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64화 (193/686)

3권 14화

제12장 미끼(3)

“동료를 모으고? 그 다음엔?”

소호가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힘을 길러야죠.”

“힘? 무공?”

“으음, 무공도 중요하지만, 그보단 무산학관 내에서 ‘이름’을 떨쳐야 해요.”

소호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어 본 뒤 짐짓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했다.

“아!”

소호가 탄성을 내뱉었다.

“셋 째 할아버지가 그러셨어. 무림인은 처음엔 명성을 떨쳐야한다고. 명성을 떨친 고수와, 명성이 없는 고수에 대한 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래. 그 이야기를 하는 거지?”

“네, 바로 그거에요. 소호 형.”

“히힛.”

소호의 두 눈이 앞날에 대한 기대와 즐거움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좋아. 그럼 이름을 떨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간단해요. 앞으로 딱 두 가지만 지키면 됩니다.”

섭주해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올렸다.

“하나, 앞으로 모든 수업에서 최고의 성적을 올린다.”

“……응?”

“둘, 앞으로 하는 모든 대결에서 절대로 지지 않는다.”

“야야, 주해야. 잠깐만.”

소호는 난감한 얼굴로 손 사레를 쳤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저기, 인정하긴 싫지만……. 난 이미 유준 선배한테 졌어.”

“졌다고요? 제가 본 바로는 소호 형이 이기던데요.”

“……봤었어?”

“네. 그때 백호방 위의 비밀 첨탑에서 지켜봤어요.”

소호는 입을 살짝 삐쭉거리며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니야, 졌어. 그때 그건 유준 선배가 봐준 거야. 그다음에 살기를 드러내니까 그 선배…… 엄청 강해지더라.”

“흐음?”

섭주해는 소호의 얼굴을 유심히 응시하다가 되물었다.

“정말로요?”

“응?”

“소호 형, 정말로 자신이 졌다고 생각하나요?”

소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응. 진 건, 진 거지.”

“절망하고 분노했나요? 도저히 못 이길 것 같다고 생각해서 자존심이 상했나요?”

“그건…….”

소호는 잠시 고민해 보았다.

자신은 정말로 절망하고 분노했던가.

“음, 물론 자존심 상한 건 사실이야.”

“절망하진 않았죠?”

“……응.”

섭주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 말은, 좀 더 연습하면 나중엔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말로 들리네요.”

“야야, 유준 선배는 굉장히 강해.”

“저쪽이 죽일 각오로 살기를 뿜으면서 달려들면 누구든 강한 법이에요. 소호 형도 살기를 내뿜는다면? 글쎄요. 제가 보기엔 소호 형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요?”

소호는 섭주해가, 그때의 유준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살기를 내뿜는 유준은 정말로 귀신처럼 강했으니까.

속도, 힘, 무공의 숙련도.

어느 하나도 부족함이 없었다. 거기에 급소를 철저히 노리는 살기까지 더해졌으니 금상첨화(錦上添花)다.

그건 수련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소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누군가가 자신을 인정해 준다는 건 과히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 알았어. 노력해 볼게.”

소호는 항복하듯 두 손을 들어 올렸고, 섭주해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소호 오라버니는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옆에서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는 소녀가 한 명.

소호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참으로 많은 것을 바라는 동생들이었다.

***

모두가 공통으로 하는 태극권 시연을 제외하면 무산학관에서 대부분의 수업은 두 종류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체 시험과 용 시험을 통해 들어온 일명 ‘무투파’ 학생들의 무공 수업.

다른 하나는 지 시험을 통해 들어온 ‘두뇌파’ 학생들의 정신 수양과 군사 수업이다.

어느 쪽이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백호방 최고참인 곽동주의 말에 의하면 두뇌파는 두뇌파대로, 무투파는 무투파대로 힘든 점이 있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반갑다, 신입생들. 나는 앞으로 너희에게 각종 외공의 수련법과 그 파훼법들을 강의할 황보정이라고 한다.”

육 척 장신.

보통 사람들보다 반 자 정도 큰 키에 야생동물처럼 탄탄한 근육을 지닌 사내였다.

가면철왕 철우처럼 비상식적일 만큼 커다란 덩치는 아니었으나 그는 분명 일반인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크고 탄탄한 육신을 지닌 사내였다.

꽤나 긴 머리는 뒤에서 하나로 당겨 묶었고, 양 갈래로 짧게 기른 콧수염은 상당히 잘 어울렸다. 게다가 팔꿈치 부근까지 걷어 놓은 소매 밑에서는 단단한 근육이 꿈틀거렸다.

“파권……!”

황보정의 별호가 꽤나 유명한지 신입생들 중 몇 명이 신음을 흘리듯이 중얼거렸다.

“나를 아는 사람도 있나? 어쨌거나 좋다. 너희는 첫 정규 수업으로 나를 만났으니, 무산학관의 무론(武論)에 대해 설명해 주마. 무산학관은 황실에서 허가한 첫 번째 무림학관으로써 현재 무림강호에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난립해 있는 온갖 무림방파들의 무공을 연구하고 통합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연구 결과를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너희에게 전수할 것이다. 여기까지 질문 있나?”

황보정은 강렬한 눈빛으로 신입생들을 쭉 훑어보았고, 아무도 손을 들고 질문하지 않았다.

“없군. 하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지? 무공을 하나의 학문(學文)으로 봤을 때 각 무림문파들이 자신들의 비전(秘傳)들을 내놓고 공유하면 무학의 발전이 지금보다 훨씬 빨라졌을 것이다. 헌데 지금까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어. 왜? 비법을 독점하고 그걸 통해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마치 신의 화타가 조조에게 의학서를 바치지 않았을 때와 같지. 그러니 중구난방으로 각자 방법이 다르고, 더 이상 발전도 안 되는 것이야. 이건 잘못되었어. 좀 더 효율적인 방법과, 그 능력에 대한 공공의 감시가 필요하다.”

황보정은 ‘무산학관’이 설립된 배경과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무림문파들이 무공의 비기들을 자신들만 보유한 게 잘못되었다는 말이었다.

신입생 아이들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이들은 관부 출신, 혹은 명문 무가(武家) 출신들이 많았기에 그 말에 어느 정도는 공감을, 어느 정도는 우려와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힘에는 책임이 필요하잖아요?”

신입생들 중 한 명이 질문을 던졌다.

“사부들이 사도(邪道)에 빠지지 않을 인재를 찾아서 무공을 전수하는 게 그리 나빠 보이지만은 않은데요? 귀한 능력이 악인에게 넘어가면 위험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조심하는 것 아닌가요?”

“좋은 지적이다. 하나 그렇게 해서 결과가 어땠지? 지금은 무림강호에 악인이 없나? 무공을 익힌 강자들은 선인(善人)뿐인가?”

질문을 한 신입생이 침묵에 빠졌다.

다른 신입생들도 깊이 생각해 보았다.

온갖 악행을 일삼는 흑도(黑道)의 문파들과 사이한 종교를 믿는 사파들, 민생을 혼란에 빠뜨리는 산적 떼들까지.

무공을 누구에게 전수해야 할지 신중하게 선별해야 한다는 것치곤 이미 악인들이 너무 많았다.

“난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원의 잔당들이 ‘강호관직론’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했을 때 무림강호의 반응이 어땠는지 아나? 아주 치가 떨렸지. 숨어 있던 온갖 무림방파들이 조그만 권력이라도 얻어 보겠다고 우루루 쏟아져 나왔었어. 아! 여기에 강호관직론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겠군. 간단히 말하자면 이거다. 무공이 강할수록 높은 관직에 앉히겠다는 이론이다. 원의 잔당 놈들이 한 말이야. 그때 그놈들의 우두머리는 말도 안 되게 강했어.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지만 다행히, 한때 명제국의 군인이었던 영웅이…… 모든 혼란을 수습했다.”

황보정은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지 아련함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분노에 휩싸였다.

“다행히 결과는 좋았지만 수치스러운 일이다. 일개 무림인들에게 나라가 휘둘리다니. 지금 이 세상은 잘못되어 있어. 악인인 걸 뻔히 아는데도 포졸들이 힘이 없으니 흉악한 무림인을 체포하지 못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진정 백성들을 위한다면 나라에 힘이 있어야지! 관인들이 무림인의 눈치를 봐서야 말이 되는 일인가? 정의를 구현할 힘은 우리 손에 있어야 한다. 그게 무학 발전을 위해서도. 나라의 질서를 위해서도 옳은 일이야!”

황보정의 신념은 확고해서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는 그의 열변에 혼란을 느끼고 고민에 빠진 아이들에게 더더욱 강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기에 무산학관은! 너희와 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서 매일 같이 무학을 연구하고, 무공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항상 고민할 것이다. 그 결과물이 너희를 통해 세상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세상이 바뀌는 것이야. 일개 포졸들도 구대문파의 무공과 맞먹는 무공을 익힌 세상.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이 질서 있게 돌아가지 않겠나?”

아이들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지만, 속속 황보정의 의견에 동의하고 찬동하기 시작했다.

“맞는 말이야. 지금의 관부엔 힘이 더 필요해.”

“관부가 썩으면 그땐 어떻게 해?”

“관부 내에 자정작용을 할 수 있는 기관이 있어. 그들에게 맡기는 게 나아.”

“난 찬성.”

“나도 찬성.”

수군거리던 아이들의 의견이 하나로 일치되어 갔다.

황보정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강의를 이어 나갔다.

“무공에서 가장 먼저 익히는 게 바로 이 외공(外功)이지. 무산학관에서도 현재까지 가장 연구 결과가 좋은 분야 중에 하나다. 자, 그럼 이제 강의를 시작한다. 외공은 기본적으로 육신을 단련하는 모든 과정을 포함한다. 체술과 헷갈리기 쉬운데 체술은 상대방의 반응을 보고, 기술로서 제압해 나가는 ‘동작’ 위주의 무공이다. 하나 외공은 그와 반대지. 우선 ‘몸’을 단단하고, 유연하게 만들어서 기본적인 능력을 끌어 올리는 것이다. 외공엔 공격과 방어가 있다. 공격에는 대표적으로 몸을 단단하게 만듦으로써 공격의 파괴력을 늘리는 우리 황보세가 계열의 단련법이 있다. 흔히 강시술과 비교되곤 하지. 매일 맨손으로 돌과 소나무를 때리면서 익히는 소림사의 쇄비장(碎碑掌)도 외공이다.”

황보정은 미리 준비해 둔 바위로 다가가 빠른 속도로 손바닥을 내뻗었다.

꽈앙!

내공이 들어가지 않는 동작.

순수하게 단련된 육체의 힘만으로 내지른 장법이 커다란 바위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아이들의 입에서 ‘오오!’ 하고 감탄이 흘러나왔다.

“감탄할 것 없다. 너희들도 다 할 수 있는 수준이야.”

황보정은 아이들이 귀여워서 씩 웃었다.

“다음은 방어다. 사실 외공의 꽃이라고 할 수 있지. 사람의 몸은 나약하다. 사실 사람이 죽는데 대단한 파괴력은 필요가 없어. 작은 나무 꼬챙이라도 몸에 제대로 박히면 죽는다. 목뼈나 갈비뼈가 부러지면? 그래도 죽는다. 근처의 내장 기관이 다 상하거든. 즉, 사람이 죽으려면 방법은 무궁무진하게 많다는 거다. 그래서 외공은 사람의 육신을 강화하는 데 목적을 둔다. 매일 갑옷을 입고 살 수는 없으니, 육체 그 자체를 강화해 방어력을 높이자는 것이지. 소림사의 철포삼공(鐵布衫功), 황보세가의 강신술(强身術)이 이에 해당한다. 거기 너. 이름이 뭐지?”

황보정의 지목을 받은 한 소년이 화들짝 놀라며 당황했다.

“조, 조서인이에요.”

“그렇군. 조서인, 너는 주력으로 창을 쓰지?”

“네? 네, 맞아요. 어떻게……?”

“몸을 보면 안다. 넌 저기에 있는 창을 가지고 와라. 뾰족한 녀석으로.”

조서인은 십팔반 병기들이 쭉 늘어서 있는 곳에서 장창을 꺼내 왔다. 황보정은 양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선 채 든든한 목소리로 말했다.

“찔러라.”

“네?”

조서인이 화들짝 놀란 건 당연한 일이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로 찌르라고 할 줄이야.

“괜찮다, 찔러라. 여기. 심장을 찌르는 거다.”

조서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황보정은 자신의 가슴 한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콕 짚기까지 했다.

지켜보던 아이들의 얼굴에 호기심과 두려운 기색이 동시에 떠올랐다.

“으…….”

조서인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창날을 가져다 댔다.

체했을 때 바늘로 손가락을 따는 수준으로 콕 찌르자, 마치 단단한 바위를 찌른 것처럼 반발력이 느껴졌다.

“더 세게 찔러!”

“으앗?”

조서인은 얼떨결에 창을 더 세게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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