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18화
제12장 미끼(7)
드드드.
커다란 전각의 뼈대가 비틀리는 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웅장했다.
장기린은 창을 떼고 흑풍의 고삐를 당겨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이마에 화살을 맞은 멧돼지를 본 적이 있는가? 멧돼지는 이마에 화살을 맞아도 잠시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다. 심지어 화살을 쏜 상대에게 달려들기도 한다.
하나 결국 오래지 않아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는다.
폐장원의 중심을 지키고 있던 전각이 바로 그랬다. 잠시 비틀거리며 고요한 침묵을 지키더니, 한순간에 모든 힘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콰과광.
뿌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장기린은, 흑풍의 위에서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았다. 폐허의 잔해가 들썩이고 있었다.
나무 기둥과 기왓장을 쳐 내며 먼저 뛰쳐나온 것은 커다란 대도를 사용하는 건장한 노인.
그리고 앞서 장기린과 눈이 마주쳤던 젊은 사내가 두 번째로 올라왔다.
나머지 노인들도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한 명씩 튀어나왔다.
“후우, 괴물 같은 놈.”
가장 먼저 올라온 노인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고들 말하지만……. 네놈은 물결 정도가 아니구나.”
노인은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는 질린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젓더니 대도를 양손으로 붙잡고 장기린에게 겨누었다.
“구 대협! 안 됩니다!”
“뒤로 빠져라, 애송아. 어차피 이놈을 넘지 못하면 원수를 갚지 못하는 것이다. 너 역시 마찬가지고.”
“예?”
“네 원수. 일흉대기 광사로랬나? 눈앞에 있는 무쌍귀를 넘지 못하면 네 복수는 그야말로 끝이다.”
일흉대기 광사로.
그 이름을 듣자, 장기린의 눈에 그 젊은이가 양손에 끼고 있는 철갑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젊은이는 크게 깨달은 듯한 얼굴로 멍하니 굳어 있었다. 노인은 사나운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나는 구일호. 무림강호에선 녹림마왕으로 불린다. 네놈이 지키고 있는 장강의 미꾸라지가 내 원수이니라. 난 추묵환 그놈을 잡아 내 앞에 무릎 꿇린 후, 그놈이 나에게 했던 일들을 처절하게 후회하도록 만들 것이다!”
노인, 구일호는 말을 하면서도 화가 나는 듯 발을 ‘쿵쿵’ 구르며 인상을 썼다.
장기린은 약간의 호기심이 생겨 구일호를 자세히 바라봤다.
그는 복수심과 적의로 두 눈을 활활 불태웠다. 그러나 동작은 차분했고, 칼끝은 안정되어 있었다.
“추 어르신이 당신에게 무슨 일을 하였소?”
“그놈은 내 모든 것을 빼앗았다.”
“그래서, 당신도 빼앗겠다는 것이오?”
“물론!”
구일호는 즉시 답하였다.
“목숨까지도?”
“당연하다.”
구일호는 그 역시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런가.”
장기린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다시 떴다.
“그럼, 결국 똑같군.”
“그래.”
구일호는 더 이상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이 자세를 잡았다. 그는 거센 기합성을 내지르며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장기린의 왼손이 정면을 겨누고, 오른손에 들린 철창이 맞은편 녹림마왕을 노렸다.
“캬핫!”
구일호의 도법은 괴이하고 강렬했다.
마치 왜자(矮者)들의 무공처럼 일격필살의 묘리를 품고 있어서,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는 그런 절박한 느낌마저 들었다.
‘전쟁터의 싸움 같군.’
쩌엉.
장기린의 창은 구일호의 칼날을 비스듬히 쳐 냈고, 바닥을 후려친 대도(大刀)는 바닥을 길게 갈랐다.
구일호는 공격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신같은 형상으로 다시 달려들었다.
한데 자세가 약간 이상했다.
머리 부분과 목, 허벅지 쪽의 치명적인 급소는 허점을 드러낸 채, 비교적 안전한 부위만 신경 써서 방어하고 있었다.
장기린은 미간을 좁히며 흑풍의 고삐를 옆으로 잡아당겼다.
푸르륵.
흑풍이 옆으로 재빨리 물러나며 거리를 만들어 냈다.
쩌엉! 쩡!
장기린은 그 뒤로도 두 번 정도 공격을 빗겨 낸 뒤, 결국 이대론 안 되겠단 생각에 흑풍에서 뛰어내렸다.
“역시!”
구일호가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외쳤다.
주변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일격에 승부가 나지 않으니 대천문의 무인들이 희망적인 시선으로 구일호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과연, 그렇게 나왔나.’
장기린은 역시 경험은 중요하다고 새삼 생각했다.
구일호는, 장기린이 상대방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게 분명했다.
그러니 즉사할 수 있는 자신의 약점을 훤히 내놓은 채, 일격필살의 공격만 계속해대는 것 아니겠는가.
“파하핫!”
미친 듯이 달려든 구일호의 어깨가 꿈틀거리고, 육중한 대도가 반월형의 호선 수십 개를 일순간에 만들어 냈다.
핏.
장기린의 소매가 조금 갈라졌다.
장기린의 눈빛이 냉정해졌다.
약점을 파고 든 건 둘째치더라도 구일호는 확실히 강했다.
녹림마왕이라 불리고, 추묵환을 적수로 삼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자였다.
‘안 되겠군.’
장기린은 진각을 ‘쾅’ 하고 강하게 밟으며 앞으로 돌진했다.
마주 달려들던 구일호의 몸이 일순간 멈추었다.
장기린이 휘두른 창이 발작적으로 달려드는 녹림마왕의 공격을 완전하게 차단한다.
쩌엉!
녹림마왕의 칼끝이 튕겨져 나갔다.
크게 반원을 그린 창.
살기를 머금는가 싶더니, 섬세한 움직임으로 구일호의 한쪽 어깨를 그대로 날려 버렸다.
“크훗.”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는데도 구일호는 웃는다.
불시에 떨어져 나간 그의 팔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하나 그는 집요하게 싸움을 지속했다. 잘리지 않은 성한 한손으로 대도를 휘둘러 장기린의 목을 노려왔다.
날카로운 파공성.
어느 때보다 위협적인 공격이 장기린을 위협했다.
진청룡의 손잡이로 칼날을 쳐 내고, 곧바로 몸을 회전시켜 구일호의 발목을 후려쳤다.
구일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발목을 들어 올렸고, 창대는 애꿎은 바닥을 후려쳤다.
그와 동시에 대도의 칼날이 장기린의 눈을 찌르려 했다.
까득.
장기린은 왼손으로 구일호의 칼날을 붙잡았다.
시퍼런 강기가 줄기줄기 새어 나왔지만, 그는 맨손으로 칼날을 깨부쉈다. 강제로 무공이 끊긴 구일호가 울컥 핏물을 토했다.
창백해진 안색. 구일호의 목덜미에 창날이 닿았다.
“파하핫!”
구일호는 크게 웃었다.
‘왜 웃는 거지?’
장기린이 냉엄한 눈빛으로 구일호를 살피고, 이내 그를 구하기 위해 대천문의 무인들이 한꺼번에 달려들고 있음을 발견했다.
“……사기가 올라갔군.”
장기린은 창을 잡은 채로 주먹을 휘둘러 구일호를 쓰러뜨렸다. 그러고는 침입자이자, 공격자로서 당당한 자세를 취한 채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긴 창대가 상대방을 겨누고, 묵직한 존재감이 사방을 짓누른다.
“좋다. 와라.”
“말도 안 돼.”
남도화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거기에는 대천문의 최고고수 세 명을 모조리 물리치고, 나머지 무인들 사이를 누비며 파죽지세로 상대를 격파하는 무의 화신이 있었다.
삼호방주의 아버지가 약했던가?
두 번째로 당했던 청성파의 장로는?
심지어 세 번째로 당한 녹림마왕은 사파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거물이다.
대천문의 무인들은 하나같이 무림강호에 이름을 날린 고수지만, 그래도 처음에 당한 세 사람보다 명성이 높은 자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가 불길에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무쌍귀를 향해 달려들고, 그 앞에서 홀연히 산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싸움이 지속된 시간은 불과 일각.
쩡!
막강한 위력의 철창에 부딪친 검들이 마치 허약한 목검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삽시간에 반 수 이상의 무인들이 땅에 쓰러졌고, 남은 사람들도 전의를 상실한 듯 주춤거리다가 그가 휘두른 일격에 무력화되었다.
남도화는 문득 생각했다. 무쌍귀의 무공은 완벽에 근접해 있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
무림최고수라는 삼존(三尊)?
무림강호에서 전설적인 명성을 구가하는 그들조차 이제 보니 장기린보다 강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들이 과장되었다고 믿었던 이야기들은, 전부 ‘진짜’였던 것이다.
불과 몇 십 명이 거대사파인 삼호방을 몰살시켰다던가. 무림십대고수였던 맹호도를 단 삼 초 만에 무릎 꿇리고, 혼자서 남경을 탈환한 거나 마찬가지라던 업적들…….
처음 들으면 누구든 코웃음 쳤겠지만, 이제는 믿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소문이 축소된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절세고수란 이런 것이겠지. 상대가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덤비고 싶어지는 이 기분은 무엇일까……?’
남도화는 이 순간만큼은 복수를 까맣게 잊었다.
그에겐 이미 강한 상대를 맞이한 무인으로서의 두근거리는 심정만이 남았다. 그는 호기롭게 장기린을 향해 다가갔다.
장내엔 어느새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무쌍귀의 막강한 기파와 무지막지한 존재감만이 있을 뿐.
“내 이름은 남도화. 기갑문(機甲門)의 후계자이며, 사문의 배신자인 일흉대기 광사로가 내 원수요.”
장기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다? 아니다. 그는 그의 이름을 기억했다는 것을 왠지 알 수 있었다.
“그럼.”
남도화는 짧게 포권을 취한 뒤, 양 손바닥에 숨겨진 장치를 작동시켰다.
차르륵.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가 양손에 차고 있던 철수(鐵手)가 기묘한 변화를 일으켰다. 손등에 둥그런 원판이 튀어나와 있었다.
남도화는 기갑문의 무공인 사자번신(獅子翻身)을 혼신의 힘을 다해 펼쳤다.
‘기회는 한번 뿐!’
왼다리를 먼저, 그 후에 오른다리를 앞으로 뻗으며 몸을 한껏 낮춘 채 상대방을 향해 달려든다.
변화를 주는 건 상대방에게 손끝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다.
발끝으로 바닥에 반원을 그리는 듯한 감각.
쉬이이익.
허리의 회전이 극대화 되는 순간, 남도화의 양손이 번개처럼 사방을 점했다.
파앙!
마라폭권(魔羅爆拳).
부처를 유혹하던 마귀처럼, 사방을 점한 손 그림자가 장기린을 이도저도 못하게 꽁꽁 묶어 버렸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여기서 당황을 해야 할 터. 하지만 장기린은 역시나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남도화는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는 장기린이 움직이길 기다렸고, 커다란 철창이 움직이는 순간, 남도화는 자신의 왼손 손등을 오른쪽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콰앙!
“……!”
이 순간, 처음으로 장기린의 안색이 변했다.
허공에서 폭발한 불꽃의 열기가 눈앞으로 ‘훅’ 끼쳐 들었기 때문이다.
남도화의 철갑은 기갑문의 비기(秘機)였다.
폭발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직접 닿았을 때의 열기와 파괴력.
다른 하나는 허공에서 폭파시켜, 시선을 집중케 유도한 후 그의 집중력을 흩트리는 것이다.
남도화는 폭발한 압력을 이용해 몸을 정반대 방향으로 빙글 회전시켰고, 아직 폭발하지 않은 오른쪽 손등으로 장기린의 오른쪽 발목을 노렸다.
싸움은 작은 부분에서 승부가 나는 법.
부딪치기만 하면, 그는 승리할 수 있었다.
터엉.
“큭!”
부릅뜬 남도화의 시선에 그의 오른쪽 손등이 육중한 철창에 짓눌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달까.
장기린의 창대 끝이 그의 오른쪽 손등을 짓누르고 있었다.
‘폭파……도 안 되나.’
창대의 위치가 절묘해서 그대로 화약을 터뜨릴 수도 없었다.
남도화는 이를 악물고 양발로 땅바닥을 박찼다.
우두둑.
오른쪽 어깨 관절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남도화는 극렬한 고통을 꾹 눌러 참으며 오른쪽 발을 위쪽으로 차올렸다.
필사의 일격이었으나 ‘턱’ 하고 장기린에게 맨손으로 붙잡혔다.
남도화의 눈이 번뜩였다.
그 순간 비밀스러운 기관이 작동되며, 발목에서 새카만 단창 두 개가 튀어나왔다.
피슉!
“흠.”
남도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코앞에서 쏘아진 단창이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각도.
눈으로 보고 피해선 늦어 버릴 거리였는데도 맞추지 못했다. 겨우 장기린의 목덜미 근처 옷깃만을 찢어져 있었다.
“이게 기갑문인가.”
장기린은 조금 감탄한 듯한 목소리로 말한 뒤, 남도화의 명치를 걷어찼다.
“커헉!”
바닥을 뒹군 그는 어느새 하단전의 진기가 산산조각 나 있는 것을 느꼈다. 일어서려고 했으나 몸이 뜻대로 잘 움직이지 않았다.
‘다들 이래서 못 일어난 건가……?’
남도화는 턱을 덜덜 떨면서 애써 고개를 들고 장기린을 노려보았다.
“더는 없나.”
장기린은 벌써 남도화로부터 시선을 돌려, 다른 인기척을 찾고 있었다.
“큭……!”
남도화는 땅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말할 것도 없다.
패배.
복수는 실패한 것이다.
장기린은 홀로 웃고 있는 녹림마왕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흐흐. 무쌍귀야, 무쌍귀야. 어리석구나. 내 눈에는 보인다.”
녹림마왕 구일호는 하나뿐인 팔로 배를 두드리며 웃었다.
“이제야 알겠다. 대천문주가 왜 여길 내어 줬는지. 원망스럽지만…… 잘됐군……. 잘됐어. 복수만 할 수 있다면 그게 좋은 일이지.”
“……무슨 말이오?”
“네놈은 은자촌을 지키는 문지기다. 한데 여기에 와 있군. 큭큭, 그럼 은자촌은 누가 지키느냐.”
장기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으나, 이내 다시 중심을 찾았다.
“그곳은, 내가 없어도 괜찮소.”
“과연 그럴까? 우리에게도 신수가 있는데?”
“……!”
지금껏 특별한 동요 없이 그저 예사롭던 그가, 처음으로 충격을 받았다.
놀란 모습.
흔들리는 동공이 그의 심경을 말해 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런 말이지.”
구일호는 씩 웃으며 한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장기린의 시선도 옆으로 돌아갔다.
구일호의 시선이 향한 곳. 가장 처음에 대천문을 대피시켰던 하인이 쓰러져 있었다.
폭발에 휩쓸렸던 것일까? 눈길조차 줄 필요가 없었던 자다.
한데, 그가 지금 두 사람의 시선을 받자 일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