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23화
제13장 환관 왕진(3)
탁. 탁. 탁.
가늘고 긴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면서 걷는 맹인은, 사람들에게 있어 조롱의 대상이다.
일부러 그들의 길을 가로막거나, 앞에 장애물을 두기도 하는 장난꾸러기들도 있고, 몇몇 파락호들은 지팡이를 뺏어 부러뜨리려 하기도 했다.
오늘도 그러했다.
백호방의 삼 년 차 학생. 유준은 건장한 사내들 세 명에게 막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야야, 시끄러워. 왜 탁탁거리면서 돌아다녀?”
“눈 병신이면 집에나 있을 것이지. 뭘 그렇게 돌아다니려고 애를 쓰나 몰라.”
“그러게 말이야. 지가 나와서 뭘 할 수 있다고?”
세 사람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은은하게 술 냄새도 났다.
유준은 눈을 감은 채 그들 쪽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비켜 주시죠.”
“비켜 주시죠?”
세 사람 중에 가장 덩치가 큰 사내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네가 뭔데 비키라 마라야? 엉?”
“저는 지금 가 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래? 급해?”
“예.”
유준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덩치 큰 사내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감돈 건 그때쯤이다.
“그럼 여기 사이로 지나가 봐. 그 지팡이는 이리 내고.”
“……예?”
“여기로 지나가 보라고.”
덩치 큰 사내는 낄낄대며 웃고는 자신의 다리 사이를 가리켰다.
옆에 있는 두 사람이 자지러지게 웃으며 즐거워한다. 유준은 당혹스러워 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알겠습니다.”
유준이 허리를 굽혀 지나가려고 하자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진다.
그런 그를 말린 것은 옆에서 갑자기 나타난 거구의 청년이었다.
“그만두지 그래.”
“……넌 뭐야?”
덩치 큰 사내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가 움찔하며 들어 올렸던 주먹을 내렸다.
사내가 마을 어귀의 바위 같은 체구를 지녔다면, 지금 나타난 청년은 태산(泰山)에 있는 거대한 암석 같은 몸집을 지니고 있었다.
키는 사내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것 같았고, 어깨는 떡 벌어져있는 데다 한쪽 팔은 웬만한 여자의 허벅지 같은 크기다. 물론 덩치 큰 놈이 꼭 강한 건 아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차이일 때 비교할 수 있는 것 아니던가.
게다가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무복을 입고 머리카락 한 올 새지 않게 깔끔하게 머리를 묶은 모습은 청년을 비범케 보이도록 만들었다.
“너 뭔데? 장님이랑 아는 사이야?”
“안다면 아는 사이지.”
청년은 가만히 서 있는 유준을 힐끗 쳐다본 뒤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구해 줄 의리도, 필요도 없지만 너희가 하는 일이 너무 저열해서 가만히 볼 수가 없군. 지금 당장 돌아가라. 그리고 너희의 천박함을 반성해라. 상대의 약점을 씹고 물어뜯어야만 자존감이 생기는 하찮은 인생이라니. 구토가 나오려 하는군.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냉철하면서도 신랄한 말투를 지닌 청년이었다.
덩치 큰 사내가 울컥해서 다시 주먹을 들어 올리려는데, 옆에 있던 두 사람이 황급히 그를 말렸다.
“야야, 그만둬.”
“무산학관이야, 무산학관.”
소곤거리며 말했지만 안 들릴 리가 만무하다. 덩치 큰 사내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가 결국 주먹을 다시 내렸다.
“카앗 퉤!”
사내는 길가에 침을 뱉고는 사나운 눈빛으로 거구의 청년과 유준을 노려본 뒤 샛길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무표정하게 서 있는 유준과, 거대한 체구의 청년뿐이다.
“이태산 방장.”
유준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감사를 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덕분에 곤란을 벗어났군요.”
“흥.”
이태산. 현무방의 방장이자, 현재 무산학관에서 교관을 제외하곤 신력(身力) 최강의 청년. 그가, 유준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백호방 불패검(不敗劍) 유준. 넌 무공을 왜 익히는 거지?”
“무슨 말씀이신지?”
“무산학관의 학생이라면 적어도 정의와 질서를 위해 무공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방금 같은 자들에게 굽힌다면 우리가 무공을 익히는 의미가 없을 터. 다른 사람들이 저들에게 조금 전의 너와 똑같은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 건가?”
“아아. 그 말이었군요.”
유준은 무심하게 답했다.
“그저 귀찮았을 뿐……. 그들과 싸우면 더 귀찮아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비겁한 변명이다.”
“그렇게 들리신다면 어쩔 수 없죠. 저는 제 일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역시, 넌 마음에 들지 않아.”
유준은 얼음에 금이 간 듯한 미소를 지었고, 이태산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콧김을 내뿜었다.
“네 최근 행적이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나?”
“제가 그랬습니까?”
유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의문을 표했다.
“밖으로 나가는 빈도가 너무 잦더군. 이유가 있나?”
“……개인적인 사정입니다. 현무방이 학관 내의 규율을 담당한다지만 개인 사정을 건드릴 권한은 없을 텐데요?”
“물론이다. 하나 누군가는 항상 널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기억하지요.”
유준은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뒤, 다시 지팡이를 두드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태산은 그런 유준을 불편한 기색으로 끝까지 주시한 뒤, 곧 몸을 돌려 사라졌다.
***
유준에게 시비를 걸었던 세 명의 사내들은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하고 을씨년스러운 낡은 관제묘였다. 아무도 없는 경내의 소로(小路)를 걸어 평소에 그들이 드나들던 비밀 입구로 향했다.
비밀 입구는 항상 그랬듯이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관제상 오른쪽에 위치한 탁자를 옆으로 밀면, 문을 여닫을 수 있는 바닥이 보인다.
바닥을 열면 언제나 그렇듯 퀴퀴한 지하 냄새가 피어오르고 기분이 불쾌해지지만 그래도 그들은 몇 년째 이곳을 내려가고 있었다.
잠깐의 불쾌감만 꾹 눌러 참으면 언제나 한 달은 족히 술을 먹을 수 있는 돈이 생기는 것이다.
세 사람은 오늘따라 유난히 이곳에 지하 냄새가 지독하다고 생각하며 키득거렸다.
반 각가량을 내려가자 ‘쿵’ 하고 철문이 굳게 닫혔다.
세 사람은 어리둥절했다.
원래는 이쯤에서 누군가가 마중 나와서 무서운 얼굴로 안내해야 했다.
그런데 쥐 죽은 듯이 고용한 가운데 어디선가 ‘똑. 똑’ 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나고 있는 것이다.
“뭐야……?”
세 사람은 어깨를 움츠린 채 평소에 가던 방향으로 움직였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드문드문 꽂아 놓은 횃불만 활활 타오르니, 그들은 괜히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 덕분에 지하 공간에서 유일하게 방문이 살짝 열려 있는 방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고, 그 안의 광경을 보자마자 충격에 휩싸여 헛바람을 들이켰다.
“헛.”
“흐읍.”
원래 사람은 너무 놀라면 비명이 나오지 않는 법이다.
세 사람은 눈을 부릅뜬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피.
새빨간 피가 홍수라도 난 듯 바닥을 적시며 넘쳐흐르고 있었다.
시신이 몇 구인지 셀 수도 없었다.
십, 이십. 이십 단위가 넘어간다는 것만 대충 알 수 있을 뿐이다.
“어어…….”
그때 세 사람 중 한 명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물론 그가 가리키지 않아도 모두의 시선은 이미 그곳에 꽂혀 있었다.
피투성이 시신들 한 가운데 그 사람이 있다.
새하얀 옷을 입고, 지팡이처럼 가느다란 검을 한 남자의 목에 겨눈 자.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이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 보라며 놀렸던 맹인이니까.
“말도 안 돼……!”
그들이 눈앞에 닥친 현실을 믿지 못하고 있는 사이, 맹인 청년이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본 분들이군요.”
차분한 모습.
감정이 들어 있지 않은 말투.
사내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 아까는 몰랐을까.
분명히 눈을 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손끝부터 발끝까지 전신이 해부를 당하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별로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여 줬군요. 흑잠문주. 저들은 누구입니까?”
“크윽…….”
맹인의 검에 겨눠진 중년의 사내가 부들부들 떨면서 외쳤다.
“괴물 같은 놈……!”
낙양제일의 살수문파 흑잠(黑蠶)의 문주는 치욕감과 공포가 섞여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는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유준은 검으로 살짝 목의 살갗을 긁어내는 것으로 재촉했다.
‘칙’ 하고, 마치 두부가 썰리듯 살갗은 너무나 쉽게 상처를 입었다.
흑잠문주의 눈빛이 독해졌다.
“내가 알게 뭐냐.”
“…….”
무표정한 유준과 분노에 찬 흑잠문주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대답은 사내들 쪽에서 나왔다.
“저,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가끔 일을 도와 달래서 도와줄 뿐. 여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 그럼 이만……!”
세 사람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어느새 그들의 눈앞에는 유준이 서 있었다.
“어?”
얼빠진 목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했다. 밤중에 귀신을 만난 듯 공포감이 세 사람을 혼란에 빠뜨렸다.
“우와악!”
“그러고 보니, 당신들이 간 뒤에 훈계를 들었습니다.”
세 사람 중, 한 명의 목에 칼이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왔다.
“커헉.”
피를 분수처럼 뿌리며 무릎을 꿇는 한 사내.
어떻게든 상처를 손으로 막으려고 버둥거리던 그는 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진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으아아악!”
사내들은 어린아이 같은 비명을 질렀다.
은어처럼 빛나는 칼날이, 등을 돌리고 도망치려던 사내의 허리를 부드럽게 가르고 지나갔다.
푸확.
살갗이 찢어지고, 내장과 피가 함께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명.
“으……어, 으아아!”
네발로 기어 도망치는 사내의 뒤에서 유준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정의와 질서를 위해 힘을 사용해야 한다? 그건 모르겠지만…… 당신들은 봐선 안 될 걸 보았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당신이 말했었지요? 다리 사이로 지나가면 보내 주겠다고.”
유준이 양 다리를 넓게 벌렸다.
“지나가시겠습니까?”
“!”
사내의 눈빛이 흔들린다.
그는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허둥지둥 네발로 기어 유준의 다리 사리로 지나가려 했다.
푹.
마치 곤충을 박제하듯, 날카로운 칼날이 네발로 기는 사내를 관통했다.
유준은 양손으로 검을 잡은 채, 아래로 내리꽂은 상태였다.
벌벌 떨리는 사내의 손이 버둥거리며 유준의 다리를 붙잡으려 했다. 유준은 사내의 손을 발로 밟았다.
“옷에 피가 묻는 건 안 좋아합니다.”
유준은 사내의 숨통이 끊어지는 것은 손끝으로 확실히 느낀 뒤, 칼을 뽑아내고 왼손에 들고 있던 천으로 칼날을 닦아 냈다.
“괴물 같은 놈.”
그사이 방치되어 있던 흑잠문주가 질린 듯한 얼굴로 유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살면서 온갖 군상들을 보았지만, 너 같은 놈은 처음이다.”
유준은 얼음에 금이 간 듯 미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가요? 천하에서 살수 서열 십 위 안에 드는 분이 이렇듯 인정해 주시니 감사하군요.”
흑잠문주는 코웃음 치며 되물었다.
“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
“제가 원하는 건…….”
말을 꺼내기 위해 막 입을 열던 유준의 등 뒤 사각지대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다른 하나는 아래에서 위로 솟구쳤다.
살수의 암습이란 이런 것이다.
정해진 규칙 없이, 상대가 가장 방심하는 순간을 노려 온다.
유준은 당황하지 않았다.
칼을 닦아 낸 천을 위로 던진 뒤, 부드럽게 반회전하며 칼을 대각선으로 휘둘렀다.
서걱.
위에서 달려들던 살수의 가슴에서 섬뜩한 소리가 났다.
살수는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단검과 암기를 내던졌지만 유준은 머리와 어깨를 살짝 뒤트는 것만으로도 피해냈다.
파라라락.
아래에서 솟구친 살수는 손바닥보다 조금 긴 소도(小刀) 두 개를 날카롭게 찔러 왔다. 목과 가슴의 요혈을 노려 오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유준은 무릎이 가슴에 닿을 만큼 몸을 낮게 낮췄다가, 다시 몸을 일으키며 세검을 수직으로 끌어올렸다.
마치 땅바닥에 선을 긋듯, 너무나 쉽게 살수의 턱에 실선이 그어졌다.
푸화악.
무너져 내리는 살수의 몸에서 뿜어진 핏물은, 언제나 그랬듯 유준의 몸에 닿지 않았다.
툭 위로 던져 뒀던 천이 다시 유준의 손으로 떨어졌다.
유준은 자신의 칼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부드럽게 다시 몸을 돌려 흑잠문주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게 서 있는 새하얀 옷의 유준.
그의 양쪽에서 피를 뿜는 살수의 시신 두 구가 바닥을 나뒹군다.
“한번만 더 특급살수를 이런 데 소진하시면, 모조리 죽인 뒤 다른 살수문파를 찾겠습니다.”
흑잠문주는 질린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