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61화 (190/686)

3권 11화

제11장 세 명의 신인(新人)(5)

“장기라는 건 말이야. 싸움을 이기기 위해 정해진 정석이 있거든? 경험이 없으면 그 정석이 안 보이니까 초짜들은 감을 못 잡는다 이거야.”

고진명은 툭툭 말을 내뱉으며 기보에 적힌 대로 장기말을 배열했다.

“정말로 장기는 처음이야?”

“네.”

섭주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장기는 처음이었다.

다만 바둑은 꽤나 수준급으로 두었었기에 수 싸움이 익숙할 뿐이다.

“그래? 대단하네. 재능이 있는걸?”

“……감사합니다.”

섭주해는 시험보다, 성격이 삐딱한 시험관을 상대하는 게 더 까다롭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옆을 돌아보자 마희희와 윤지관이 장기판을 넘겨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특히 마희희는 매우 즐거워했다. 평소에도 장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훈수는 안 돼.”

“그런 짓 안 해요.”

마희희는 평소처럼 냉담하게 답하면서도, 눈빛만큼은 뼈다귀를 본 강아지처럼 들떠 있다.

이내 두 번째 시험이 시작되었고, 섭주해는 처음과 비슷한 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답을 내려 기마대를 움직였다.

“정답. 또 맞혔네?”

“다행이네요.”

“이번에도 우연이야?”

“네.”

시험이 거듭될수록 고진명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어찌 보면 초조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침내 다섯 번째.

유난히 표정이 굳어 있는 고진명을 앞에 두고 섭주해는 조용히 시험에 집중했다.

평소대로라면 곧바로 답이 나왔을 테지만, 이번엔 마(馬)와 차(車)가 난마(亂麻)로 얽혀 있는 중앙 전장에서 따로 동떨어져 있는 상(象)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상은 상당히 뒤쪽에 위치해 있었다.

대충 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자세히 보면 마치 암살자가 뒤에서 언제 튀어나올지 기회만 엿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지금까지 정정당당하게 압도하던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섭주해는 본능적으로 의심스러움을 느꼈다.

‘뭔가 이상해. 지금까지의 기보와 분위기가 달라.’

원래 기사(碁師)들에게는 자신만의 방식이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평상시의 습관이랄까.

졸(卒)하나의 움직임에도 본인의 성격이 묻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일부러 방심을 노려서 생뚱맞은 공격을 하기도 하지만, 이번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마치 기사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지 않은가.

‘건양자라는 분의 노림수? 아니면……?’

섭주해는 고진명의 눈이 음습하게 번뜩이는 것을 확인했다.

‘이건 아마…….’

섭주해는 묵묵히 속으로 결정을 내리고, 가장 전면에서 싸우던 기마대(馬)를 전차부대(車)로부터 탈출시켰다.

‘탁’ 하고 장기말을 내려놓자마자 고진명이 탄성을 내뱉었다.

“하! 틀렸어!”

고진명은 즐겁다는 듯이 이죽이죽 웃었다.

“마를 그리로 피하면, 대신에 네 차(車)가 두 수 안에 날아간다고.”

고진명이 자신의 차를 움직여 마를 가로막자, 이젠 섭주해의 차가 날아갈 위기에 처해 버렸다.

“…….”

섭주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진명의 얼굴에서 승리의 빛이 감돌았다.

“끝이다. 자. 네 등급은 오…….”

“잠시만요.”

등급이 선언되기 직전, 마희희가 나섰다.

“이거 진짜 기보대로인거 맞아요?”

“……무슨 말이야?”

“너무 다르잖아요? 뻔히 보이는 암살수라니. 시험용 기보를 만들어 낸 장기의 달인이 쓸 만한 수가 아닌데요?”

마희희의 말투는 언제나 그랬듯 직설적이었다.

고진명이 분노와 당황이 섞여서 입을 뻐끔거렸다.

“무슨 말이야? 당연히 기보대로지.”

“확실해요? 기보에 이렇게 표시되어 있어요?”

“그래!”

마희희는 확신한 듯 허리에 손을 올리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보여 주세요. 못 믿겠으니까.”

“뭐?”

고진명이 벌떡 일어섰다.

덩치가 큰 소년이 일어나니 위압감이 상당했다.

“이게 미쳤나. 신입생이 뭘 안다고 나서? 나서길?”

“신입생이라도 알 건 다 알아요.”

“이게 끝까지! 확!”

고진명이 잘못 생각한 게 있다면, 마희희가 위협에 굴복해서 숙이고 들어올 거라 생각했다는 점이다.

현실은 정 반대였다.

“뭐어?”

직접적인 위협이 가해지자 마희희의 눈빛은 더더욱 불타올랐다.

“이게 웃기고 앉았네. 보자보자 하니까? 야! 아 글쎄. 비겁한 장난질을 한 게 아닌가 의심스러우니까 기보나 내놓으라고!”

산중지왕 호랑이가 여자로 태어나면 이러할까.

허리에 손을 얹고 가슴은 쭉 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고진명을 압도했다.

고진명은 들어 올렸던 손바닥을 슬그머니 내리며 기가 죽어 버렸다.

“뭐, 뭘 내놔?”

“내놔! 기보!”

“무, 무슨 소리야! 안 돼! 시험자가 어디서 기보를 보려고 해!”

“건양자는 뛰어난 사람이라서 미리 여러 종류의 기보를 만들어뒀다며! 어차피 난 똑같은 시험을 안 볼 거니까 봐도 상관없잖아!”

“……안 되는 건 안 돼!”

고진명은 설마 마희희가 이렇게까지 미친 듯이 물어뜯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옆에서 구경하던 윤지관도, 심지어 당사자인 섭주해마저 놀라고 당황할 만큼 급작스러운 상황 전개였다.

아무리 선배인 양 잘난 척해 봤자 고진명 역시 열네 살의 소년에 불과하다.

마희희의 독기에 질려서 우물쭈물하며 완전히 당황해 버렸다.

“여기 무척 소란스러운데 무슨 일이냐?”

그때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지 시험의 총책임자, 제갈승조가 철표와 중걸을 대동한 채 등장한 것이다.

“제, 제갈 사부.”

고진명은 사색이 되며 당황했다.

제갈승조는 고진명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다. 게다가 철표와 중걸은 학관 내에서 감히 마주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존재감이 큰 인물들이었다.

“그게 아니고…… 저기…….”

마희희가 대뜸 고진명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이 인간이 우리한테 사기 쳤어요!”

“……!”

그 순간 고진명의 얼굴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

제갈승조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사기를 쳤다? 신입생의 실력을 측정하는 상황에서? 그것도 감독관으로 지정된 선배가?”

“네!”

“말이라는 건 내뱉기는 쉬우나 주워 담기는 힘든 것이다. 다시 묻겠다. 마희희, 지 시험의 시험관 고진명이 너희에게 사기를 친 게 확실해?”

진중해진 제갈승조는 위압적이었지만, 마희희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네. 저는 확신해요.”

“좋다.”

제갈승조는 고진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진명은 우물쭈물하다가 기보를 넘겨주었다.

“흐음.”

제갈승조는 기보를 오랫동안 살펴볼 필요가 없었다. 눈으로 한번 슥 훑더니 곧장 장기판을 바라보고 이내 탄성을 내뱉었다.

“호오?”

제갈승조는 흥미롭다는 듯이 섭주해를 쳐다봤다.

섭주해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고진명.”

“예.”

“상이 기보랑 다르게 한 칸 옆으로 가 있었던 건…… 실수인가?”

“그, 그랬습니까?”

고진명은 자신은 전혀 몰랐다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럴 줄 알았어! 이 사기꾼!”

마희희가 격분하며 소리쳤다.

섭주해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자신이 내야 할 화를 마희희가 나서서 대신 내고 있었다.

“사기꾼이라니! 신입생 계집애야. 말조심 해! 그저 난 착각했을 뿐이야!”

“거짓말 마! 내가 지적까지 했는데 아니라며! 졸을 빼서 말도 몇 개 없는데 그걸 착각해? 그러고도 네가 지 시험 합격자야?”

마희희의 말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반박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이들끼리라면 선배의 권위로 누르기라도 했을 테지만, 지금은 제갈승조도 있었다.

“고진명. 넌 의도적으로 상을 옆으로 배치한 게 아닌가?”

“아뇨! 실수였습니다!”

“그래? 뭐 좋다. 본래 풀이에선 상의 위치는 상관이 없으니까. 일단은 실수였다고 치자.”

제갈승조의 말에 고진명의 얼굴이 환해졌고, 마희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게 지금 말이……!”

“그만. 잠시 기다려라.”

마희희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불만스럽게 팔짱을 꼈다.

한편 제갈승조는 장기판을 가리키며 고진명에게 말했다.

“넌 시험관이다. 그러니 상이 없다고 가정할 때 정답의 의도는 알고 있겠지?”

“예.”

“그럼 정답과 풀이의 의미를 말해 봐라.”

고진명은 짐짓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정답은 마가 아니라 차를 움직이는 겁니다. 전차부대와 기마부대의 기동성을 이용해 얼마나 상대방의 전차부대를 막아 내는가가 핵심입니다.”

“그렇지. 정확하다.”

“감사합니다.”

고진명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마희희의 숨이 더욱 거칠어졌다.

“그런데 섭주해는 마를 움직였다. 그러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두 수 안에 차가 잡힙니다. 외통수로요.”

“한번 해 봐라.”

고진명은 의기양양하게 두 수를 움직였다. 그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차가 묶였습니다.”

고진명의 말대로 장기판 위에선 섭주해의 전차부대가 오도 가도 못 하게 양쪽에서 물려 있었다.

“섭주해.”

“네?”

“네가 생각한 대로 해 봐. 마를 움직였을 땐, 그 뒤를 봤을 것 아니냐?”

“…….”

섭주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차가 있는 곳은 무시한 채, 기마부대를 집어 들고 왕을 향해 전진시켰다.

“어……?”

고진명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깐, 이게 뭐야……?”

고진명은 당황하며 장기판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주르륵 흘러내려 앞섶을 흥건히 적셨다.

“아마 중앙 전장에 집중해서 뒤가 보이지 않았나 보군. 맞지?”

제갈승조의 목소리는 고진명에게 청천벽력처럼 들렸다.

“상이 본래의 위치에 있었다면 앞으로 나가 있는 전차부대를 움직여서 막을 수 있었을 거다. 그렇지? 그런데 상을 한 칸 옆으로 두는 바람에 전차부대가 돌아올 수 없게 길이 막혀 버린 거야.”

“아…….”

“이게, 다 네가 상을 옆으로 한 칸 옮기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다. 본래의 기보대로라면 완벽했을 것을. 네 맘대로 상을 움직이는 바람에 구멍이 생겼고, 이 아이는 그 허점을 공격한 거야. 이젠 왕이 위험해졌잖냐.”

고진명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외통수에 가까웠다.

섭주해는 난감해져서 시선을 피했다.

“너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거다. 핵심은 중앙 전장이니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뒤쪽 병력을 움직여서 위협을 하나 추가해 보자. 그러면 아마 흔들릴 거고 실수를 할지도 몰라. 걸리면 뭐 어때? 어차피 시험과 상관없는 부분을 움직인 거니까. 실수였다고 둘러대면 끝이다.”

제갈승조는 고진명의 심리까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고진명의 안생이 섭주해 만큼이나 창백해졌다.

“네 최고 성적이 칠 급이었지?”

“…예.”

“입관 시험 때는 오 급이었고, 그 뒤에 노력해서 칠 급까지 올렸지. 나는 네 노력을 꽤나 높이 사고 있었어.”

고진명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매사에 엄격한 제갈승조의 칭찬을 처음 듣는 순간이었다.

그게 더욱 고진명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어긋난 자존심은 아군을 죽인다. 명심해라. 이 장기판이 실제 상황이었을 경우. 넌 방금 전의 그 오만함의 대가로 왕을 잃었다.”

제갈승조는 아찔해져서 비틀거리는 고진명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쯧, 암수를 썼으면 이기기라도 했어야지. 꼴이 그게 뭐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상황이다.

고진명은 고개를 푹 숙였고. 제갈승조는 고진명에게 올해 무산제전 참가를 금한다는 처벌을 내렸다. 신입생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처벌의 무게였다.

“섭주해.”

“예?”

“잘했다. 이제부턴 내가 내는 시험을 풀어 봐라.”

제갈승조는 자신이 시험관이 되어 주겠다며 기보도 보지 않고 장기말을 배치했다.

섭주해는 잔뜩 긴장한 채 시험에 응시했고, 팔 급이라는 선언을 받았다.

***

고진명의 보고를 받은 주작방의 방장, 곽도엽은 참으로 못생긴 청년이었다. 작은 키에 이마가 기형적으로 앞으로 튀어나온 앞짱구. 얼굴의 피부는 짐승 가죽처럼 질겨 보였고 두툼한 주먹코가 너무나 눈에 띄었다.

못생긴 것도 개성이라면 개성이랄까.

한번만 봐도 평생 잊지 못할 외모였다.

곽도엽은 주판을 튕기며 계산하던 장부를 덮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진명을 노려보았다.

“말도 안 되잖냐. 올해 신입생들 수석은 세 명 다 백호방……? 게다가 성적이 십급. 십급. 팔급? 나참. 너무하는구만. 신안 무학대사도 그래. 그런 놈들을 왜 전부다 거기에 몰아놨어?”

그는 생긴 것에 비해 목소리가 매우 맑고 좋았다.

“곽도엽. 이번에 너무 큰 실수를 했어. 무산제전에서 널 잃은 건 손해가 커.”

“미안해, 친구. 내가 안이했어.”

“뭐, 교관님이 갑자기 나타날 줄 어떻게 알았겠냐만……. 그래도 아쉽구만. 이 손해를 어찌 메운다? 세 명의 신인. 세 명의 괴물 같은 신인…….”

생각에 잠긴 곽도엽의 뒤에서 주작방의 상징인 주작기(朱雀旗)가 펄럭였다. 새빨간 천에 황금색 자수로 그려진 주작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그 빚을 받아 내야겠어.”

곽도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진명에게 말했다.

“가자고. 백호방에 가서 손해를 충당해야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