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60화 (189/686)

3권 10화

제11장 세 명의 신인(新人)(4)

“말도…… 안 돼.”

석숭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잘 단련된 육체에서, 뛰어난 힘이 나오는 법이다. 저런 연약한 몸으론 큰 힘을 낼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건 불변의 진리였고, 지금껏 석숭이 살아온 삶의 철학이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는 것이다.

“일학년 여자아이가…… 십급이라니.”

그는 몇 번이나 자신의 눈을 의심해 보았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단단한 청석 바닥은 갈라져 있었다.

건양자가 만든 기관은 열 개의 철판을 모두 접은 채 항복의 뜻을 표했다.

지금껏 어떤 신입생이 이런 결과를 냈던가?

개관 이래 최초일 거라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저 애들은 아무것도 몰라.’

석숭은 지금 함성을 지르고 있는 소년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우상으로 섬기는 건 쉽다. 허나 그래서는 눈앞의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얘는 누구야?’

겉으로는 순수하고 여성스러운 모습의 소녀 대미미.

석숭은 불가사의한 신입생을 보며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

무산학관 본관의 상층부.

마치 고급 객잔처럼 잘 꾸며진 공간에서, 평소에 친분이 있던 세 명의 교관이 차와 함께 담소를 나눴다.

세 사람은 모두 기분이 좋아 보였다. 최근에 들어온 신입생들이 그들에게 즐거움을 준 것이다.

“지금쯤 두 번째 시험을 치르고 있겠는걸?”

지 시험 담당관 제갈승조가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말했다. 길쭉한 눈매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서 흥분이 느껴졌다.

“후후, 철표. 중걸. 이번 아이들은 괜찮아. 아주 괜찮다고. 올해의 축제는 아주 즐거울 것이네. 분명해.”

“네가 그렇게까지 인정하는 건 처음 보는군.”

철표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말했다.

“무림맹에서 넌 언제나 지루해 했었지. 거기선 인재가 없다고 항상 불평했었는데……. 이번엔 다른 건가?”

“달라. 아주 다르지.”

제갈승조는 흐뭇한 얼굴이었다.

마치 늦둥이 딸을 자랑하는 아버지 같았다.

“가르칠 만한 녀석들이 나타났어. 특히 수석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는 제법이야. 사고의 깊이가 깊고, 정황을 파악하는 눈도 지니고 있어. 잘만 가르치면 쓸 만한 군사가 될 거야.”

“그때 봤던 그 창백한 병자 같던 소년 말이냐?”

“흐음, 그러고 보니 네놈이 와서 봤었지? 그래. 그 아이다.”

“그 약골이 그 정도로 머리가 좋다고?”

거구의 사내, 중걸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흔히 말하는 그 뭐냐. 네 살 때 사서삼경을 때는 수준의 천재냐?”

“뭐어?”

제갈승조는 코웃음 쳤다.

“네가 생각하는 천재란 건 그런 거냐? 평생 쓰지도 않는 경전 따윌 달달 외우는 거?”

“보통 그렇게 말하지 않나?”

중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각진 얼굴을 갸웃거렸다.

“사람들은 사서삼경을 네 살에 뗐니, 다섯 살에 뗐니. 그런 걸로 천재라 말하던데?”

“뭘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다. 암기력 따위가 뭐 대수라고.”

“그럼 그게 별거 아니야?”

“그래.”

제갈승조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이 글을 쓰는 이유가 뭔데?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냐. 즉, 책만 잘 보관하면 사서삼경이나 오경서니 하는 것들은 딱히 외울 필요가 없단 말이다. 더 중요한 건, 그런 정보들을 어디에,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능력이야. 그런 건 쉽게 길러지지 않는 ‘진짜’ 재능이라고.”

“그렇게 들으니. 그럴듯한데?”

“그럴듯한 게 아니라. 진실이 그렇다. 외우는 건 곁다리지.”

제갈승조는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과거 시험을 관리하는 인간이 고지식한 유학자라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이야. 공자 왈 맹자 왈 해 봐야 평생 쓸모없다. 물론 어릴 적의 도덕성과 인성을 기르는 데는 중요하지만, 정무(政務)능력과는 전혀 관계없지 않나.”

제갈승조는 열변을 토하다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크흠, 아무튼, 이번 애들은 제법 뛰어나서 곧바로 전략 수업을 시작할까 하고 있다.”

“호오?”

철표가 흥미를 표했다.

본래부터 지 시험장 출신들은 몇 명 안 되니 선생의 재량껏 가르쳐 왔지만, 그 정도로 앞서나가는 건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삼 년 차부터 배우는 걸 벌써 가르치겠다고?”

“그럴 만한 아이들이니까.”

“그 정도였나……!”

“너희는 어떻지? 듣자 하니 이번에 체 시험과 용 시험 합격자들도 괜찮다던데.”

중걸이 기다렸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하핫! 당연하지. 백 년에 한번 볼까 말까 한 아이가 나타났다고!”

제갈승조가 눈살을 팍 찌푸렸다.

“백 년에 한번?”

“뭐야? 그 얼굴은. 내 눈을 못 믿는 거냐?”

“재작년에도 비슷한 말을 했으니까 말이지.”

중걸은 기분나빠하지 않고 껄껄 웃었다.

“그야 태산이 녀석도 대단한 재능이니까. 그런데 이번엔 다르다. 내 장담하지. 내 평생 살면서 보지 못했던 전무후무한 재능이야.”

재갈승조는 그제야 흥미를 가졌다.

“전무후무하다고? 그 말은 네놈보다도 대단하단 말이렸다?”

“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된다. 그게 대단한 점이야.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재능으로만 따지면 우리 관장님 수준이다.”

“호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산을 뽑고 기운이 천하를 뒤덮는 다는 말은 가면철왕 철우에게 항상 꼬릿말처럼 따라다니는 말이었다.

요즘은 힘에 있어선 천하제일이라는 말도 공공연히 나오는 상황인 것이다.

‘이 녀석이 미친 것이든. 아니면 그 정도로 대단하든.’

제갈승조는 어느 쪽이든 보통 일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흐흐, 네가 그 아이의 외모를 직접 보고 놀랄 생각을 하니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구나.”

중걸은 참지 못하고 호탕하게 웃어댔다.

“……도대체 얼마나 징그럽게 생겼을지 걱정된다.”

“후하하핫!”

제갈승조는 타박을 줘도 오히려 웃기만 하는 중걸의 모습에 더더욱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편,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조용히 차 맛을 음미하던 철표가 툭 던지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너희 둘. 시험관에게 귀띔은 해 주었나?”

중걸과 제갈승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끔뻑거렸다.

“음?”

“시험관에게? 왜?”

철표는 굳은 얼굴로 책망의 눈길을 보냈다.

“당연히 해야 하지 않나. 듣자 하니 너희 둘도 대단한 인재들이 들어온 것 같은데. 시험관이 미리 알고 신경을 쓰지 않으면 시험관 쪽이든 학생들 쪽이든 의도치 않은 소란이 일어날 수도…….”

철표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새 제갈승조와 중걸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히죽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 그랬군.”

“흐흐흐.”

“후훗.”

철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재능 있는 아이들을 충격적으로 등장시켜서 관심을 끌겠다? 하긴 너희가 할 만한 생각이군.”

“흐하핫 어쩔 수 없었다고.”

중걸이 먼저 가슴을 두드리며 인정했다.

“그런 건 세게 터뜨려서 놀래 줘야 제 맛이지. 게다가 요즘 석숭 녀석도 그렇고. 선배 녀석들이 좀 나태해진 것 같아서 말이야. 아마 이번 일이 좋은 자극제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시험에 지장은 없겠나?”

“없어, 없어. 그 아이는 특별한 취급이라서. 결과가 얼마나 충격적이든 다른 놈들은 함성이나 지르면서 좋아할 거야.”

중걸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용 시험자들의 호걸 성향을 고려하면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았다. 옆에 있던 제갈승조도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지 시험 합격자들은 하나 같이 오만해. 밖에서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우니 자기중심적이기도 하고.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면서 실력을 높여나가는 법을 배워야 돼. 그러려면…… 우선 상대를 인정하는 게 먼저란 말이지.”

중걸과 제갈승조가 언제 자기들이 싸웠냐는 듯한 마음 한뜻으로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찍은 아이가 얼마나 주목을 받을지 기대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 만큼 들었지만 여전히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린애 같은 면을 갖고 있는 것이다.

“훗.”

철표는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무림맹의 동기이자 교관으로서 계속 함께하고 있는 중걸과 제갈승조는 철표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그는 두 사람의 심정을 이해했지만, 한편으론 아이들이 걱정되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둬야겠군.’

뛰어난 재능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세상은 아이들 만큼 순수하지 않고, 전래동화처럼 행복한 결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철표는 지금껏 뛰어난 재능이 주변의 불우한 환경 때문에 바닥에 처박히는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봐 온 것이다.

“흐음.”

철표는 찻물을 들이키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수석 교관으로서 고민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

섭주해는 곰곰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태어나서 십이 년.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할 만큼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특이한 생활을 하며 특별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

섭주해는 총명한 아이였다.

자신의 삶이 보편적인 ‘소년’의 삶과는 다르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보통 소년들은, 귀신에 들리거나 무림의 전대고수들로만 구성된 마을에서 살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머리가 좋은 것도 이럴 때는 안 좋았다.

섭주해는 마을 밖의 다른 소년들과는 다른, 자신의 지적 능력에 괴로워했다.

그 때문에 절망도 많이 했고, 자신은 왜 평범한 삶을 살 수 없는지 고민도 했었다.

몰론 소호라는 ‘마음 속 기둥’을 만난 건 너무나 행복한 일이지만, 스스로에 대한 고민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에게 평범치 못한 인생을 선물한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했고, 자신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헌데 무산학관에 들어오고 나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는데, 알고 보니 생각보다 비슷한 삶을 사는 아이들도 많았던 것이다.

이 세상엔 머리 좋은 아이들이 많다.

특이한 삶을 사는 아이들도 많다.

다들 서로 다른 괴로움을 품 안에 안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섭주해는 십이 세가 된 여름에 깨닫게 된 것이다.

“야, 너 딴 생각하지?”

섭주해는 상념을 멈추고 정면에 있는 심술궂은 인상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눈썹 위에서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퉁퉁한 소년이었다.

온몸이 둥글둥글하다는 점에서 마희희와 비슷하지만, 부루퉁한 입매 때문일까.

좀 더 못된 인상이었다. 한번 약점을 잡으면 죽을 때까지 놓지 않을 것 같은 집요함이 있는 소년이었다.

“하여간 이래서 어린 애들은 안 된다니까. 집중을 못 해. 집중을. 너 내가 만만하냐? 시험에 집중해. 건양자가 만든 시험이라니까?”

소년의 이름은 고진명.

주작방 출신이며 지 시험의 시험관이었다.

섭주해는 멍하니 고진명과 그의 사이에 있는 커다란 장기판을 바라보았다.

‘아, 시험 치는 중이었지.’

섭주해는 그제야 기억을 떠올렸다.

장기판은 일반 장기와 비슷한 것 같은데 졸이 없고 장수만 있었다.

기관 장치는 없었다.

있는 거라곤 건양자라는 사람이 만든 기보(棋譜)뿐인데, 고진명의 말로는 기보 자체가 시험이라고 했다.

기보대로 상황을 배치하고, 가장 합리적인 수를 찾는 시험이다. 난이도는 일(一)에서 시작해서 십(十)까지 올라가는 구조였고, 지금은 일(一)이 막 시작된 찰나다.

‘답은…….’

섭주해는 장기말 하나를 옆으로 옮겼다.

사실 아까 장기말을 배열할 때부터 알았던 답이다.

“호오?”

고진명은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뭐야, 할 줄 알잖아?”

“우연입니다.”

섭주해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실력을 다 드러내 보이는 건 치기 어린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기에 적당히 감추는 것도 필요했다.

“흐음?”

고진명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섭주해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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