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70화 (199/686)

3권 20화

제12장 미끼(9)

“안 돼!”

그때, 녹림마왕이 네 발로 기듯이 뛰쳐나와 도철의 앞을 가로막았다.

장기린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 단순히 서 있는 것도 버거워 보이는 그는, 도저히 싸울 만한 몸 상태가 아니다.

“클클, 이놈은 너 같은 괴물을 그나마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여기서 잃어버릴 수는 없어.”

“그 청년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오.”

장기린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알아볼 것이 있을 뿐.”

“안 되지, 안 돼. 알아도 안 돼.”

녹림마왕은 고개를 저었다.

“네놈에게 넘겨주지 않는다. 끝까지 지킬 것이야.”

“그 상처론 움직이지 않는 게 좋소.”

“푸하핫! 적을 걱정해 주는 건가? 너처럼 뼛속까지 피에 절은 놈이?”

녹림마왕은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었다. 지독한 모욕에 장기린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당신을 제압하는 법은 얼마든지 있소.”

“어디 한번 해 봐.”

녹림마왕 구일호는 배를 쑥 내밀었다.

장기린으로서는 창백한 안색에 피를 토하면서도 강짜를 부리는 모습이 어이가 없을 뿐이다.

‘안 되겠군. 일단 쓰러뜨려야…… 음?’

장기린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어이. 어딜 보는 거냐. 괴물.”

“잠깐.”

장기린은 녹림마왕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하며 시선을 한곳에 고정시켰다.

처음엔 부스럭거리는 소리였다.

한데 그게 점점 거친 소리로 바뀌더니, 이젠 누군가가 대놓고 놀라운 속도로 달려들고 있었다.

오십 장(丈)이 넘는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불과 십여 걸음 만에 주파되었다.

새 가면.

그리고 왜소한 체구.

갑자기 나타난 사내는 매우 눈에 띄는 모양새였다.

새 모양의 가면을 써서 머리를 통째로 가리고 있었는데, 커다란 머리에 비해 어깨와 몸이 너무 좁아 불구자처럼 보였다.

장기린은 쏜살같이 달려드는 그를 향해 창날을 겨눴다.

새 가면 쓴 사내는 대륙에서 손꼽힐 만한 대단한 경공술을 보여 주고 있었다.

쒜에에엑.

“캬아아앗!”

그는 화살 같은 속도로 장기린을 향해 달려들었고 기묘한 기합성을 질러댔다.

위협에 반응한 장기린이 진청룡을 휘두를 준비를 했다.

파팡!

“……?”

한데 새 가면의 사내는 장기린과 맞부딪치기 직전에, 갑자기 직각으로 방향을 꺾었다. 그러고 나서 순식간에 도철을 어깨에 짊어지고 옆으로 뛰쳐나갔다.

“허?”

장기린의 눈빛이 뜨거워졌다.

“서라.”

진청룡의 창날이 주인의 분노를 담아 주변의 공기를 잡아끌었다.

“안 돼!”

“큭.”

장기린은 급히 진청룡을 멈춰 세웠다.

녹림마왕 구일호가 창날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지금 이 힘으로 부딪치면 구일호는 즉사한다.

장기린은 창을 회수하고, 창대의 손잡이로 구일호의 무릎을 내리쳤다.

“커헉!”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는 구일호.

장기린은 그를 완전히 쓰러뜨린 뒤 도망자의 뒤를 쫓았다.

새 가면의 사내는 경공술 실력이 대단했다.

잠깐 눈을 뗐을 뿐인데, 벌써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거리까지 차이가 벌어졌다.

사람 한 명을 등에 업고도 저런 속도라니.

장기린은 눈으로 보면서도 쉬이 믿기지 않았다.

“서!”

장기린은 진청룡을 살짝 위로 던졌다가 역수로 붙잡았다.

우우웅.

장기린의 두 눈이 번뜩였다.

강하게 내딛는 왼 발.

허리에서 시작된 회전력이, 역수로 잡은 장기린의 오른손을 통해 새카만 번개를 만들어 냈다.

쒜에에에엑!

검은색 번개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쏘아져 올라갔다.

강대한 파괴력을 담은 신창(神槍)이 내리찍는 순간, 새 가면의 사내는 마치 보이지 않는 계단이 있는 것처럼 허공을 딛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콰광.

굉음이 울리고, 뿌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장기린은 무거운 안색으로 다가가 땅바닥에 꽂힌 창을 뽑아냈다.

“놓쳤군.”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는 핏물이, 상대방도 무사히 도피하지 못했음을 알려 준다.

장기린은 품 안에서 호각(號角)을 꺼내 불었다.

뿌우우우.

‘운화는 뒤처리를 해 줄 사람을 준비해 뒀다고 했었지. 아는 얼굴이라고 했었는데…… 볼 시간은 없겠어.’

장기린은 자신의 흑마를 불러 올라탄 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도화와 구일호를 잠시 응시했다.

‘……저 일은 나중에.’

지금은 일단 도망친 도철을 붙잡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장기린은 흑룡의 고삐를 잡아당겨 질풍처럼 달려 나갔다.

***

뿌우우우.

자이혼은 인적이 드문 뒷골목에서 뿔피리 소리를 들었다.

산천초목이 벌벌 떨 것 같은 무시무시한 굉음이 몇 번 터진 후에 들려온 소리였다.

자이혼은 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시야 한 가득 눈부시게 펼쳐진 푸른 초원과 그 안에서 벌어지던 피 튀기는 전투.

날카로운 뿔피리 소리는 항상 그 전투의 끝을 알리곤 했다.

“끝났군.”

자이혼은 붉은 악귀가 승리했음을 확신했다.

놀라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오래 버텼다는 건 가히 신기한 일이었다.

하나 붉은 악귀를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하늘신이 내려 준 ‘푸른 늑대’뿐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아무리 고수라고 해 봤자 근본적으로 다르다. 애초에 죽여 온 숫자가 다른 것이다.

“멍청한 놈들. 이래서 한족놈들은 믿을 수가 없어. 하늘신이여.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자이혼은 투덜거리며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왕진이라는 환관을 계속 쫓을 것인가.

아니면 초원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그런데 그 결정을 내려 준 건 하늘신이 아니었다.

“……!”

자이혼은 재빨리 뒷골목의 벽쪽으로 몸을 붙였다.

살기라는 것은 마치 봄철의 꽃향내와 같다. 의식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방향은 서북.

위이이잉.

순식간에 짓쳐드는 화살. 자이혼은 옆으로 몸을 날렸다.

콰아앙!

자이혼의 귓가를 스쳐가며 돌 벽을 꿰뚫은 철시가 무시무시한 폭음을 울렸다.

화살의 길이만 해도 웬만한 남자의 키만 한 것 같은데, 이건 이미 화살이라기 보단 투창(投槍)이다.

게다가 그 위력은 거의 작은 화포 수준이었다.

“감히 이 몸에게 화살을 쏴?”

자이혼은 분노했다.

그가 누구던가?

카라코룸 최강의 전사 중 한 명으로서, 특히 궁술(弓術)에 있어서는 둘째가라면 서럽던 존재가 아니던가.

“한 팔만 안 잘렸어도……!”

자이혼은 그의 팔을 잘라 낸 적룡기마대의 애송이들을 떠올렸다가. 이내 이를 갈며 한쪽 방향으로 뛰쳐 나갔다.

다시 한번 철시가 날아오고 있었다.

콰아앙.

돌 벽 한 귀퉁이가 통째로 터져 나가는 것을 흘깃 쳐다본 뒤, 자이혼은 화살을 쏘아대는 녀석의 위치를 정확히 확인했다.

‘낙양성벽? 병사인가? 어쨌든 큰 활일수록 자리를 옮기기가 어렵지.’

두 번의 활질이면 위치 파악하는 것에는 충분하다.

자이혼이 질주한다.

그는 반각 안에 화살을 쏘아대던 녀석을 그가 지닌 거대한 외날도끼로 날려 버릴 자신이 있었다.

뒷골목의 끝을 지나, 낙양성의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그 순간, 수염이 덥수룩한 거구의 사내가 한 손에 유성추를 붕붕 휘두르며 나타났다.

“건방진 놈.”

자이혼은 몽고어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뒤, 곧장 등 뒤에 비스듬히 메고 있던 그의 외날도끼 잔성(殘星)을 뽑아 들었다.

문답(問答)이 왜 필요하겠는가.

두 사람은 곧바로 서로를 향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후아앗!”

거구의 사내가 묵직한 파괴력을 담아 유성추를 던져 왔다.

‘챠르륵’ 하고 쇠사슬 감기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제법.’

나쁘지 않은 솜씨다.

자이혼은 가볍게 몸을 튕겨 옆으로 피해 냈다. 전쟁터에서 궁사(弓師)에게 가장 필요한 것? 말할 것도 없다.

신법(身法)이다.

궁사는 달리기만 빨라도 생존확률이 확 높아지는 것이다.

자이혼은 빠른 속도로 달려들며, 잔성을 꽉 움켜쥔 채 몸을 한 바퀴 휘돌렸다.

“뒤로 빠져! 동추!”

까앙.

자이혼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대한 외날도끼 잔성을, 거무튀튀한 기형도(奇形刀) 두 개가 막아 세우고 있었다.

‘역수도?’

역수(逆手)로 잡고 싸우는 도법이라니. 자이혼으로서는 비단길 인근에서 사막 민족과 싸운 후에 처음 겪는 일이었다.

“챠핫!”

매끈하게 생긴 사내에게선 온갖 실전을 다 경험한 연륜이 느껴졌다.

까가깡!

눈 깜빡할 사이에 거무튀튀한 기형도가 세 번이나 공격했다.

자이혼은 뒤로 물러나며 도끼를 크게 휘둘러 쳐 냈다.

‘깡’ 하고 밀어내나 싶었는데, 빙글빙글 회전하면서 빠른 속도로 달라붙었다.

‘이놈들?’

자이혼의 눈이 번뜩였다.

어느새 철시가 하나 더 날아온다.

쾅.

바닥이 폭발했다. 흙먼지가 치솟고, 돌가루가 튀었다. 퇴로를 쳐다보니 쇠사슬에 매달린 유성추가 둥그렇게 날아오고 있었다.

쒜에엑.

유성추를 머리 위로 흘려보내고 나니 기형도가 덮쳐 온다.

근거리, 중거리, 장거리.

안정적인 삼총사였다.

하나하나는 상대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데, 셋이 합쳐지니 빈틈이 없었다.

‘위험하다.’

자이혼은 진심으로 위협을 느꼈다. 그는 잔성을 옆구리에 낀 채, 허리춤에 차고 있던 소형각궁을 손가락만으로 뽑아 들었다.

“어?”

피잉.

자이혼은 한 손으로 각궁을 들고, 이빨로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아 냈다.

기형도의 사내가 왜 그렇게 놀랐는지는 모를 일이다.

화살을 쏘아 내는 시점이 워낙 절묘했기에, 기형도의 사내는 놀라며 화살을 급히 쳐 냈다.

쳐 낸 화살은 하나.

나머지 두 개는 뒤에서 유성추를 던지던 거구의 사내 복부에 틀어박혔다.

“커헉!”

거구의 사내가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자이혼은 각궁을 다시 허리춤으로 되돌려 놓고, 다시 잔성을 붙잡았다. 불끈거리는 팔뚝. 금강석(金剛石)처럼 극도로 단련된 근육이 전력을 다해 움직였다.

까아앙!

쩌렁쩌렁한 굉음과 함께 기형도의 사내가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자이혼은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한데 엉켜 뒹굴고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애송이들. 주제를 알아라. 나는 삼대천의 자이혼이다.”

막강한 실력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자이혼이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등장하는 낭인 떼.

그들이 그물 수십 개를 자이혼을 향해 내던졌다.

“큭.”

자이혼은 외날도끼를 휘둘러 몇 개를 쳐 냈으나, 거기까지였다. 신법으로 빠져나가려고 한 순간, 절묘한 시점에 철시가 두 개나 연속으로 퇴로를 가로막았다.

양손이 있었다면 모를까.

결국 자이혼은 그물 수십개 에 칭칭 휘감긴 채 행동이 봉쇄되고 말았다.

“가까이 가지 마!”

다급하게 외친 것은 기형도의 사내다.

그물에 칭칭 감긴 모습을 보고 방심한 낭인 한 명이 자이혼에게 다가간 순간, 자이혼은 그물에 칭칭 감긴 채 도끼를 휘둘러 낭인 한 명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엄청난 힘.

일격에 그물들이 찢어질 것처럼 들썩였다.

“젠장!”

기형도의 사내가 달려든다.

쩡! 쩡! 쩡!

자이혼은 그 상태로 삼 합을 버텼다. 하나 결국 기형도 사내의 칼에 하체를 허용하고 말았다.

서걱.

칼날에 베인 허벅지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자이혼은 휘청이며 주저앉았다.

그런 그의 머리채를 붙잡고, 기형도의 사내는 거무튀튀한 칼날을 그의 목에 들이댔다.

동시에 낭인 수십 명이 달려들어 자이혼의 양팔, 양다리를 붙잡았다.

“얌전히 있어. 몽고놈.”

“큭큭…….”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자이혼.

그는 깊은 출혈로 인해 금세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

“손해야. 손해라고.”

유력한 차기 낭인왕 후보, 몽도는 그물에 칭칭 감긴 사람 형상을 한 무언가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겨우 흑수 손오에게서 벗어났나 했는데. 더한 괴물에게 붙잡혀서 이딴 짓이나 하다니. 젠장! 이게 뭐야. 그 인간은 왜 이런 괴물이 있다고 말을 안 했어?”

“큭큭, 두목, 불평마슈. 살아난 게 어디요? 그리고 그 사람이 위험하다고 말했었잖아?”

복부에 붕대를 칭칭 감은 동추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그 사람’을 두둔했다.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그래도 우리니까 잡은 거요. 우리도 꽤 강하다니까? 제기랄. 그 마을에서 자존심이 산산이 부서져서 난 우리가 무지 약한 줄 알았어.”

“빌어먹을.”

몽도는 더덕을 캐던 과거가 떠오르자 괜히 화를 버럭 냈다.

“넌 왜 싸울 때마다 그 몰골이야!”

“약해서 그렇수다.”

“젠장. 말이나 못하면.”

투덜거리는 몽도에게 동추가 조언했다.

“어서 가는 게 좋겠소. 미끼로 필요하니까 무너진 전각에서 생존자를 확보해서 철저히 붙잡아 두라고 ‘그 사람’이 말했잖수.”

“제기랄. 이게 뭐야. 뒤처리하는 하인도 아니고.”

“하인이면 또 어때. 살아 있음 됐지. 두목은 쌍검 맛을 또 보고 싶수?”

“……아니.”

급히 비굴해졌던 몽도는, 이내 이를 바득바득 갈며 허공을 향해 주먹질을 했다.

“내가 꼭 낭인왕이 되고 만다! 그때 이 수모를 다 갚아 줄 거야!”

동추는 피식 웃으며 뒤에서 말했다.

“퍽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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