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72화 (201/686)

3권 22화

제13장 환관 왕진(2)

“답답한 늙은이들.”

왕진은 궁 밖에서 기다리던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몸을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관모를 벗고, 옷깃을 젖히니 그나마 좀 살 것 같았다.

마차 안에서 기다리던 시종은 왕진에게 찻물을 건넸다. 그는 받아 들자마자 단숨에 벌컥 들이켰다.

“능구렁이 같은 인간들을 만나면 진이 빠진단 말이야. 이 짓도 할 게 못 돼.”

“고생하셨어요.”

왕진의 시종은 여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얼굴이 고운 소년이었다.

피부가 백옥처럼 뽀얗고 매끈했는데, 거기다가 입술이 사내아이답지 않게 시뻘게서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고생은 무슨.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비하면 이까짓 것은 고생도 아니지.”

“그래도 최근에 너무 쉬지 못하고 계신 것 같아요. 잠도 못 주무시고, 평소에도 하시는 일이 너무 많고…….”

“내가 못 쉬는 것 같다고?”

왕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선(鮮)아, 너는 쉰다는 게 뭐라고 생각하니?”

“네? 으음, 잠을 자거나, 원래 하는 일을 미뤄 두고 휴식을 취하는 것…… 아닐까요?”

“잘못 알고 있구나.”

선은 쉬이 가지 않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의문스러워 보였다.

“해야 할 일을 미뤄 두고 쉬는 건, 쉬는 게 아니야. 그때는 천하절경에서 신선놀음을 해도 쉬는 게 아니란다. 오히려 마음이 두 배로 괴로워. 너는 간절히 하고 싶은 걸 못 하고 있어 본 적이 있느냐?”

“……네. 있어요.”

“그럼 알겠구나. 해야 할 일을 못 하고 있을 때 얼마나 괴로운지.”

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좀 바쁜 거? 아무것도 아니야. 내 인생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살아온 것과 같아. 그깟 잠은 좀 못 자도 상관없단다.”

왕진은 자신의 오른쪽 손가락을 무심히 쳐다봤다. 그러고선 잘려 나간 부위를 매만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싸늘하게 웃는 그의 눈빛이 별안간 강렬하게 빛났다.

“왕 공공. 그 손가락에 대한 복수가 그 정도로 중요한가요?”

“오늘 좀 이상하구나. 질문이 많은걸?”

“……죄송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괜찮아.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지. 하나, 넌 착각을 하고 있구나. 나는 이런 사사로운 복수 때문에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란다. 보다 큰 그림을 보고 있지.”

“큰 그림이요?”

“그래.”

왕진은 두 개 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으로 선의 머리카락을 마구 흩트려 놓았다.

“……너도 언젠가 알게 될 거다. 하나 지금은 일이 우선이지.”

왕진은 마차 한쪽에 빼곡히 쌓여 있는 서찰들을 집어 들며 물었다.

“다음 회의 때까지 준비해 두려면 시간이 얼마 없어. 황실에서 지원은 약속받았으니, 이젠 얼마나 ‘준비하냐’에 달렸다. 흠…… 무산학관은 이제 더 이상 돈 들 일은 없지?”

“네. 학생들 부모의 기부금만으로도 은자 오백 냥 이상 남아요.”

“그럼 됐군. 하북 쪽은?”

“자재 구입에 은자 천백이십오 냥. 기관 장치를 설치하는 데 천오백 냥을 주기로 했어요. 문제는 하오문인데 아이들을 구하는 게 어려워 가격을 올려야겠다고 하네요.”

“가격을? 얼마나?”

“삼할 정도로…….”

“올려 줘.”

왕진은 무심하게 답했다.

“대신 또 한번 올리겠다고 하면 도철을 보내도록.”

“네.”

“하남은? 집혼기는 어떻게 되어가지?”

“그곳은 아직 준비 단계라 돈이 많이 들어갈 것 같아요.”

“얼마나?”

“자재로 천이백 냥. 인부들에게 칠백이십 냥. 시중에서 사들인 주술 도구가 팔백오십…….”

선은 정확한 숫자와 정보를 말하듯이 술술 내뱉었다.

한번 보면 무엇이든 기억하는 완전한 기억력.

그게 왕진이 선이라는 꼬마 아이를 자신의 곁에 두는 이유였다.

“다 지불해.”

“괜찮나요?”

“그래. 지금은 써야 할 때야.”

왕진이 마차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휙휙 지나가는 풍경 너머로, 너무나 거대해서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자금성 성벽이 보였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왕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

무림인(武林人).

세상에 이렇게나 강인하고 신비로우며 매력적인 단어가 또 있을까.

‘무(武)’라는 건 단순히 칼질을 잘한다는 뜻이 아니다. 실제로 중원 곳곳의 민가에선 관제상을 집안에 놓고 무력(武力)이 강해지게 해 달라고 매일 비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혈기왕성한 남자들만 비는 게 아니다.

다섯 살배기 꼬마아이부터 아이를 셋 낳은 어머니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기도했다.

혼란과 격변의 시기를 살아가며 사람들은 자신이 더욱더 강해지기를 원했다. 해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되길 바랐다.

그 바람과 희망을 먹고 태어난 게 ‘무림인’이다.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오로지 무에 놓고 살아가는 자.

무사(武士)이자 구도자(求道者).

스스로의 정신과 육체를 극도로 단련하여,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힘을 지닌 자들.

사람들이 무림인에 열광하는 것은 잘못된 게 아니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한계를 뛰어넘은 영웅들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탐관오리들을 징벌하는 협객(俠客).

민초들을 착취하는 도적 떼를 때려눕히고, 파락호들에게 훈계를 내리는 영웅들은 어린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라난다.

주어진 현실을 깨닫고, 내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을 내리며 세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명확하게 선과 악이 나뉘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배워 나간다.

남경 왕 씨 집안의 삼남이었던 진은 정확히 여덟 살 때 그 사실을 알게 된다.

“부모님은 어디계시냐? 꼬마야?”

추레한 몰골.

허름하고 헤진 옷차림.

누가 봐도 경계해야 할 모습이었지만, 무림인 같은 무복을 입고 허리에는 멋들어진 협봉검을 차고 있다는 것만이 꼬마아이에겐 중요했다.

무인이 때가 잔뜩 묻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이 기억나는 모습이었다. 마음에 빈틈이 생길 때마다 돌아오는 남자였다.

수백 번은 보았고, 수천 번은 더 생각했던 순간의 기억이다.

“두고 봐.”

왕진은 눈을 떴다.

***

“……공공, 왕 공공.”

왕진은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아름다운 소년, 선이 우물쭈물하며 왕진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뭐야?”

“손님이 오셨어요, 왕 공공.”

“……잠들었던 건가?”

왕진은 인상을 잠시 찌푸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얼마나?”

“일각 정도요.”

“그래?”

선은 자연스럽게 시원한 찻물을 내밀었다. 왕진은 역시 기특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찻물을 들이켰다.

“손님이 누구야?”

“모산파 강 장로예요.”

“들어오라 그래.”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던 손님이었다.

선의 안내를 받아 모습을 드러낸 강 장로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관리가 아닌가 착각할 만큼 냉혹한 얼굴을 지닌 노인이었다.

눈은 작고 날카로우며, 매부리코에 사나운 인상이었다.

머리엔 길쭉한 회백색 도관을 썼고, 하얀 수염을 가슴에 닿도록 길게 길렀다.

“처음 뵙겠소. 모산파에서 도를 닦고 있는 강기량 장로라고 하오.”

강 장로는 간략하게 포권을 취했다.

“황실의 왕진입니다, 반가워요.”

왕진은 빙긋 웃으며 강 장로를 반겨 주었다.

하나 강 장로는 표정을 굳힌 채 딱딱한 목소리로 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나 같은 도인과 달리, 바쁘게 사는 분일 테니 본론만 이야기하겠소. 본파로 날아온 황실의 공문은 보았소. 장문인께서 나에게 전권을 위임한 뒤 보내 주셨고, 어제 하남에서 건설 중인 도관에서 앞으로 할 일이 적힌 서찰을 보았소. 저 아이가 준 것이지. 그런데.”

모산파의 대장로. 강기량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할 수 없는 일이오. 불가능한 일이란 말이외다.”

“호오?”

왕진은 웃는 낯을 지우지 않은 채 되물었다.

“지금 강 도사께서 저잣거리의 쓰레기처럼 가볍게 들고 있는 그 ‘서찰’을 만들기 위해, 백여 명의 목숨과 은자 만 냥의 돈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도 불가능하단 말입니까?”

“……그렇소.”

강기량은 조심스럽게 서찰을 다시 내려놓았지만, 여전히 태도는 단호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사실 처음 봤을 때는 놀랐소. 이 정도로 주술에 대해 이해가 깊은 구상을 들을 거라곤 상상치 못했기 때문이오. 실제로 이 서찰에 적힌 것 중 일부는 우리 모산파에서도 장문인에게만 전수되는 비기(秘技)로 분류되는 기술이 있었소.”

“호오? 그렇군요. 그럼 잘된 것 아닙니까?”

“아니, 아니오. 비기로 지정된 것엔 이유가 있는 법. 천륜(天倫)을 어기는 일이기에 극도의 경계심을 갖고 대해야 하는 기술이라, 비기로 지정된 것이오.”

강기량은 훈계를 하듯 엄중한 눈빛으로 왕진을 노려보았다.

“이 구상도로 무엇을 하려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 건지 묻지 않겠소. 나는 이런 일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걸로 하겠소이다. 그러니 폐기하시오.”

“흐음.”

왕진은 재밌다는 듯이 콧소리를 냈다.

“강 도사님은 아무래도 상황을 잘못 파악하신 모양입니다.”

“뭐요?”

“황실 지존의 옥새가 찍힌 명령서입니다. 모산파에겐 그게 그리 가볍던가요?”

강 도사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굳어졌다.

“모함하지 마시오. 황실의 권위를 존중하니 내가 여기까지 온 것 아니오?”

“존중하니 여기까지는 와 줬다? 그러니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라? 무림인들의 사고방식은 언제나 이상하군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허어. 그대는 말을 자꾸 이상하게 꼬아서 하는군.”

강 도사는 불편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지만, 차마 화는 내지 못한 채 수습하듯이 말했다.

“이보시오, 왕 공공. 난 지금 이 구상도가 매우 위험하며, 사람으로서 건드려선 안 되는 영역을 건드리는 거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오. 황실의 권위라든가 하는 그런 것과는 일절 상관이 없단 말이외다. 천륜이오. 이것을 잘못 건드리면 크나큰 화가 되어 돌아올 거란 말이오.”

“그러니 상황을 잘못 알고 계시다고 말하는 거랍니다, 강 도사님. 이는 폐하께서 원하는 일입니다. 그건 어떤 거창한 이유를 대도 막을 수가 없지요. ‘하늘의 뜻이다’라고 생각하고 실행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황제는…… 신이 아니오.”

“네, 신은 아니지요. 하지만 하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천자(天子)라고 부르지요.”

“…….”

“그분께서, 산이 필요하다고 하시면 만들어 냅니다. 그분께서 강을 원하시면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분께서 모산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시면? 당연히 해야 한단 말입니다!”

“하지만 왕 공공…….”

“그런데 그게 싫다면?”

왕진은 얼굴에서 어느덧 웃음을 지우고 싸늘하게 말했다.

“할 수 없지요. 모산파의 사람들은 황실의 신민으로 살고 싶지가 않다는 뜻인데. 존중해 줘야겠지요. 모산파는 주춧돌까지 모조리 불태우고 장문인과 장로들은 역모죄로 다스리며, 모산파의 식구들은 모조리 국외로 추방시킬 것입니다. 황실의 동창은 그러라고 있는 기관이지요.”

왕진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강 도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농담인가? 아니면 속이 빈 위협?

그럴 리가 없다.

왕진은 자신의 말 한마디, 그에 섞인 숨소리조차 진심이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강 도사. 대답하세요. 당신의 판단, 모산파의 비기, 상관없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기회입니다. 황실에서 진행하는 일에 참여할 것입니까, 아니면 거절할 것입니까?”

“…….”

강 도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꽉 쥔 주먹.

노화로 일렁거리는 얼굴에선 극도의 살기마저 뿜어져 나왔다. 모산파라면 구파일방에 속해 있는 문파.

그런 곳의 대장로인 만큼 강 도사의 무공은 막강할 터.

하나 개인의 무력은 여기서 의미가 없다.

왕진의 머리를 일격에 터뜨릴 수 있는 무공이 있으면 무얼 하는가. 그는 여기서 철저히 약자의 입장이다.

무림과 관의 불가침 관계?

그것 또한 역모란 말이 나오면 의미가 없다.

강 도사는 결국 고개를 숙였다.

“……무엇을, 하면 되겠소?”

“그 구상도. 최소 네 개 이상 만들어야 합니다.”

“허어.”

“이미 시작품으로 성공한 사례가 있습니다. 모산파의 도사들이 동원되면 네 개 정도는 쉬이 만들어 낼 수 있겠지요.”

“엄청난…… 제물이 요구될 것이오.”

“지불하겠습니다.”

강기량 장로는 한숨을 내쉬며 구상도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가 있소. 시작품을 만들었다고 하셨었지요? 그리하면 이것을 몸에 받아들일 사람은,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오.”

“그건 걱정 마세요.”

왕진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다시금 부드러운 웃음을 얼굴에 머금은 채 차분하게 말했다.

“최고의 재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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