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17화
제12장 미끼(6)
“악귀다.”
자이혼의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창백한 얼굴과 잔뜩 긴장한 채 부릅뜬 눈에는 야생동물 같은 경계심이 가득했다. 자이혼의 판단은 빨랐다.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후문을 향해 달려갔다.
“잠깐! 자이혼!”
남도화가 붙잡으려 했지만, 자이혼은 알아들을 수 없는 몽고어를 내뱉은 뒤 민첩하게 사라졌다. 남도화가 황망한 얼굴로 그런 자이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그럴 줄 알았다, 멍청이들.’이라는군.”
“예?”
남도화는 몽고어를 해석해 준 녹림마왕을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뭘 그렇게 보나. 내가 몽고어를 알아들으니 이상한가?”
“아, 예.”
“흥. 이 몸은 원나라 시절에도 살아남은 사람이다. 야만스러운 놈들의 말을 할 줄 알아야 살아남던 시절이지. 도의가 뭔지 모르는 짐승 같은 놈들. 난 애초에 그들을 믿은 적도 없다.”
구일호의 분노엔 구원(舊怨)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는 미간을 씰룩거리며 단박에 칼을 뽑았다.
“구 대협?”
“뭘 하나, 애송이. 싸울 준비 해! 상대가 누구든. 일단은 맞서 싸워야지.”
“…….”
남도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주먹을 움켜쥐었다.
역시 연륜은 무시할 게 아니었다.
다혈질에 성급해 보이던 녹림마왕 구일호지만, 정작 목숨을 걸 상황이 되자 냉철한 판단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남도화도 양손에 낀 철갑을 매만지며 전투를 준비했다.
말발굽 소리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먼저 흑색의 군마가 보이고, 그 위에서 비스듬히 빛나는 커다란 철창이 보였다.
한쪽 귀가 없는 사내가 보인 것은 그다음이다.
“흡!”
남도화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무쌍귀?”
대천문에 소속된 노인들 중 한 사람이 광소를 터뜨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 뭉개진 귀. 거대한 흑마에 창! 네놈이 무쌍귀 장기린이군!”
노인은 머리카락과 수염이 모두 하얗게 변했지만, 양팔의 근육만큼은 젊은이 못지않게 탄탄한 사람이었다.
“네놈을 만나기 위해 십 년을 기다렸다! 이노옴! 하늘이 드디어 나에게 기회를 주는구나! 본좌의 이름은 강추화. 네놈이 죽인 삼호방주가 내 아들이니라!”
허름한 옷을 입고 있던 노인의 정체가 밝혀지자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수군거렸다.
“강추화라고? 파강수(破鋼手)말인가?”
“전대고수가 나타나다니……. 천하십대고수에 들어도 손색이 없는 이름이 아닌가?”
강추화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듣자 더욱 당당한 모습으로 외쳤다.
“당장 말에서 내려와라! 가문의 원수인 네놈에게 본좌가 삼호방의 무공을 제대로 보여 주겠다!”
손가락으로 장기린을 척 가리키며 도발하는 그의 모습은 일대영웅처럼 보일 정도다.
활활 불타는 눈빛.
전신에서 뿜어지는 기세는 얼핏 주변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아냐. 저자의 눈은 이미 강추화를 보고 있지 않아.’
남도화는 장기린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고, 이내 그 생각이 사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장기린은 강추화를 힐끗 쳐다본 뒤, 주변에 모여 있는 십여 명의 노인들을 바라보고, 뒤쪽에 있는 남도화와 녹림마왕을 거쳐, 겉보기엔 허름한 폐장원의 전각을 바라보았다.
“은자촌을 노리는 자들이 이런 곳에 숨어 있었던가.”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노옴! 감히 어딜 보고……!”
“당신들의 분노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강추화가 대번에 화를 내려다가 말이 끊겼다. 그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녹색의 강기를 양손에 둘렀으나 차마 덤벼들지 못하고 몸을 움찔거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장기린의 담담한 눈빛이 그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처음엔 합리적인 해결책을 생각해 보았었다. 원한을 해소할 수 있도록 정정당당한 대련을 제의할까 고민도 했다.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면,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해 주면 어떨지 생각해 보기도 했지. 하지만!”
장기린의 손에 들린 장창이 천천히 정면을 향해 움직였다.
“남궁세가의 일을 겪어 보니, 복수에 있어서 그런 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적. 그렇다면 나는 내 가족들이 더 이상 피해를 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싸워서 지킬 것이다.”
장기린의 눈빛이 변한다.
강한 어조, 강한 기백.
마치 공기가 훅 빨려나가듯, 압도적인 존재감이 주변을 집어삼킨다.
“흡?”
여기저기서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도화도 마찬가지다.
장기린이 본신의 힘을 드러낸 순간, 숨이 막혀 왔다.
“은자촌에 원한을 갖고 있다면 덤벼라. 내가 상대해 주겠다.”
푸르륵.
장기린을 태우고 있던 흑마가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뜨거운 콧김을 내뿜었다.
“이 원수!”
파강수 강추화가 발작하듯 뛰쳐나갔다.
툭. 툭. 툭.
땅바닥을 세 번 발로 찬 뒤, 삼호방주보다 더 빛나는 강기를 내뿜으며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불꽃이 타오르듯 강렬한 작상보(炸上步).
작열하는 듯한 불꽃이 장기린의 우측 앞에서 피어오르고, 그 불꽃 안에서 축지법을 쓴 듯 강추화가 나타난다.
‘팡’ 하고 공기가 터져나갔다.
양손을 팔꿈치까지 뒤덮은 청람수(靑嵐手)가 빠른 속도로 장기린을 노려온다. 좌수(左手)는 목덜미, 우수(右手)는 관자놀이 쪽 태양혈을 노리고 있었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일순간에 경악할 만큼 놀라운 움직임이었다.
스윽.
화려한 강추화와 달리 장기린의 대응은 조용하고 간략했다.
비스듬히 늘어뜨리고 있던 창을 수직으로 쳐올렸다.
빛나는 강기도 없고, 강렬한 기합성도 없었다.
그저 창날이 움직인 것이 전부.
하지만 그 한 수에 강추화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흐어엇!”
어째서인지 강추화는 대번에 수세에 몰려 허공에서 급히 자세를 바꾸었다.
장기린의 몸에 청람수를 박아 넣으려던 그는 양손의 강기를 급히 거두어들이며 허공에서 열십(十)자로 양팔을 교차했다.
촤아악!
“……!”
모두가 눈을 의심할 사건은 거기서 벌어졌다.
무공의 절대경지인 강기(剛氣)가 무 자르듯 간단히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강기뿐만이 아니라, 강추화의 손목, 어깨, 가슴까지 갈라져 시뻘건 피가 폭포수처럼 비산했다.
“커헉!”
쿵.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른 강추화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바닥에 쓰러져 숨은 쉬는데,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 있었다.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인 채 강추화를 지켜보았다.
죽음에 이르렀는가?
“살려 뒀다…….”
상황을 지켜보던 남도화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강추화는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피부거죽만 상처가 난 듯 보인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아니다, 그 반대다.
삼호방주의 아버지였던 파강수 강추화가 고작 일초지적에 불과했다.
심지어 저 정도 능력이면 몸을 동강 낼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피부의 거죽만을 베어 내 무력화시켰다.
본래 무공에선 죽이는 것보다 무력화시키는 것이 더 어려운 법.
무쌍귀 장기린은 자신이 얼마나 지고한 경지에 올랐는지를 단 한 수로 보여 준 셈이었다.
“미쳤군.”
녹림마왕 구일호가 나직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남도화는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맞는 말이다.
미쳤다.
이런 자가 세상에 존재하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구국의 영웅이라더니…….”
“과장된 거라 생각했건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은 절망적인 평가.
“큭.”
“크으으…….”
사방을 기세등등하게 둘러쌌던 자들이 이젠 공포에 질린 채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타핫!”
그들을 향해 장기린이 처음으로 기합성을 내질렀다.
히히힝.
장기린은 무심한 얼굴로 말의 옆구리를 박찼다.
애마 흑룡이 포효하며 앞으로 달려 나가자 주춤주춤 물러나던 늙은이들의 모습이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전쟁터를 전전하던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었다.
다른 점?
물론 있다.
이젠 그에게 가족이 있고, 그는 더 이상 붉은 악귀가 아니며 그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그는 진청룡이라 불리는 풍도공의 신창(神槍)을 한손으로 감아쥐고 손잡이 끝을 허리에 붙였다.
까앙!
한 노인이 휘두르려던 협봉검을 철창의 끝으로 가볍게 찍었다. 노인이 눈을 부릅뜬다.
협봉검이 박살 나며 노인의 어깨를 꿰뚫었다.
미처 검을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한 노인은 찌르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푸확’ 하고 피가 뿜어져 나온다. 일격에 살점이 터져 나갔고, 몸은 거의 반으로 접혔다.
‘역시 가벼워.’
창을 휘두르자 노인이 토혈을 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죽진 않는다. 장기린이 힘을 조절해 내부에만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창백한 안색의 중년인 두 사람.
각각 무거운 유성추(流星錘)와 두꺼운 칼날의 대부(大斧)를 들고 있었다. 장기린은 갑자기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흑풍을 멈춰 세웠다.
쉬익.
후웅.
쇠사슬에 매달린 유성추와 두꺼운 대부가 허공에서 교차되었다. 제각각 헛손질을 한 두 사람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장기린은 절묘한 순간에 다시 흑풍을 걷어차 질주했고, 창을 휘둘러 두 명의 허리를 동시에 베어 버렸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창을 들고 있는 손을 통해 기분 나쁜 감각이 전해져 왔다. 두 사람이 허리춤에서 피를 뿜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크윽.”
“끄으으!”
그들은 다시 일어나 싸우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이내 힘을 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들은 죽진 않았지만, 더 이상 싸울 수 없도록 철저히 무력화되었다.
“후우.”
장기린은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들을 잠시 응시했다.
사람을 베는 감각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랬다.
예전엔 병사들을 상대로 생명의 가벼움을 느꼈었다면, 이젠 강한 무인들을 상대로 똑같은 가벼움을 느낀다.
“무쌍(無雙)……!”
누군가가 원치 않았던 그의 별호를 중얼거린다.
세상에 둘도 없이 독보적이니 무쌍.
그래서 지극히 외로운 별명이다.
장기린은 ‘무쌍’이라 소리 낸 자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있는 자들 중에 가장 젊은 자다. 양손에 기이한 철갑을 장갑처럼 끼고 있는 점이 썩 특이했다.
“모, 모두 피하십쇼!”
그때 느닷없이 옆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기에 장기린이 시선을 돌렸다.
그는 손을 덜덜 떨면서도 장기린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허름한 옷을 입었고, 바지에는 실례를 한 듯한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었다.
‘하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의아함을 느낀 것도 잠시.
하인에게 시선을 빼앗긴 사이, 주변에 있던 자들이 건물 안으로 우르르 후퇴해 들어갔다.
철컹!
“……!”
하인이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눌렀다.
기관장치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주변 삼 장(三丈)거리 이내의 바닥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콰과과광!
“세상에……!”
뿌옇게 피어오른 먼지는 건물 안으로까지 들어왔다.
바닥이 흔들리고, 천장에서 먼지가 후두둑 떨어졌다. 사람들은 소매로 입과 코를 틀어막으면서도 뿌연 먼지 속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충격의 연속이었다.
환관 왕진이 예사 사람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설마 침입자를 대비해 기관까지 설치해 놨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했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환관 왕진의 하인이 바닥을 기어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급히 그를 부축해 주었다.
“대체 이게……?”
“대인께서 침입자가 있을 수 있다고……. 대천문 사람들이 막지 못하면 작동시키라고 엄명을 내리셨습죠….”
하인은 잔뜩 겁에 질린 채로도 필요한 대답을 해 주었다.
“오오!”
“역시 왕 대인이야.”
사람들이 감탄하는 사이, 남도화의 눈은 영민하게 번뜩였다.
‘침입자를 예상했다고?’
남도화가 옆을 보니 녹림마왕 구일호도 의심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 기관은 어떤 기관이오?”
“바닥이 폭파되면서…… 독침과 철정(鐵釘)이 그 안의 적을 격살시킬 거라고…….”
“그런 위험한 걸 바닥에 숨겨 두었단 말인가.”
남도화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자칫 잘못했으면 몰살을 당할 수 있는 위험한 것을 왜 그들에게는 미리 말해 주지 않았단 말인가.
‘우린 그에게…… 뭐지?’
처음엔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 애송이.”
“예?”
남도화는 황급히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구일호가 다급하게 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 괴물이, 살아 있다.”
“후우.”
장기린은 길게 숨을 내쉬며 왼손으로 흑풍의 목덜미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많이 놀랐지?”
푸르륵.
“나도 놀랐다. 확실히 대천문은 방심하면 안 될 곳이군.”
장기린이 창을 옆으로 비스듬히 늘어뜨리자, 창날 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던 독침과 철정들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장기린은 모두가 도망쳐 들어간 전각을 노려보았다.
어느새 두꺼운 통나무 문이 성채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도망칠 수 없다.”
장기린은 다시 흑풍에게 박차를 가했고, 순식간에 여기저기 움푹 팬 땅바닥을 뛰어넘어 질주한 흑풍의 속도를 실어 신창 진청룡을 통나무 문에 깊게 박아 넣었다.
일기관천(逸驥貫穿).
대장군 공손웅에게 배웠고, 적룡기마대원들이라면 누구나 익힌 기본기가 막강한 위력을 담아 시전 되었다.
후우우웅.
꿰뚫고, 들어 올려, 베어 낸다.
그 간단한 원리에 장기린의 ‘전력’이 실렸다.
허리가 회전했고, 눈이 빛났으며, 진청룡의 창끝에서 막강한 기파가 줄기줄기 뿜어졌다.
통나무 문이 ‘쩍’ 하고 갈라진다.
동시에, 전각의 뼈대와 지붕이 절반으로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