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12화
제12장 미끼(1)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영리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머리가 좋다는 말은 분명 칭찬일 테지만, 소년이 듣는 칭찬에는 항상 ‘그래도’가 붙었다.
‘그래도 머리는 좋잖아.’
‘그래도 머리 하나는 타고 났지.’
마치 커다란 단점이 있는데 머리가 좋으니 그걸 조금이나마 보상해 준다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소년은 도리어 스스로의 단점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머리가 좋다는 건 하늘이 준 선물이자, 또 한편으론 저주였다.
살다 보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게 행복했을 순간이 있는 법이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칼을 가는 주변 사람들의 속내, 뻔히 보이는 거짓말과 위선, 주변을 둘러싼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환경들은 차라리 몰랐다면 행복했을 것들이 많았다.
쇠락한 가문의 자식은 평범한 농민보다 못한 법이다.
이상은 높고, 옛 친구들은 아득히 높은 곳에 있으며, 현실은 가난한 빈민이었다.
하나 소년은 절망하지 않았다.
소년이 타고난 진정한 장점은 두뇌가 아니었다. 소년은 주변의 보기 싫은 것들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는 강단이 있었다.
소년은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들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질색을 할 정도의 못생긴 외모. 거기에 쇠락한 가문의 후계자라는 지위까지 겹쳤지만, 소년은 그 모든 것을 본인의 의지와 능력으로 이겨 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가문 때문에 관직은 힘들 거야. 나에겐 무재(武才)도 없어. 그럼, 남은 건 상재(商材)뿐.’
소년은 자신이 갈 길을 정했고, 화폐의 의미와 돈의 흐름에 관해 매일 고찰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나약한 사람이었다.
가문이 몰락하는 과정의 희생자였기 때문일까. 소년의 아버지는 술에 빠진 채로 살았다. 술은 아픈 기억만 사라지게 만드는 게 아니다.
집안의 마지막 남은 재산인 고서(古書)들이 모조리 팔려 나갈 때, 아버지의 자존심 또한 함께 팔려 나갔다.
다행히 현명했던 소년의 어머니는 아들이 가문의 틀에 갇히지 말고 스스로 하고 싶은 걸 찾아 하길 원했고, 무가(武家)였던 본가(本家)의 마지막 연줄을 동원해, 아들을 무산학관에 입학시켰다.
다행히 무산학관은 소년의 재능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지 시험 차석 합격.
신입생 능력 평가 차석.
최연소 무산제전 금패(金牌) 수상.
주작방의 방장 곽도엽은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
“이번 일은 참으로 유감이야. 사소한 오해와 다툼이 있긴 했지만……. 그 대가로 주작방이 잃은 게 너무 커. 제 이(二)군사 없이 어떻게 무산제전을 치르겠나? 안 그래?”
곽도엽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나긋나긋하면서 부드러워서 설득력이 강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간 금방 넘어가 버릴 만큼 매력적이다.
봉천은 현혹되지 않도록 애써 고개를 저으며 툭 튀어나온 두 눈을 끔뻑거렸다.
“아니지.”
봉천은 여전히 어눌한 목소리였지만 말투만큼은 단호했다.
“사소한 오해라니. 시험관이 시험을 조작하려 했잖아. 그게 어떻게 사소해?”
“고의는 아니었다더군.”
“내가 들은 이야기랑은 달라.”
“그런가? 본인에게 물어보자고. 일부러 그런 건가. 고진명?”
고진명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진심으로 사죄할게. 내 실수였다.”
봉천이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퉁방울처럼 튀어나온 눈이 분노로 흔들렸다.
“……무슨 짓이야?”
“실수에 대한 사죄다.”
고진명은 이마를 바닥에 댄 채 일어나지 않았다.
봉천은 눈살을 찌푸리며 곽도엽을 노려보았다.
곽도엽은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물론 얼굴만큼은 안타까움과 양해를 구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다.
봉천은 이마에서 핏줄이 돋아났다.
주작방의 속내는 짐작이 간다.
하나 이런 식의 일 처리는 반감만 가져올 뿐이다.
“이건…… 이런 식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야. 게다가 제갈 교관님이 따로 벌을 주셨다고 들었는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잘못을 했다면 일단 인정하고 사죄해야 하는 게 기본 아닌가? 주작방은 그렇게 도의가 없는 곳이 아니야.”
“으음.”
봉천은 난감해했다.
사죄가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보여지는 ‘행동’이란 건 매우 중요한 법이다.
고진명은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학생이다. 그런 사람이 오체투지를 하게 만들었으니 백호방 입장에선 앞으로 이번 일을 가지고 트집 잡기란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
“사죄를 안 받아 줄 건가?”
곽도엽이 부드럽게 웃으며 되묻는다.
봉천이 고민에 빠진 사이, 보다 못한 철웅이 나섰다.
“주작방도 너무하는구만. 원래 대의를 위해 학생 개인의 자존심을 박살 내고 그러나? 엉? 일을 무마시키기 위해 주작방의 한 명을 희생양으로 내몰고 그러냔 말이야.”
“그럴 리가. 이 친구가 홀로 생각하고 결정한 일이라네.”
“하핫, 홀로 생각했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고진명이 스스로 무릎을 꿇겠다고 했다고?”
철웅의 말투는 사뭇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불끈거리는 어깨의 근육, 호랑이처럼 강렬한 눈빛은 흡사 가면철왕 철우를 떠올리게 만든다.
하나 곽도엽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태연히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틀렸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고진명?”
고진명은 이마를 땅에 댄 채 잠시 침묵했다. 그는 귓바퀴가 발갛게 달아오른 채로 고개를 들었다.
의외로 그의 얼굴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럴 리가. 난 내 스스로 결정을 내렸어.”
“흥.”
창백하기까지 한 얼굴에 시뻘겋게 달아오른 귀.
철웅은 코웃음 쳤다.
“못 봐 주겠군. 난 수련이나 할랜다. 봉천. 문제 생기면 옆에 있는 유준이랑 상의해.”
철웅은 분기탱천한 얼굴로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방안에는 백호방 대표로 앉아 있는 봉천과 유준, 주작방 대표로 앉아 있는 곽도엽과 고진명만이 남았다.
“봉천. 사과를 받아 주겠어?”
“…….”
봉천은 드물게 사나운 눈빛으로 곽도엽을 한번 노려본 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알겠다. 백호방은 주작방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관대한 처사에 감사하지.”
곽도엽은 씩 웃으며 양손을 모아 짧게 포권을 취했다.
툭 튀어나온 짱구 이마. 낮은 콧대 위로 자그마한 눈이 영민하게 빛났다.
고진명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고, 태연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곽도엽의 옆에 제대로 앉았다. 그의 얼굴에선 신입생들을 상대할 때와 같은 오만함이 보이지 않았다.
“자, 그럼 다시 이야기를 시작할까? 기숙사의 방장 대 방장으로 우린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지?”
“무산제전 이야기야?”
“물론, 우리가 만나서 할 이야기는 그것뿐이지.”
봉천은 씁쓸한 얼굴로 곽도엽을 응시했다.
“사과……를 받아들이자마자 그 이야기야?”
“갚을 건 갚아야 하지 않겠나? 어떤 일이든 계산은 확실해야하는 법이잖나.”
곽도엽은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와 동시에 품 안에서 손바닥만 한 주판을 하나 꺼내 손가락으로 튕겼다. 손익 계산을 할 때의 곽도엽의 습관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올해는 어떻게 할 건가? 백호방은 당연히 우리 편이겠지?”
“……글쎄.”
“글쎄라니? 그럼 안 되지.”
곽도엽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지만, 눈빛이 싸늘하다.
“작년에 우리 검패를 빼앗아 간 게 누구 때문이었나? 우린 현무방과 전면 대결을 해도 이길 자신과 준비가 되어 있었어. 옆에서 활약한 백호방만 아니었다면 우린 검패를 지켰고, 청룡방 다음으로 강한 이등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거야. 유준,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대답해 봐. 내 말이 틀린가?”
입을 다문 채 굳어져 있는 봉천.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속내를 알 수 없는 무표정을 고수하는 유준이다.
유준은 별로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네 말이 틀리지 않아. 우리가 현무방을 돕지 않았다면 주작방은, 작년에 본래 보유하고 있던 세 개의 검패를 모두 지켜 냈을 것이다.”
“역시 냉철하군. 무산학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승부사다워.”
곽도엽의 시선이 다시 봉천에게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서 득의양양한 기운이 퍼지려는 찰나.
“하지만.”
“음?”
“그렇다고 해서 올해 우리가 주작방을 도와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작년은 작년 일. 올해는 올해의 일이다. 올해의 일은 올해의 방장이 결정하는 게 맞는 것이겠지.”
처음으로 곽도엽이 조금 당황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유준?”
“물론.”
허공에서 유준과 곽도엽의 시선이 치열하게 맞부딪쳤다.
물론 유준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기 싸움은 주변을 싸늘하게 바꿔 버렸다.
“우리들 사신방 사이엔 암묵적인 조약이 있었지.”
“…….”
“백호방은 숫자가 적으니 대국(大國)의 입장에서 공격하지 않는다. 단, 백호방은 대국들 중 약한 쪽을 도와 힘의 균형을 맞춘다.”
곽도엽의 손이 ‘탁’ 하고 튕길 때마다 주판알이 하나씩 올라갔다.
“현재의 검패는 청룡방이 셋, 현무방이 셋. 우리 주작방이 둘. 올해도 검패가 하나뿐인 백호방은 당연히 우리 주작방과 연합해야 할 차례일 터. 그런데도 굳이 어려운 길을 가겠다면……. 너희가 먼저 조약을 파기한 것이니 우리가 너희를 공격해도 된다, 유준. 그것도 알고 있는 것 맞나?”
주작방의 입장에서 청룡방이나 현무방이 아니라, 백호방이 가진 검패만을 노리는 게 훨씬 편한 건 당연하다.
“물론.”
“흥미롭군. 무엇이 너희를 그렇게나 자신만만하게 만들지?”
곽도엽은 어이가 없어하면서도 동시에 조금 흥미로워 하고 있었다.
유준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봉천을 힐끗 바라봤다.
봉천은 어느새 무거운 표정을 벗어 던진 채 응원하듯 허허 웃고 있었다.
“올해엔 꽤 괜찮은 신입생들이 들어왔다. 그뿐이다.”
“……신입생?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그래.”
곽도엽은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런가? 알겠다. 봉천, 사흘 간 생각할 시간을 주지. 우리 주작방으로, 직접 찾아와서 답을 줘. 만약 그날까지 답이 오지 않는다면…….”
곽도엽은 손짓을 했고, 고진명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곽도엽의 뒤를 따랐다.
왜소한 몸, 추레한 몰골의 곽도엽이다.
하나 입고 있는 붉은색 비단 장포 뒤에 새겨진 황금색 주작문양이 번쩍거리며 빛난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덩치가 큰 소년인 고진명이 곽도엽의 시종처럼 보였다. 곽도엽의 존재감은 그 정도로 거대했다.
“장담하지. 백호방은 모조리 불탈 것이야.”
***
본관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소호와 다른 백호방의 신입생들은 봉천이 얼굴을 모르는 두 사람과 함께 걸어 나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봉천은 심각한 얼굴이었다.
그는 두 사람 중 개성이 강하게 생긴 청년과 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봉천은 점점 더 신중하고 심각한 표정이 되어갔다.
‘무슨 일일까?’
소호가 그들에게 좀 더 다가가 볼까 고민하는 사이, 쿵쿵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진한 땀 냄새가 ‘훅’ 하고 밀려들었다.
“참 못생겼지?”
스리슬쩍 다가온 것은 철웅이었다.
언제나처럼 땀투성이에 온몸에 철 조각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주변을 한 바퀴 뛰고 온 모양이었다.
특이한 일은 아니다.
수련(修鍊)에 미쳐 있는 바보(痴)라고 해서 ‘수치(修痴)’라고까지 불리는 사람이니까.
“음, 특이하긴 하네요.”
“뭐어? 하핫! 특이하긴 무슨. 못생긴 건 못생긴 거야, 봐. 이마가 툭 튀어나와서 공자처럼 생기지 않았어?”
소호는 예전에 봤던 공자의 초상화를 떠올린 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철웅의 말이 맞았다.
왜 진작 떠올리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그는 공자와 닮아 있었다.
“그런데 말이지. 저 공자처럼 생긴 사람이 우리 학관의 학생들 중, 가장 돈이 많아.”
“돈이요?”
소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이제껏 평생 산속에 살아서일까. 소호는 돈이라는 것의 중요성을 아직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