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69화 (198/686)

3권 19화

제12장 미끼(8)

“에이, 영감님. 그런 걸 눈치를 주면 어떡해? 기다렸다가 기습이나 할까 했는데. 일이 어려워졌잖아?”

나이는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장기린이 그를 처음 봤을 때 그의 모습은 분명히 비겁한 굴종(屈從)의 태도가 몸에 밴 청년이었다.

허리는 굽실거렸고, 눈으로는 계속 주변인의 눈치를 살피던 모습이 잔상에 어렴풋이 남아 있다.

지금도 바지에는 겁을 집어먹어 실례를 한 흔적까지 남아 있지 않은가.

한데 이젠 마치 고치를 벗어 던지고 성충이라도 된 듯, 한순간에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하였다.

장기린 정도가 되면 사람을 잘못 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렇기에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청년은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넌 누구지?”

하인은 놀리듯이 피식 웃었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잘 좀 봐.”

“…….”

“난 한눈에 알았는데. 희한하네, 구식이라서 그런가? 왜 못 알아보지?”

“뭐?”

장기린은 구식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구식이라고? 무슨 뜻이지?”

“크큭. 글쎄에?”

키득대며 웃는 젊은이.

장기린은 문득 그를 보며 들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이빨을 드러내지만, 한편으론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푹 숙여 자신을 숨길 줄도 아는 들개.

본성이 사나우면서도, 충직한 하인인 척 감쪽같이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자다.

‘인상이 전혀 다르게 바뀌었다. 강한……가?’

장기린은 자신이 아직도 상대방의 전력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신선했다.

“내가 누구냐면 말이지?”

하인은 터벅터벅, 평범한 사람의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장기린이 일격에 목을 칠 수 있는 거리를 지나, 이젠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로 불편해 할 만큼 가까운 거리로 다가왔다.

숨만 쉬어도 닿을 만한 거리.

하인이 다시 한번 피식 웃는 순간, ‘쉭’ 하고 왼쪽 귓불 근처로 날카로운 파공음이 스쳤다.

쩡!

장기린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하인을 응시했다.

하인이 착용한 철조(鐵爪)와 장기린이 짧게 잡은 철창의 손잡이 사이에서 끼긱거리는 소음이 흘러나왔다.

“챠핫!”

하인의 움직임이 급변했다.

어느새 왼손에도 철조를 끼웠고, 맹수의 발톱처럼 튀어나온 한 뼘 길이의 칼날들이 장기린의 전신을 위협했다.

따다다다당.

순식간에 십여 합이 교차했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공격들을 막아 내고, 장기린이 공격하려는 순간 하인은 뒤로 훌쩍 뛰어 피해 냈다.

마치 원숭이가 연상되는 움직임이었다. 규칙에 얽매이지 않아 자유롭고, 그만큼 재빨랐다.

“이야. 역시 대단하네. 기습이 안 통해!”

싱글싱글 자꾸만 웃는 모습이 마치 상대방을 놀리는 것 같았다. 하인은 이제 자신의 능력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통통 튀는 발놀림.

사납게 빛나는 안광에서 섬뜩한 살기가 넘실거린다.

“어때? 이제 보이지?”

“아아.”

장기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인다.

충격이었다.

장기린은 상대방에게서 자신의 것과 동질의 힘을 발견했다.

마치 수백 명의 원혼이 한데 뭉쳐 모여 있는 듯한 모습.

그것도 청명경(靑明經)을 통해 최대한 다듬고 정화한 것이 아니라, 한창 붉은 악귀였던 때의 장기린처럼 응축된 힘을 그대로 지닌 자가 눈앞에 있었다.

그가 철조로 장기린을 겨누며 말했다.

“내 이름은 도철(饕餮). 사흉(四凶)의 짐승. 주인의 명령으로 기린을 잡아먹으러 왔다.”

스스로를 도철이라 소개한 청년은 새빨간 혀로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시기까지 했다.

장기린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사흉은 서경과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악한 신수(神獸)들을 말함이다. 도철은 그중에서도 가장 기괴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괴물이었다.

‘정말로 이자가 신수란 말인가?’

장기린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몇 번이나 도철을 다시 보았다.

“후우.”

장기린은 길게 숨을 내쉬며 애써 치밀어 오르는 분을 삭였다.

“신수…… 게다가 주인이라고? 난 믿지 않는다. 그런 일이…… 또다시 벌어질 리가 없다. 그는 이미 죽었어.”

“글쎄에? 네 눈앞에 있어도 못 믿는 거야?”

“말하라.”

슥.

진청룡이 흑청색 창날이 육중한 무게감을 담아 도철을 겨눴다.

“누가 널 그렇게 만들었지?”

“……궁금하면 힘으로 알아보셔.”

씩 웃는가 싶더니 달려드는 도철.

파바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리를 좁혀가는 두 사람이다.

“전력을 다하는 게 좋을 거야. 선배님, 난 강해.”

휘이잉.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감히 장기린에게 전력을 다하라고 충고하는 자.

한순간 도철이 질풍같이 다가와 양손을 번개처럼 휘둘렀다. 장기린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공격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다.

텐챠이의 도격, 하시르의 쌍검에 비견 될 정도.

쩡!

진청룡과 도철의 양손 철조가 강렬하게 부딪쳤다. 도철의 몸이 바닥을 휩쓰는가 싶더니, 두 손을 양쪽으로 쫙 벌린다. 벌새가 날갯짓을 하듯, 양손의 발톱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까가가가강!

장기린의 창술은 정중동(靜中動).

고요한 가운데 모든 움직임을 품고 있으니 항상 후수(後手)임에도 우위를 놓치지 않았었다.

하나 밀린다.

상대가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기 때문이다.

전력을 다하는 게 좋을 거라던 충고는 허풍이 아니었다.

장기린의 어깻죽지, 소맷자락, 바지 밑단이 잘리고 터져 나간다.

파바밧!

도철이 큰 공격을 하려는지 허리를 굽히는 순간.

까아앙!

장기린은 크게 휘둘러 일격에 도철을 밀어냈다.

힘이라면 그가 분명히 우위에 있을 터.

도철은 그걸 수십 번 몸을 비틀면서 야생동물 같은 몸놀림으로 상쇄해 냈다.

“후하핫! 강해! 강하잖아!”

마치 싸움을 즐기는 듯한 분위기지만 장기린은 도철의 눈빛이 잔인해 보일 만큼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쒜에엑.

도철이 발로 걷어찬 돌멩이 하나를 장기린은 고개만 살짝 젖혀서 피했다.

백전연마(百戰硏磨).

이 말이 장기린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장기린의 움직임은 장중했고, 빈틈이 없었다.

쩌엉!

수직으로 내리찍는 장기린의 참격(斬擊)이 막강한 위력을 뿜어냈다.

‘콰득’ 하고 비스듬히 공격을 받아 낸 도철의 발밑에서 석조바닥이 박살이 나서 터져 나갔다.

“큭.”

도철이 이를 악물고 버틴 뒤 다시 덤벼 온다.

여전히 대단한 속도였다.

찰나의 순간, 두 개의 철조가 그려 낸 날카로운 잔상이 장기린의 주변을 꽉 채운다.

까깡! 쩌저정!

장기린이 일직선으로 창을 뻗어 내자 도철의 철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챙.

도철은 왼손 철조로 진청룡의 창날을 붙잡는가 싶더니, 묘기를 부리듯 허리를 튕겨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마치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붙잡고 올라가는 듯한 몸놀림이다. 도철의 몸이 한 바퀴 회전했다.

회전을 한다는 건 등을 보여 약점을 노출시킨다는 뜻이지만, 그럼에도 빈틈은 없었다.

장기린의 창을 가볍게 밀어낸다. 곧바로 이어진 반격들은 도리어 장기린이 정신없이 방어에만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팡. 팡. 팡.

도철이 차 낸 각법이 허공에서 공기를 폭발시켰다.

장기린은 창을 잡지 않은 왼손으로 각법을 흘려 낸 뒤 냉철하게 창을 내찔렀다.

깡!

장기린의 창이 도철의 철조에 막강한 경력을 쏟아부었다.

엄청난 위력에 도철의 양손이 만세하듯 위로 쳐들린다.

장기린은 바로 그 순간 한 걸음을 내딛으며 왼손 장타로 도철의 복부를 후려쳤다.

아니, 후려치려는 순간 도철의 몸이 기묘한 각도로 비틀렸다.

까강!

“……!”

철조의 다섯 개 칼날이 코앞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찰나의 빈틈을 노린 기습.

암습에 있어선 가히 천재적인 감각이었다.

장기린의 코끝을 살짝 스치고 지나간 철조가 효용을 다한 순간, 도철은 다시 한번 몸을 비틀어 장기린의 창대를 붙잡고 반대쪽으로 훌쩍 넘어갔다.

“허.”

기가 막힌 노릇이다.

장기린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후핫! 하하핫! 후우, 후우…….”

도철은 낄낄 웃는데 숨이 거칠었다.

잔뜩 흥분한 탓일까.

눈빛도 조금 탁해진 듯하다.

“집혼기……. 집혼기를 내놔. 아직 가지고 있지?”

도철의 시선이 심장과 가까운 장기린의 가슴 한 가운데를 향한다.

장기린은 차분한 시선으로 그런 도철을 관찰했다.

“내놔!”

광기를 드러내며 달려드는 도철.

한데 힘은 더더욱 강해진 듯하다.

덤벼오는 속도, 내뻗는 공격에 실린 힘이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까가가강.

순식간에 수십 합의 공수가 교환되고, 한번 훌쩍 물러났던 도철이 이번엔 철조와 비슷한 무기를 자신의 양발에도 착용했다.

“크흐흐.”

양손, 양발에 철로 된 발톱을 착용한 모습.

이젠 완연히 네 발 동물 같은 모양새다.

그 모습으로 미친 듯이 달려드니, 이미 더 올라갈 수 없을 것 같던 공격 속도를 한층 더 상승시켰다.

하나 장기린도 백전무패의 장수다.

상대의 기색을 보고 자신도 진정한 힘을 꺼내 든다.

콰아아아.

공기를 잡아 뜯는 듯한 무게감.

진청룡의 칼날이 푸르른 살기를 띄고, 장기린의 왼발이 강하게 진각을 밟는다.

뒤로 물러났던 오른손이 허리에서 회전력을 키우고 허리, 어깨, 팔꿈치, 손목을 통해 전달된 내력이 나선으로 회전하며 창끝에 막강한 진경을 실었다.

‘일연적룡무(一衍赤龍舞) 일식(一式)’

흑청색 창날이 번뜩이고, 공기를 잡아 찢는 듯한 굉음은 그다음에 들려왔다.

쒜에에에엑.

방어가 무엇이든 꿰뚫어 버리는 무적창술.

막강한 위력의 화포 같은 일격이 정면으로 달려드는 도철의 움직임을 짓눌렀다.

“크아아아!”

괴성을 내지르는 도철.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양손, 양발. 네 개의 철조를 모두 사용해 장기린의 공격을 버텨 보려고 했다.

까가가강.

몇 번이나 부딪치는지도 모를 굉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팽이처럼 스스로의 몸을 회전시키며, 어느새 강기를 휘감은 철조로 진청룡의 창날을 끊임없이 두드린다.

막아 내고 있다.

장기린은 도철의 하단전 부근에서 붉은빛 광채가 번뜩이는 것을 목격했다.

장기린은 다시 한번 발을 굴렀다.

쿵.

그리고 일연적룡무 일식을 다시 한번, 똑같은 궤도로 날려 보냈다.

콰아아아아.

공기가 다시 한번 잡아 뜯기고, 아까의 것보다 더욱 강한 파공음이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쩌정.

단단해 보였던 도철의 철조에 금이 간다.

열 개의 손톱 칼날 중 세 개가 부러져서 날아가 버렸다.

“크아아아아!”

도철은 기괴(奇怪)하다.

광기를 담아 두 눈을 부릅뜬 채 미친 듯이 철조를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용생(龍生)”

양손을 머리 위에서 모으고, 꽃처럼 활짝 핀 열 개의 손가락을 이용해 용의 이빨처럼 물어뜯는다.

마치 실제 용이 재림한 듯 엄청난 존재감.

입에서 불을 뿜을 것 같은 모습으로, 도철은 장기린의 창날을 깨물고 비틀어 옆으로 빗겨 냈다.

“……!”

그 결과 약간이지만, 공격의 궤도가 어긋났다.

도철은 공격을 쳐 내자마자 옆으로 물러났고, 궤도가 약간 틀어진 일연적룡무 일식은 뒤에 있던 무너진 전각을 한 차례 더 가격했다.

콰과과광!

처음에 전각을 무너뜨렸을 때보다 더욱 무시무시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거대한 신이 괭이질을 한 것처럼, 무너진 전각의 파편이 일직선으로 쭉 사라져 있었다.

굉장한 위력.

옆에서 지켜보던 녹림마왕과 남도화가 차마 말도 못하고 입만 벙끗거릴 만큼 대단한 광경이었다.

“후우. 후우.”

한편 도철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냉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하단전에서 붉게 빛나던 광채.

그리고 탁해졌던 두 눈의 광기가 점차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젠장. 이런 괴물이.”

푸슉. 푸화학.

뒤늦게 도철의 가슴팍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다리가 휘청이며 몸이 비틀거렸다. 산산조각 난 채로 부서진 철조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울컥’ 피를 토해 낸 뒤 도철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장기린을 노려보았다.

장기린 역시 멀쩡한 모습은 아니었다.

소맷자락, 바지 자락. 전신의 옷 중에 멀쩡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어깨와 다리 부근엔 미미하게 피가 보이는 찰과상도 있었다.

“그래도 심각한 건 하나도 없네…… 젠장.”

도철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큭큭 웃으며 말했다.

“제길, 자만하지 마! 그거 알아? 편법으로 좀 모으긴 했는데, 난 아직 만 명을 못 채웠다고. 크큭, 다 채우기만 하면 당신 정도는…… 그런 구식으론 절대로……!”

휘청거리던 도철의 몸이 옆으로 쓰러져 버린다.

장기린은 그런 도철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신수?

집혼기?

만 명?

궁금한 것투성이었다.

만약 도철이 기절했다면, 지금 당장 깨워서 캐묻고 싶을 만큼 장기린은 의욕이 만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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