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66화 (195/686)

3권 16화

제12장 미끼(5)

“하체를 당해도 죽어.”

문주희는 연홍 교관의 말투를 따라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그렇게 얼굴이 확확 바뀔 수 있지? 내가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챘다니까? 그 여자 아주 무서운 여자야. 주작방 선배들한테 귀띔을 받긴 했는데, 상상 이상이었어. 분명히 숨겨진 모습이 더 있을 거야, 어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으응.”

조서인의 대답에선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홍의 가르침에 혼쭐이 났기 때문이었다. 연홍은 목검을 든 그 순간부터 교습이 끝날 때까지 한 시도 그를 쉬게 해 주지 않았다.

무산학관에서 자체적으로 연구한 ‘기본검술 삼십육형’을 외우고 또 외워서 자다가도 펼칠 수 있게 만드는 게 그녀의 목표라고 했다.

‘죽는 줄 알았다…….’

조서인은 팔다리와 몸 곳곳에 안 쑤시는 부위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피곤한 건 머리였다.

초식을 외우고, 그 대응 초식을 외워야 하니 그 종류만 해도 수백 가지.

나중엔 어떤 초식이, 어떤 방어에 유효한가를 줄줄 외워야 하니 몸보다 머리가 더욱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유용한 경험이었어.’

조서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옆에 있던 문주희의 눈빛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어라? 표정이 좋아 보이네? 수업이 마음에 들었나 봐?”

“응? 으응. 나한테는 꼭 필요한 수업이란 생각이 들어서…….”

“어떤 점이?”

“그동안 난 무공을 익힐 때 항상 혼자 수련했거든. 그래서 초식을 주고받는 게 뭔지 잘 몰랐는데…… 연홍 교관님 덕분에 이제야 뭔지 조금쯤 알게 된 것 같아.”

“직전 제자야? 다른 제자는 없고?”

“우리 아버지가 스승님이셨거든. 아들은 나 혼자뿐이고. 아버지는 아프셔서 대련을 못 하셨어.”

조서인은 쑥스러워 하면서 순박하게 웃었다.

“……흥.”

문주희의 표정이 풀렸다.

“확실히 도움은 되지. 기본 검술 삼십육형은 단점이 없는 무공이래. 명문무파(名門武派)들의 기본공들을 집대성한 작품이라고 들었어.”

“그래?”

“응. 그러니까 제대로 익히는 건 좋아. 뭐, 교관은 마음에 안 들지만.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는 좋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조서인은 여전히 새초롬한 문주희를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문주희가 왜 연홍 교관을 싫어하는지 조서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저기, 넌 주작방에 안 가 봐도 돼?”

“응?”

조서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곧 백호방인데?”

“괜찮아. 놀러가는 거야. 백호방은 다른 기숙사 학생은 출입을 안 시킨다거나 그런 거 아니지?”

“그건 아닐 테지만…… 아니다. 혹시 그런 규칙이 있나?”

조서인은 앞쪽을 바라보았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앞쪽에서 수업을 다 들은 백호방 아이들이 기숙사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럴 리가 있어? 괜찮아. 이참에 기숙사랑 네 방 좀 구경시켜 줘.”

“그, 그래.”

문주희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백호방 아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쟤 있잖아. 이름이 소호랬나?”

“응, 맞아. 소호.”

“쟤는 어떤 애야? 체 시험도 수석이고, 아침에 했던 외공 수련도 마지막까지 다 소화하고, 방금 전의 초식 수련도 한번도 지적 안 당한 건 쟤뿐이잖아?”

“음…….”

조서인은 오늘 있었던 수업들을 쭉 떠올려 보았다.

원래 사람은 누구나 호불호가 있는 법이다.

교관들은 나름대로 공평하게 가르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본인의 생각일 뿐이다.

원래 사랑은 받는 쪽보다, 받지 못하는 쪽이 더 예민하게 알아채는 법 아니던가.

부모도 예쁜 자식이 있고 미운 자식이 있는데, 스승은 오죽할까.

소호를 가르친 뒤 교관들의 눈빛이 하나같이 변하는 모습은 학생들 모두가 알아챘다.

비교적 눈치가 없는 편인 조서인조차 느꼈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무가 출신일까? 아니면 관가 출신? 무산학관에 들어온 걸 보면 누군가의 추천을 받은 건 분명한데. 어느 쪽인지 모르겠어. 저 정도로 재능이 눈에 띄는 걸 보면 쟤 부모님도 대단하겠지?”

조서인은 문주희의 목소리에 담긴 호기심이 처음으로 거슬렸다.

“아냐.”

조서인은 처음으로 문주희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소호는 분명 대단한 아이지만. 부모님과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상관없다.

그래야만 했다.

“그, 그래.”

조서인은 당황하는 문주희를 힐끗 쳐다본 뒤 다시 소호를 응시했다.

소호는 언제나처럼 밝고 천진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호감이 가는 아이지만, 한편으론 문주희처럼 궁금해지긴 한다.

‘소호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을까?’

조서인은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질문을 던졌다.

***

거대한 사두마차에서 내린 부운화는 한적한 관도에 서 있는 흑마를 향해 다가갔다.

흑마는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몸집에 돌덩이 같은 근육이 터질 듯이 부풀어 있는 군마(軍馬)였다. 단출한 안장 뒤에는 간편한 봇짐과 모포가 둘둘 말려서 실려 있었는데, 윤기가 흐르는 꼬리가 흔들릴 때마다 봇짐도 같이 흔들렸다.

“대형.”

부운화는 단정한 관복을 입은 채 공손히 인사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했던가.

최근에 황실에서 지위가 있는 자들은 암묵적으로 부운화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동창과의 정보전, 환관 왕진과의 정치적 암투가 거세지면서 불가피하게 눈에 띄어 얻은 별명이었다.

물론, 그 일인(一人)이 누군가에 대해선 그들과 운화의 생각이 달랐다.

“운화.”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 있던 장기린은 조용히 눈을 뜨고, 마치 자금성의 인공 호수처럼 고요한 눈빛으로 운화를 반겨 주었다.

‘대형은 변하셨어.’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이 장기린의 존재감을 흩어 놓았다.

“휴식 중이셨군요. 조금 이따가 다시 올까요?”

“아니다. 잠시 생각을 했을 뿐이야.”

“결론을 내리셨습니까?”

“음…….”

장기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무래도 성장을 하지 못한 모양이야. 십삼 년 전과 다를 바가 없어.”

“그럴 리가요.”

“아냐. 그때도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피를 봤었는데, 이번에도 그래야 하다니……. 이젠 나라는 사람이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군.”

“……대형.”

부운화는 냉정한 얼굴, 준엄한 눈빛으로 장기린을 대했다.

평소엔 있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내 눈앞에서 황금이 빛나고 있더라도, 남의 것을 빼앗으면 잘못입니다. 천하절색의 미녀가 눈앞에 있더라도, 강제로 범하면 잘못입니다. 잘못은 언제나 뺏는 쪽에 있습니다. 뺏긴 게 잘못이라는 논리는 뺏은 자의 교묘한 변명일 뿐이지요.”

“그래, 그렇긴 하지.”

“악인(惡人)들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들은 남의 것을 탐하고, 그걸 빼앗아 이득을 보는 데 한 치의 주저함도 없습니다. 뱀이 개구리를 삼키듯 당연하게 빼앗습니다. 그걸 막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맞서 싸워야지.”

“바로 그겁니다.”

장기린은 조용히 웃었다.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군. 가르침을 받는 건 오랜만이야.”

“죄송합니다, 대형.”

“……아니. 운화 넌 좋은 스승이 되겠다.”

장기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비스듬히 세워 두었던 커다란 장창(長槍)을 움켜쥐고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긴 세상일은 간단하지. 공격해 오면 지킨다. 장애물이 있으면 부순다.”

산들거리며 불어온 바람이 장기린의 잘려 나간 오른쪽 귀를 드러냈다.

“운화, 말해 줘. 내가 부서야 할 장애물은 어디에 있지?”

묻는 순간 ‘훅’ 하고 뿜어지는 존재감.

폭발하기 직전의 활화산 같은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산들거리는 부드러운 바람 속에 은밀하게 숨어 있었다.

부운화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이거였다.

장기린의 변화.

세상을 오시(傲視)하던 붉은 악귀가 세월의 풍파를 겪고 깨달음을 얻어 인간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습게 보면 망신(亡身)을 당하게 되리라. 붉은 악귀는 사라진 게 아니라, 잠들어 있을 뿐이니까 말이다.

“낙양. 운중로 외곽에 있는 폐장원(閉莊園)입니다.”

부운화는 미리 준비해 둔 약도와 주의 사항이 적힌 서찰을 함께 건네주었다.

“소호가 간 학관이 그 근처 아니던가?”

“맞습니다. 말을 타면 반 각이면 도착할 거리입니다.”

“……뒤처리에 문제없을까?”

“준비해 뒀습니다.”

부운화는 일처리에 있어서 단 한번도 장기린을 실망시킨 적이 없는 동반자였다.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여 고마움을 표했다.

“함께할까요?”

“아니.”

장기린은 서찰을 차근차근 읽어본 뒤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 간다.”

***

“왕진은 왜 안 보이지?”

외팔이 사내, 자이혼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나처럼 하나밖에 없는 팔에는 화려한 가죽 장신구를 잔뜩 걸쳤고, 머리엔 이민족 특유의 띠를 두른 상태였다.

자이혼의 말투와 태도는 언제나 듣는 이의 화를 돋운다.

아니나 다를까. 같은 공간에 있던 거구의 늙은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몽고 달자놈. 그분은 대천문의 문주이시다. 대명제국 황실의 실세이기도 하지. 건방지게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하?”

자이혼은 비웃었다.

“너희의 황실이지, 나의 황실이 아니다.”

“건방진 놈!”

‘쾅’ 하고, 노인이 차돌처럼 단단한 주먹으로 돌바닥을 두드렸다.

“너도 대천문의 일원이지 않느냐. 이 녹림마왕님께서 친히 예의를 가르쳐 줄까?”

“필요에 의해 힘을 합쳤을 뿐. 우린 서로 예의를 차릴 관계가 아니다. 그리고 산적 늙은이에게 ‘예의’를 배울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건방진!”

애초에 녹림마왕 구일호(勾一虎)는 성격이 다혈질이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쓸듯 칼 손잡이를 붙잡으니 자이혼의 눈빛도 날카로워졌다.

“그만하십쇼. 구 대협도 그만 진정하시길.”

대천문 안에서 가장 젊은 청년, 남도화가 각진 얼굴로 짐짓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말렸다.

“우리끼리 싸워선 안 됩니다. 조만간 큰 싸움이 있을 거라고 해서 준비하기 위해 모인 것 아닙니까. 복수의 그날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쳐야죠.”

남도화에게는 강한 설득력이 있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복수’.

그것도 복수를 하기 위해선 그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는 처절한 사람들만 모인 것이 대천문인 것이다.

“큭, 행동 조심해라. 몽고 놈.”

녹림마왕 구일호는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칼에서 손을 뗐다.

“흥.”

자이혼은 덤벼 오면 죽여 버리겠다는 듯, 살기를 마주 내뿜으며 코웃음 쳤다.

남도화는 두 사람을 자리에 앉혀 진정시킨 뒤에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상하긴 하군요. 우리가 다 모인 지 벌써 사흘입니다. 지금껏 우릴 이렇게나 기다리게 만든 적은 없었습니다만…….”

주변의 모든 노인들과, 이번엔 구일호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상기류가 흐르는 건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대천문에 소속된 복수자들은 다들 무림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이었다. 제 아무리 왕진이라도 이렇게나 홀대하며 방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복수가 코앞이라고 들었는데. 마무리를 위해 준비하는 건 아닌지……?”

“허허, 큰일을 하는 사람이니 일이 많겠지요.”

“우리가 이해해 줍시다. 본인은 흑신의에게 칼침을 놓기 위해 이십 년을 기다렸소. 그깟 사흘은 아무것도 아니외다.”

대천문의 무인들 중 나이가 많은 노인들부터 왕진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남도화는 불만스러운 표정 드러났지만 직접 표현하진 않았다.

노인들은 인생의 연륜이 깊지만, 생존 본능에 있어서는 고지식하고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에 대한 차이는 말로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으리들!”

그때 낙양의 장원을 관리하는 하인 한 명이 회의장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가 다급한 얼굴로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장원의 대문 쪽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땅을 뒤흔들고 공기를 터뜨리는 폭음이었다. 대천문의 무인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당장 말하지 못해!”

괜히 소식을 전하려던 하인에게 불똥이 쏟아졌으나, 이미 하인은 굉음에 놀라 바지를 축축이 적시는 탓에 멀쩡히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자연히 그들의 시선은 폭음이 들린 방향으로 직접 쏠릴 수밖에 없었다. 시끄러운 고함과 병장기 소리가, 속으로 불과 셋을 세기도 전에 끝났다.

따각. 따각.

그들에게 들려온 소리는 놀랍게도 말발굽 소리였다.

대천문에 모여 있던 자들 중 절반가량의 얼굴이 금세 굳어졌다.

남도화, 녹림마왕도 마찬가지다.

그중 특히 자이혼의 안색은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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