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74화 (203/686)

3권 24화

제13장 환관 왕진(4)

환관 왕진은 기묘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얇고 가는 대나무 막대 몇 개 집어서는 탁자 위에 세우는 중이었다.

젓가락보다도 가늘고 밑이 뭉툭하지 않은 대나무 막대는, 애초에 홀로 설 수 없다.

그러나 대나무 막대 몇 개를 서로서로 기댈 수 있게 모아 두면 마치 거대한 탑처럼 우뚝 서게 된다.

왕진은 그 순간이 좋았다.

모든 것이 맞물려 하나로 합쳐지는 그 순간이.

“왕 공공, 드릴 말씀이…….”

“쉿.”

왕진은 그에게 말을 거는 선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젓고는, 묵묵히 ‘대나무 세우기’를 계속했다.

그의 양손은 미묘한 조정을 거듭하고 있었다.

대나무 막대 각각의 무게중심을 손끝으로 느끼며 모두의 무게가 지탱되는 그 순간을 위해 신중히 움직였다.

슥.

“됐다……!”

마침내 왕진이 손을 뗐다. 비스듬하게 세워진 대나무 막대들은 서로가 서로를 지탱한 채로 튼튼히 버텼다.

왕진은 그제야 몸에서 긴장을 풀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선아.”

“네.”

“의미도 없는 이 짓을, 내가 왜 계속하고 있는 줄 아느냐?”

“잘…… 모르겠어요.”

선은 현명한 소년이었다.

본능적으로 나설 때와 그러지 말아야 할 순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해서 선은 쉬이 아는 척하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단다. 한데 약점, 그다음이 항상 중요한 거란다. 그것을 그대로 놔둘 것인지, 아니면 부족한 것들을 채워서 무엇인가를 이뤄 낼 것인지 말이야. 그것에서부터 성공할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가 생긴단다.”

선은 잠시 골똘히 생각했지만, 결국 언제나처럼 순박한 얼굴로 고개만 갸웃할 뿐이다.

“역시…… 저는…… 잘 모르겠어요.”

왕진은 선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며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잔잔하게 웃었다.

“결과는…… 하늘만이 알겠지.”

왕진은 서로서로 맞댄 대나무 막대 탑을 손가락 끝으로 툭 건드렸다. 대나무 막대 탑은 잠시 흔들렸지만 끝내 쓰러지지 않았다.

***

화창한 오후였다.

햇살은 반짝이고 살랑거리는 바람이 근처의 수풀을 흔든다. 나른한 표정의 젊은 사내는 짐마차의 마부석에 앉아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짐마차의 움직임은 느긋했다.

젊은 사내는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있었는데 짐마차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도무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온몸으로 지루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축 늘어진 어깨와 초점 없는 눈, 그리고 삐죽거리는 입술이 그것을 방증했다.

쓸쓸한 바람이 한 번 스쳐 갈 때쯤이었다.

‘틱’ 하고 마차 바퀴에서 튕겨 나간 돌멩이 하나가 관도 옆 수풀로 날아갔다.

“보내 주시오.”

뒤쪽 짐칸에서 들려오는 강직한 목소리에, 앞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사내 몽도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으며 대답했다.

“안 돼.”

“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소.”

“몇 번을 말해도 안 돼.”

“몇 번이라도 계속 말할 것이오. 보내 주시오.”

몽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집스러운 놈.’

그는 지금 맡은 ‘이 일’이 자신의 성격과 너무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미래의 낭인 왕’ 몽도는, 사람 대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으니까.

“어이, 젊은 기갑문주 씨.”

“그렇게 젊지는 않소.”

“하핫. 웃기네. 아주 재밌어.”

몽도는 정색하며 표정이 굳어졌다.

“잘 들어. 내가 이 일을 장난으로 맡은 것 같아? 원래 이렇게 사람 상대하는 일은 나랑 안 맞아. 돈 몇 푼에 맡았던 일이었으면 당장이라도 위약금 물고 때려치우고 싶은 사람이 바로 나라고.”

짐칸에 앉아 있던 젊은 기갑문주, 남도화는 잠시 침묵한 후에 대답했다.

“당신은 낭인이 아니오?”

“낭인이지. 그것도 조만간 낭인 왕이 될 거물급 낭인!”

“이해가 되질 않소. 낭인은 돈이 되는 일은 뭐든지 하는 것 아니오?”

“거물급은 달라.”

원래 진정한 거물급은 자신의 입으로 거물이라 말하지 않는 법이지만 몽도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말했다.

“그럼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 일을 맡은 것이오?”

“당연한 걸 뭘 물어. 이 세상에 돈보다 중요한 건 하나밖에 없지.”

몽도는 자신의 턱 밑에서 번뜩이던 한 쌍의 장군검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당연한 것?”

남도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되물었다.

“명예…… 때문이오?”

“그건 무슨 개소리야?”

몽도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남도화는 안색이 창백했으나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몽도의 두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허어, 눈빛 봐라?’

몽도는 속이 묘하게 비틀렸다.

“거기서 명예가 왜 나와? 제정신이야?”

“나는 물론 제정신이오.”

“젠장, 명예는 얼어 죽을. 그런 건 저잣거리 국숫값도 안 돼. 돈보다 중요한 건 목숨이지. 그런 당연한 것도 몰라? 생긴 것도 샌님이더니. 생각하는 것도 딱, 샌님이구만.”

몽도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남도화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난 목숨이 명예보다 중요하다는 당신 말이 더 이상하게 느껴지오.”

“뭐?”

“당신이야말로 생긴 것도 낭인이더니, 생각하는 것도 낭인이구려.”

몽도의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히히힝.

짐마차를 끌던 말이 투레질을 하며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늦췄다. 몽도가 기가 찬 얼굴로 고삐를 잡아당긴 탓이다.

“끄응.”

몽도는 시뻘게진 얼굴로 뭐라 말하려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내가 말을 말자. 말을 마.”

“할 말 있으면 하시오. 사내대장부답지 않소.”

“어설프게 도발하지 마. 안 통하니까.”

몽도는 혀를 차며 짐마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 몽도는 툭 던지듯이 물었다.

“네가 꼭 해야 할 일이 뭔데?”

“……동생을 데려와야 하오.”

“데려온다고?”

“무쌍귀를 만나 보니 알겠소. 복수는 무의미하오. 복수하겠다고 뛰쳐나간 동생을…… 다시 데려와야겠소.”

몽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쯤 풀렸을 뿐이다.

“왜 혼자 잡혀서 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오.”

“거기서 잡힌 인간들은 각자 다른 길로 호송되고 있어. 가면 다 만날 테니 걱정 마.”

“구 대인과 다른 분들 모두 말이오?”

“구 대인? 녹림마왕 말인가?”

“그렇소.”

“그래, 다 그리로 가고 있어.”

“우린 어디로 가는 거요?”

“동창 본부.”

“허?”

이번엔 남도화가 헛웃음을 흘렸다. 몽도는 ‘흥’ 하고 코웃음 쳤다.

“거짓말 아닌데?”

“……진짜란 말이오?”

“당연하지.”

남도화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무쌍귀에게 복수를 결의했던 대천문의 수장이 바로 환관 왕진이다.

그리고 환관들이 가장 깊게 관여하고 있는 곳이 비밀 정보기관인 ‘동창’ 아니던가.

헌데 자신들을 동창으로 호송한다?

그는 이게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이, 자꾸 보채니까 하는 말인데. 난 그쪽을 어떻게 할 생각 없어. 의뢰 내용도, 그저 그쪽을 몸 다치지 않게 데려다주라는 거였고. 그러니까 괜히 일을 어렵게 만들지 말자고. 알았어? 뒤에서 쫑알거려서 날 귀찮게 하지도 말고 말이야.”

몽도는 다시금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치 들고양이 같은 사내였다.

신경질적인 깐깐함과 만사가 귀찮은 나른함이 공존한다.

“으음…….”

남도화는 그제야 꼿꼿이 세우고 있던 자세를 조금 무너뜨렸다.

남도화가 복잡한 내심이 드러나는 얼굴로 뭔가를 물으려 할 때였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소. 당신은 무쌍귀와는 어떤……?”

“잠깐.”

몽도가 짐마차의 속도를 늦추며 남도화에게 손짓했다.

“가만히 있어 봐. 이상한 짓하지 말고.”

몽도는 낮은 목소리로 남도화에게 경고했다.

심각한 분위기를 느낀 남도화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몽도는 마차를 완전히 멈춰 세우며 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여인에게 물었다.

“아가씨. 거기에 서 있으면 지나갈 수가 없는데?”

“도와주세요!”

나이는 이십 대 후반쯤 되었을까? 여인은 허름한 천을 외투처럼 두르고 있었다.

드러난 얼굴의 미색은 고운 편이고, 피부 또한 깨끗했다. 여인은 갓난아이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천으로 싸서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길을 잃었습니다. 부디 저와 제 아이를 다음 마을까지만 태워 주시면 안 될까요?”

여인의 목소리가 매우 절박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누구든 도와주고 싶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몽도는 그 여인을 삐딱한 자세로 바라보다가 마차에서 성큼 뛰어내렸다.

“아이가 아픈가? 한데 안 우네?”

“약해서 울 힘도 없는 아입니다.”

“그래? 그럼 한번 보지.”

몽도가 가까이 다가간 그 순간이었다.

구름이 살짝 걷히며 햇빛이 여인을 비췄고, 여인이 소중하게 안고 있던 보자기에서 반짝이는 반사광이 흘러나왔다.

아기 보자기에서 반사광이라니?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른다.

몽도와 여인.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피슈슉.

챙!

몽도가 펑퍼짐한 소맷자락 속에 숨기고 있던 기형도가 허공에 검은 잔상을 만들어 냈다.

여인이 화살처럼 쏘아 낸 단검 다섯 개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쯧.”

몽도는 으레 예상했다는 듯 차가운 눈빛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누가 보냈어?”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의 풍부한 감성은 어디로 갔는지 시체처럼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허름한 겉옷을 집어 던졌는데, 안쪽에 빼곡히 매달려 있던 화기가 일제히 폭발하며 뿌연 연기가 사방을 잠식했다.

“이런 씨……!”

몽도는 당황했다. 상대는 전문가였다. 그가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어느새 주변은 살기로 가득 찼다. 몽도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는 체면도 불구하고 바닥을 굴렀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뿌연 연기 속에서 하나의 섬광이 번뜩였다.

챙! 챙! 챙!

잠깐 사이에 수십 합의 공격과 방어가 교차했다.

날아온 단검이 몽도의 왼쪽 귀를 픽― 하고 스쳐 지나간 순간, 그는 두 눈을 짐승처럼 번뜩였다.

자세를 낮추고, 바짝 당겨진 허리의 근육을 한계까지 비틀었다.

온몸이 홱― 돌아가면서 왼손으로 잡고 있던 거무튀튀한 역수도가 강렬한 바람 소리를 내며 수직으로 상승했다.

“컥.”

여인은 단검 두 개로 공격을 막았지만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튕겨졌다.

단검의 날은 깨졌고, 여인의 양손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런데 눈빛이 이상하다.

당황하는 게 아니라 득의양양한 모습이다.

몽도는 생각했다.

확실히, 예전에 얇은 칼을 쓸 때보다 지금의 그는 더욱 강해졌다. 장강용왕이 무기를 바꿔 주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두 배는 강해진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말이지.’

몽도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낮추고 사방을 경계했다.

뒤로 날려간 여인은 연기 속에서 기척을 감추고 있었다.

언제 덤벼들까?

자세를 낮추며 기다리고 있는데, 연기 저편에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녀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조력자들도 덤비지 않을 듯한 분위기였다.

잠시 후, 연기가 바람에 흩어져 가라앉았을 때 제자리에 서 있는 건 몽도, 그 한 사람뿐이었다.

“뭐야, 이거?”

사투를 각오하고 있었던 몽도였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상대는 전문가.

그것도 일급이 아닐까 싶은 전문적인 살수들이다.

헌데 음식 간을 보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살짝 찔러만 보고 순순히 사라진다?

“어? 잠깐만.”

무언가를 깨달은 몽도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이내 경악한 얼굴로 짐마차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했음을.

“안 돼. 야, 샌님. 안 된다고!”

복부엔 단검이, 관자놀이엔 화살이 박힌 남도화.

몽도는 몇 번이나 그를 흔들어 보았다. 하지만 반응이 없자 멍한 얼굴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난 이제 죽었다.”

***

유난히 많은 먹구름이 모여든 새벽녘.

무림 문파 청성파의 산문으로 서찰이 하나 전해졌다. 산문을 지키던 청성파의 이대 제자는 서찰을 읽자마자 안색이 파랗게 질려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고요했던 청성파는 누군가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산문에선 경종을 계속 울렸고, 일각의 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모든 청성 제자 이백여 명이 일제히 산문 앞으로 집합했다.

잠시 후, 평소에 과묵하기로 유명한 청성파의 장문인, 적하진인이 맨발로 뛰쳐나와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사제!”

적하진인의 질끈 감은 눈꺼풀 사이로 뜨거운 분루가 흘러내렸다.

“내가 누누이 잊으라고 말했건만……!”

적하진인은 묵묵히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눈을 떴다. 스산한 바람이 청성파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분위기에 압도당해 숨죽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선언했다.

“일대 제자 절반은 지금 이 순간부터 나와 함께 하남으로 간다. 소림에 가서…… 진상을 밝힌다. 이는, 대 청성파 장문인으로서의 마지막 명령이다.”

적하진인은 품 안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는 옥패를 꺼내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청성 제자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장문인의 직위마저 포기하는 절대의 명령이다.

어찌 따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존명!”

청성의 모든 제자가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결연하게 외쳤다.

같은 시각, 하북 최강을 자처하는 기갑문, 요동 지방의 녹림십팔채, 그 외 기타 다섯 개의 중형 문파에서도 최정예 무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행선지는 똑같았다.

하남.

모든 무공의 처음이자 끝이라 불리는 무의 성지. 모두의 목표는 숭산 소림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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