그리려다가 다리가 꼬여 비틀거렸다.

“이 따위!”

그녀는 동작을 멈추고 분한 듯 씩씩거렸지만, 철표 교관의 날카로운 시선에 재빨리 자세를 되돌렸다.

“……지 시험 출신인 내가 왜 이런 걸 해야 하는 거야?”

마희희가 ‘휙’ 하고 돌린 시선은 윤지관에게로 돌아갔다.

“불만이냐고?”

“아냐. 그럴 리가.”

윤지관은 찔끔한 표정으로 두번 묻지 않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마희희는 사나운 눈빛으로 그런 윤지관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중얼거렸다.

“선배들도 너무하네. 아침에 깨워서 끌고 나올 것 같았으면 미리 말해 주라고……. 여자가 아침에 얼마나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 이게 뭐야?”

마희희는 백호방 내에서 여성으로서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줄 것 같은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성들의 장점이 그것이다.

아픔을 공유하고 서로 위로해 주면서 어려움을 극복해 내는 것이다.

“으응?”

헌데 마희희의 미간이 좁혀졌다.

일 년 선배인 백설지는 대체 잠을 자다가 나온 게 맞긴 한 건지, 방금 막 씻고 나온 것처럼 촉촉이 젖은 머리가 오히려 그녀의 청초한 매력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대미미는 더했다.

기상종이 치고 나서 시간도 얼마 없었는데. 귀엽게 땋은 머리와 단정한 무복이 평소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으으…….”

마희희의 짜증은 점점 강해져만 갔다.

“야! 좁잖아. 좀 더 옆으로 가!”

“으응.”

애꿎은 윤지관만 짜증의 대상이 되었다.

“졸려?”

앞사람의 동작을 따라하던 대미미가 옆에 있는 섭주해에게 물었다. 섭주해의 모습은 마치 버드나무 가지처럼 휘적거려서 눈에 띄고 있었다.

“……으응?”

섭주해는 반쯤 뜬 눈으로 묻고는 다시 힘겹게 눈을 감았다. 손끝은 축 쳐졌고 어깨는 축 늘어졌다. 심지어 고개를 꾸벅꾸벅 흔들며 대놓고 잠에 빠지기도 했다.

항상 차분하고 이지적인 섭주해에게 단점이 있다면 잠에 약하다는 것이다.

섭주해는 매일 다섯 시진 이상 자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오늘은 잠이 많이 부족했는지 서 있는 상태로 고개를 꾸벅꾸벅 흔들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도 동작은 다 따라한다는 점이 꽤나 신기했다.

“아냐. 더 자.”

대미미는 배시시 웃으면서 섭주해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무릎을 굽힌 채 양손을 모았다가, 무릎을 펴면서 양팔을 머리 위에서 교차시켰다.

후웅.

대미미의 손끝에서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대미미는 깜짝 놀라 얼굴을 붉히며 동작을 작게 바꿨다.

힐끔 옆에 있는 소호를 바라봤다.

소호는 뭔가에 골똘히 집중하고 있어서 못 본 듯했다. 안도감과 아쉬움이 동시에 들었다.

철표 교관은 체 시험의 수석이었던 소호를 중간중간 바라보고 있었다.

시험 역사상 최단 기록을 세운 인재가 아닌가.

철표는 학생들을 차별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태극권을 가르치는 와중에 자꾸만 소호에게 눈이 가는 것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저것 봐라?’

이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한 철표가 시선을 고정시켰다.

대충 동작만 흉내 내는 소년, 소녀들 사이에서 소호 한 명만은 제대로 된 동작을 심혈을 기울여 행하고 있었다.

‘초식만이 아니라 내공까지 고려한 움직임이다. 스스로 깨달은 건가? 아니면 미리 배웠던 건가?’

철표의 의심은 곧 풀렸다.

소호는 한번 했던 동작을 미묘하게 바꿔서 다시 하며 시행착오를 줄여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행동을 반복할수록 철표가 알고 있는 ‘진짜 태극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신기한 아이다. 이백 도지휘사사가 추천했다고 하던데. 어떤 사이지?’

철표가 소호에 대해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할 때, 마침 백호방 학생들 사이가 소란스러워지고 있다.

‘퍽’ 하는 격타음과 버럭 터져 나오는 고함.

이내 엉겨 붙는 두 사람을 보며 철표가 동작을 멈추고 우뚝 멈춰 섰다. 주변의 모든 학생들이 몸을 돌려 백호방 아이들을 쳐다본다.

철표는 피식 웃고 말았다.

마침 좋은 기회가 알아서 찾아온 것이다.

***

사고는 윤지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마희희의 짜증에 옆으로 조금씩 비켜 주다 보니, 어느새 섭주해와 너무 가까워졌던 모양이다.

거의 반쯤 눈을 감고 있던 섭주해의 마보추장(馬步追掌)이 윤지관의 턱을 정확히 가격했다.

순간적으로 ‘핑’ 하고 눈이 풀린 윤지관이 옆으로 넘어지면서 허우적거리며 손을 뻗었다.

“으앗?”

윤지관이 붙잡은 게 하필이면 조서인의 왼쪽 다리였다.

깜짝 놀라 깡충 뛰어오른 조서인은 다행히 중심을 잡았으나, 넘어지기 직전에 조서인의 우측에 있던 은위군의 허리 부근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꽤나 강하게 부딪친 두 사람이다.

조서인은 비틀거리며 물러나 얼얼한 머리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으으, 미안.”

놀라고 당황했으나 일단 사과부터 하는 게 조서인의 성격이다. 헌데 덜컹, 머리가 흔들렸다. 조서인은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얼굴이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

당황한 조서인의 명치 부근에 전질보에 이은 등각(登脚)이 파고든다.

“컥.”

조서인은 황급히 양손을 모아 방어하려 했지만 이미 몸은 뒤로 붕 떠오른 상태였다.

짧은 신음과 함께 바닥을 뒹군 조서인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이 먼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조서인은 예의가 바르고 약간 소심할 뿐, 바보가 아니다. 드물게 분노 가득한 눈빛으로 은위군을 노려보았다.

“뭐……하는 거야?”

“내가 물을 말이다.”

은위군은 빈틈없이 묶은 머리만큼이나 차가운 눈빛으로 조서인을 내려다보았다.

“무인이라는 녀석이 자기 중심도 못 잡아서 남에게 부딪치냐?”

“……어쩔 수 없는 사고였어. 그래서 사과했잖아?”

“멍청한 데다 뻔뻔하기까지 하네. 남에게 피해를 줘 놓고 사과하면 다인가? 사과하면 내 허리에 닿은 불쾌한 타격이 사라지기라도 해?”

조서인은 이빨 사이에서 빠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은위군의 말은 이치에 맞다.

하지만 그것을 납득할 수 있냐면 그건 아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야하는 법. 조서인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배워 온 사고방식은 실수를 폭력으로 갚는 방식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조서인은 크게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가 내쉬었고, 최대한 차분한 마음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자기만의 규칙이 있으면 존중해 줘야 할 필요도 있는 법이다. 먼저 건드린 건 조서인 자신이었다. 때문에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그렇게 되뇌며 참아 보려 했다.

“그렇게 따지면, 넌 왜 두 대를 때리는데? 난 실수로 한번만 건드렸잖아?”

은위군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난 받은 빚은 두 배로 갚는다.”

“…….”

조서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결국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폭발하고 말았다.

“웃기지 마!”

황소처럼 달려든 조서인이 은위군과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움을 시작했다. 처음엔 무공을 사용해 합을 겨루는 듯했으나 이내 한데 엉켜 바닥으로 넘어졌다.

“놔아아!”

“네가 놔!”

두 사람이 서로 옷을 잡아당기고 발로 걷어차며 바닥을 뒹군다.

“은위군! 조서인! 그만해!”

가장 먼저 소리치며 달려온 건 백호방의 방장 봉천이다. 그는 꺽다리처럼 길쭉한 팔다리를 흔들며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왜, 왜 그러는 거야! 무슨 일인데?”

조서인과 은위군은 떨어져 나간 뒤에도 서로를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봉천은 주변에 도움을 구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지만, 모두가 난감한 표정만 지을 뿐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특히 섭주해, 마희희, 윤지관은 자신들의 잘못도 연관되어 있어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첫 수업 시간에 싸우다니. 잘하는 짓이군.”

그사이 철표 교관이 다가왔다.

무섭도록 차가운 표정, 싸늘한 눈빛에 주변의 모두가 얼어붙었다.

“백호 방장.”

“예. 교관님.”

“백호방 신입생들이 우리 학관에 대한 예의가 너무 없는 것 아닌가? 수업을 하는 중인데 대놓고 쌈박질을 하고?”

봉천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교관님. 제 불찰입니다.”

철표 교관은 아직도 숨을 씩씩거리는 은위군과 조서인에게 물었다.

“너희 둘은 왜 싸웠나? 이유를 말해 봐.”

두 사람은 머뭇거렸다.

“이야기하기 싫은가?”

“제가…… 실수로 부딪쳤어요.”

조서인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은위군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탓이라는 건가?”

“…….”

“아냐?”

조서인이 억울함과 당황스러움 사이에서 고민하는 중에 옆에서 윤지관이 나섰다.

“저기, 교관님? 제가 넘어지면서 서인이의 바지를 붙잡은 게 잘못인 것 같기도 한……데요.”

윤지관은 꽤나 정직한 성격인 것 같았다.

철표 교관을 죽을 듯이 무서워하면서도 끝까지 정직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교관님.”

이제는 완전히 잠에서 깬 섭주해도 나섰다.

“사실은 제가 지관이의 턱을 친 게 시작입니다.”

섭주해는 처벌을 각오한 곧고 결연한 눈빛으로 철표를 마주보았다.

철표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뭐 좋다. 또? 자기 탓이다 싶은 녀석 더 있나?”

마희희와 대미미가 각자 우물쭈물거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제 탓은…… 으음 아니지만……. 제가 좁으니 옆으로 비켜달라고 말했어요.”

“주해를 깨우지 못한 게 제 탓인 것 같아요…….”

두 사람은 더듬거리면서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소호뿐이다.

철표 교관이 소호를 응시하자, 소호는 땀범벅이 된 채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었어?”

옆을 보며 어리둥절해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대미미가 속닥거리며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소호는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다가 탄성을 내뱉었다.

“백호방이 쌈박질을 하긴 했지만 서로 감싸는 모습은 보기 좋군.”

철표 교관은 다행이 만족스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수업을 방해했으니 벌을 내리겠다. 어차피 오늘은 신입생들이 평가를 받는 날이다. 너희 모두, 그곳에서 삼등 이내에 들어오도록.”

“예?”

마희희를 제외하곤 모두가 그게 뭔지도 모르는 분위기였다. 옆에서 백호방 선배들이 안절부절 못하며 당황해했다. 신입생 아이들은 뭔가 숨겨진 게 있다는 걸 직감했다.

“간단한 이야기다. 일단 너희가 통과한 시험 종류 별로 모여 봐.”

철표 교관은 살짝 즐거운 듯한 모습을 소호를 보며 말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