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71화 (200/686)

3권 21화

제13장 환관 왕진(1)

선덕제 사후 고작 아홉 살의 나이에 황제의 위치에 오른 정통제(正統帝)에게는 국정을 운영할 능력이 없었다. 황제의 조모인 태황태후 장씨(太皇太后 張氏, 성효소황후)가 섭정하였고, 선대의 신하들이 최선을 다해 국정을 살폈으나, 제 역할을 해내는 제대로 된 지도자가 없이 나라가 제대로 운영될 리는 만무했다.

누가 그랬던가. 난세는 곧 기회이기도 하다고.

명제국 건국 후 최고로 혼란한 시기에, 환관 왕진은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저희는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모으고 있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훗날 황실을 지킬 든든한 모습을 생각하면 힘이 나더군요.”

“왕 공공. 그들은 정말로 강해?”

“예. 장판파에서 장익덕이 홀로 만 명의 대군을 멈춰 세웠다지요? 폐하께도 그런 수호신이 생기는 것이랍니다.”

“수호신은 백택이 있잖아?”

“그는, 외람된 말씀이오나 수족이라기엔 무리가 있지요. 황실에 큰 위협이 닥치지 않는 한 움직이지 않겠다고 스스로 말했답니다.”

“그런가? 백택은 말 걸기가 좀 무서워.”

“예. 사람을 벗어난 존재니까요.”

정통제 주기진(朱祁鎭)은 고작 열 살. 게다가 사방에서 떠받들어 주면서 자랐기에 또래의 아이들보다 정서적 발달이 늦은 아이였다.

원하는 건 뭐든 얻어왔기에 절박함이 없고, 남들의 힘든 감정을 공감하지 못했다.

주기진의 심복인 환관 왕진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굳이 고쳐 주려 하지 않았다. 신하 입장에선 무능한 지도자가 더 편한 법이니까.

“그런 걸 더 만드는 거야? 그건 좀 싫은데…….”

“백택과는 다를 겁니다. 새로운 세대의 신수들은 그동안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개량되었지요. 힘은 일세대 신수들보다 조금 부족하지만…… 대신 폐하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그 어떤 충신보다도 뛰어나답니다.”

“그래? 내가 시키는 건 뭐든지 해?”

“그럼요.”

주기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 애들을 얼마나 만드는 거야?”

“사신(四神)을 아시지요?”

“청룡, 백호 같은 거?”

“역시 영민하십니다, 폐하. 신(臣)은 명황실의 동서남북을 지키는 수호신을 각각 만들까 하고 있지요. 이미 그에 어울리는 인재들을 선별하는 중입니다.”

“오오! 그럼 다 만들어지면. 우리 황궁에 데려올 거야?”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환관 왕진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주기진이 즐거워하며 웃었다.

“걔네가 다 만들어지면 황금 갑옷을 입히고 싶어. 번쩍번쩍하게. 다른 사람들이 보고 감탄할 만큼 화려했으면 좋겠어.”

“폐하의 수족이라면 능히 그러해야지요.”

“정말?”

“그럼요.”

“대련도 시키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한테 벌도 주고 그래도 돼?”

“물론이지요. 그들은 폐하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행할 것입니다.”

“삼국지연의의 오호대장군 같은 그런 걸까?”

“역시 영민하신 폐하. 바로 그런 거랍니다. 그럼 폐하께선 유비가 되겠군요.”

“오오!”

왕진은 기뻐하는 주기진의 기색을 슬쩍 살핀 뒤,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하 환관에게 손짓을 하여 양피지 두 개를 가져오도록 했다.

“폐하, 그들을 만들기 위해선 여기 이 두 개의 서류에 옥새를 찍어 주시면 된답니다.”

“옥새……?”

주기진이 조금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양 재상이 옥새는 함부로 찍지 말라고 그랬는데……. 어떤 내용이야? 이걸 찍으면 어떻게 돼?”

‘양사기……!’

환관 왕진은 평소와 다른 주기진의 모습에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정치적 내공을 총동원해 표정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양사기(楊士奇)는 동리선생(東里先生)이라고도 불리는 자로, 건문제를 지나 피의 숙청이 있었던 영락제는 물론, 홍희제, 선덕제 재위 기간까지 견뎌 낸 정계의 백전노장이었다.

명제국의 ‘살아 있는 역사’라고까지 칭해지는 재상이었으나, 그런 자도 나이는 못 속이는 법.

이제는 꼬장꼬장하고 고지식한 노인일 뿐이다. 게다가 환관 왕진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걸림돌이기도 했다.

‘쓸데없는 걸 가르쳤군. 양사기.’

환관 왕진은 활짝 웃는 얼굴로 주기진을 바라보았다.

“영민하신 폐하. 저는 언제나 폐하께 도움을 드리기 위해 일하고 있답니다. 그건 믿으시지요?”

“으응…… 그렇지. 왕 공공은 내가 가장 신뢰하는 신하야.”

“그런데 어찌 의심을 하시는지…… 제가 잘못한 게 있었나 반성하고 고민하게 되옵니다.”

왕진은 슬픈 기색을 내비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주기진이 조금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런 게 아냐, 왕 공공. 양 재상이 사적인 감정과 분리시켜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그랬어. 가족이라도 끊어 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진정한 군주가 될 수 있다나……. 그래서 그런 거야. 왕 공공을 못 믿는 건 절대로 아니니. 상심하지 마.”

“예. 그런 거라면…… 기쁘게 폐하의 의심을 받겠습니다.”

왕진은 씁쓸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첫 번째는 강호무림의 모산파에 도사(道士) 동원령을 내리는 칙령이옵니다. 신수에게 꼭 필요한 걸 만들기 위해서 무림문파인 그들에게 황제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지요.”

“신수에게 꼭 필요한 것?”

“신수를 신수답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도구이지요. 도사들만 만들 수 있답니다.”

“흐응, 그렇구나.”

주기진은 그다지 관심은 없어 보였다.

“다음 것은, 신수를 만들기 위한 일에 돈과 자재를 투입하는 것에 대한 폐하의 승인입니다. 돈을 ‘이 정도는 써도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돈? 얼마나 쓸 건데?”

“폐하. 황실에 수백 개의 궁이 있지요?”

“응. 아직 다 못 가 봤을 정도로 많아.”

“그중에 두어 개 지을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 이상은 필요 없어요.”

“뭐야, 별로 안 들어가네. 알았어.”

주기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형식적으로 서류를 쭉 훑어본 뒤 옥새를 ‘쾅’ 찍어 버렸다.

“역시 폐하. 사내다우십니다.”

“잘 만들어 줘, 내 신수.”

“실망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왕진은 옥새가 찍힌 양피지 두 개를 조심스럽게 갈무리한 뒤 종종걸음으로 빠져나왔다.

문(門)을 지나 나오는 왕진.

그는 허리를 쭉 펴며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은자 십만 냥을 얻었군. 이제 시작이야.”

왕진의 눈빛이 번뜩였다.

여기까진 간단했다.

이제부터 할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왕진은 마음을 가다듬고, 회의장으로 향했다.

***

명나라의 군문은 오호도독부에 의해 운영된다.

중, 전, 후, 좌, 우의 도독부가 각각 세 개에서 네 개 정도의 성을 관할하는 것이다.

성 하나만 해도 웬만한 소국의 크기인데 그런 성 서너 개의 병력을 관리하는 것이니, 정일품 도독의 자리는 일국의 왕 정도의 힘을 지녔다.

항상 반란을 염려해야하는 황실로서는 대단히 중요한 자리이고, 그렇기에 황실과 혈연으로 엮여 있는 공(公), 후(侯), 백(伯) 등의 귀족만이 도독의 자리에 앉아 왔다.

그럼 그 도독의 자리를 관리하는 것은 누구냐?

당연히 황제다.

하지만 지금의 황제는 열 살의 어린아이가 아니던가.

섭정인 태황태후 장씨의 신뢰를 받는 재상. 양사기가 도독까지 모두 임명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명제국의 실세는 양 재상이고, 그를 부정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만 빼고 말이지.’

환관 왕진은 가슴 속 야심을 꽁꽁 숨긴 채 양사기가 주최하는 비공식 회의에 참석했다. 좌석은 가장 끝 쪽, 말단의 자리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곳에 위치한 십여 명의 인물들은 모두 백작(伯爵)이상의 대귀족들뿐이었다.

“왕진. 자네가 올린 서류는 다 읽어 보았네.”

양사기는 왕진이 앉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탁’ 하고 서찰 하나가 탁자에 내던져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더군.”

“예에?”

왕진은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지금 반드시 필요한 것을 적어 서류로 올렸는데요.”

“관과 무림의 관계를 정녕 몰라서 하는 말인가?”

“그렇지만…….”

탕.

양사기는 깡마른 팔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흑시(黑矢)부대는 그런 데 쓰라고 만든 게 아니야. 그들이 존재한다는 게 알려지는 순간, 관과 황실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걸세.”

대(對) 무림인 전문 특수전투부대. 그게 흑시부대였다.

옆에 있던 백작 이상의 고위귀족이자 관직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암, 그렇지.”

“분란은 가능하면 없어야지.”

“아직 안전한데 뭘 새삼스럽게.”

왕진은 이를 갈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태한 버러지들. 남경 때의 일로 배운 게 하나도 없단 말인가.’

왕진은 몇 개 안 남은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며 애써 화를 참아냈다.

“관과 황실의 관계라…… 그런 게 있기는 했던가요?”

“무슨 말인가?”

주름진 눈꺼풀 아래, 양사기의 냉엄한 시선이 왕진을 꿰뚫어 보았다.

“외람되오나 황실에서 매번 숙이고 들어가 참아줄 뿐. 오히려 상대방이 화를 낼까 눈치만 보며 전전긍긍하는 건 황실 쪽이 아닌지요?”

왕진의 당돌한 발언이 끝나자마자, 사방에서 탄식과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허어, 감히!”

“환관 주제에 말이 심하군.”

“대명제국의 황실을 모욕하는 겐가!”

왕진은 고개를 꼿꼿이 세워 양사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로 지금이란 말입니다. 왜 보질 못하십니까? 그들의 전위(前衛)를 꺾고, 일망타진하여 그들이 기껏해야 힘이 좀 센 파락호일 뿐. 대명제국의 신민이란 사실을 잊지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만약 이 기회를 놓치고 그들이 방자하게 구는 것을 내버려 두면 장담컨대, 제 이의 강호관직론이 나오고, 날뛰는 무뢰배들이 생길 것입니다. 혹시 압니까? 남경을 또 빼앗기게 될 지도 모르지요.”

“허어!”

사방에서 불편한 헛기침 소리가 튀어나왔다.

강호관직론.

힘이 센 자가 통치해야 한다는 야만스러운 율법은, 영락제에 의해 사적 불가로 잊힌지 오래였다.

그들에게 있어선 무덤 속에 넣어 버린 망령이 다시 되살아난 것인 양 불편한 단어였던 것이다.

“위험한 말을 하는군. 허나 그래 봐야 생각일 뿐 아닌가.”

“생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실제로 바로 어제, 낙양에 있는 저의 집이 무림강호의 무뢰배들에 의해 처참하게 박살이 나고 말았지요.”

“그 이야기는 이미 보고받아서 알고 있네.”

양사기는 깡마른 손으로 옆에 있던 다른 서찰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동창의 말로는, 그곳에 모여 있던 무림인과 하인들이 모조리 잡혀갔다지? 집은 무너졌고?”

“예. 위험하기 짝이 없는 놈들입니다.”

“그렇군, 위험하군.”

양사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동조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래서 잡혀간 게 몇 명이나 되나?”

“서른 명 정도 됩니다.”

“서른 명이라.”

양사기는 허허 웃으며 자신의 길고 하얀 수염을 쓰다듬었다.

“고작 서른 명 때문에 흑시부대를 움직여라? 무림강호 전체와 척을 질 각오를 하게 되더라도?”

“……예.”

왕진은 당당했고, 양사기는 끌끌 혀를 차며 웃었다.

“자네는 달변가인 데다 말을 거창하게 하는 버릇이 있어. 그건 아랫사람을 설득하기는 쉽지만, 윗사람에게 믿음을 주긴 쉽지 않네. 특히 말만 앞서는 놈들을 많이 만나 본 나 같은 노인들에겐 더더욱 그렇지.”

“……제가 허풍쟁이란 말씀이십니까?”

“허허, 글쎄다. 그건 지켜봐야 알겠군.”

왕진은 역시 늙은 구렁이는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받아 버리고 싶지만, 아직은 왕진에게 힘이 부족했다. 지금은 그가 철저히 약자여야만 했다.

“환관 왕진.”

“예.”

“자네가 비밀리에 진행하는 일이 있더군?”

“……예.”

“폐하도 설득한 모양이던데……. 일단은 눈감아 주지. 황실의 지원도 무사히 지급될 걸세. 걸리는 건 없을 게야. 신수(神獸)란 위험하지만, 또한 유용하니 얼마든지 지원하지. 하나…….”

양사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후루룩 한 모금을 들이킨 뒤 조용히 내려놓았다.

“군사를 움직이는 건 불가(不可)! 그 정도의 힘을 행사하고 싶다면, 우리가 움직일 만한 이유를 제대로 준비해 오게. 그러기 전엔 대화조차 안 될 것이야.”

양사기는 냉철하게 선언했고, 주변 도독들도 이의가 없는 듯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왕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양손을 모아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반드시 준비해서 다시 오겠습니다.”

“허허, 기대하겠네.”

노쇠한 몸으로 부드럽게 웃으며 배웅하는 양사기다.

왕진은 침울한 안색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자, 등을 돌린 왕진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