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25화
제13장 환관 왕진(5)
하얀 구름이 정상에 걸려 있는 태산의 한 봉우리로부터 산중 대호의 포효 같은 절규가 터져 나왔다.
“아버지!”
거구의 사내가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덥수룩한 수염에 아무렇게나 뻗친 머리. 두 눈에선 짐승 같은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입은 옷이라고는 허리에 감은 호랑이 가죽이 전부였다.
떡 벌어진 어깨에선 불룩 솟은 승모근이 꿈틀거렸고, 그가 양 주먹을 꽉 움켜쥐자 손등에서부터 시작된 힘줄이 팔꿈치까지 치솟았다.
그는 태산의 ‘젊은 호랑이’라고 불렸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렇게 불렸고, 지금까지도 별명은 바뀌지 않았다.
태산에는 녹림마왕이라고 불리는 너무나 큰 호랑이가 있었기에 그는 아무리 나이가 들고 강해져도 계속 젊은 호랑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시대가 끝났다.
노호는 사라졌고, 젊은 호랑이는 태산의 왕좌를 이어받을 때가 온 것이다.
“으하하하! 하하하하하!”
웃음인가 울음인가.
거구의 사내가 어떤 심정인지는 본인만이 알리라.
한 사람의 외침에 태산 전체가 온통 뒤흔들리는 듯했다. 정렬해 있던 일백 명의 산중호걸들은 어깨를 움츠리고 그런 그의 눈치만 살필 뿐이다.
“이러려고 내려갔수? 이렇게 허무하게 뒈지려고? 마왕의 칭호는 얻다가 팔아먹었기에? 자랑하던 호도팔법은 써 보기나 한 거요? 뭘 했기에 화전촌 패잔병 따위에 당해! 이럴 거면 차라리 태산에 그냥 처박혀 있지! 뭣하러 나서서는!”
태산 청호는 등에 비스듬히 메고 있던 대도를 뽑아 옆에 있는 바위에 내리꽂았다.
지켜보던 부하들 사이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단단한 바위에 칼이 꽂히는데 마치 진흙에 나뭇가지를 꽂는 것처럼 둔탁한 소리밖에 안 났다.
호도팔법이 극성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증거였다.
“이럴 거면…… 차라리 당신은 내 칼에 죽었어야 했수.”
청호는 뜨겁게 숨을 씨근거렸다. 짐승 같은 안광에 살기까지 더해졌다.
“태산박의 명성을 더럽히다니. 대체 어떤 놈들인지 얼굴이나 봐야겠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곧장 성큼성큼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태산의 젊은 호랑이는 계산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뿐이다.
태산박의 호걸들은 잠시 당황하다가 그런 청호의 뒤를 따라 일제히 하산하였다.
***
대명 제국 황실 내부의 심처.
새카만 관복에 단정한 관모를 쓴 채 오후의 일과를 집행하던 부운화는 뜻밖의 방문을 받았다.
방문자는 그가 썩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었는데 심지어 반갑지 않은 소식까지 가지고 왔다.
부운화는 불편한 내심을 숨기지 않았다. 업무용 탁자 아래에는 언제나처럼 한 쌍의 장군검이 새파란 칼날을 감추고 있다.
이 검들을 오늘 사용해야 할 것인가?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부운화의 전신에선 싸늘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저기 그게…….”
반면에 방문자는 좌불안석이었다.
임무 중에 찢어진 옷도 일부러 갈아입지 않고 왔는데 상대방으로부터는 손톱만큼도 봐주는 기색이 없었다.
‘꿀꺽’ 하고 몽도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몽도는 언제 어느 때건 자신감과 패기를 잃지 않는 사내였으나 유독 부운화 앞에서는 마치 훈장님께 혼나는 소동처럼 기를 펴지 못했다.
“그래서?”
부운화는 꽤나 오랜 시간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다 죽었다는 건가?”
“그, 그래.”
“내가 안전하게 호송해서 오라고 한 포로들이 다 죽었다고?”
부운화는 믿기지 않는 듯 거듭 물었다.
“……그래. 따로따로 호송하던 스무 곳이 전부 당했어.”
“이상하군.”
고개를 갸웃하는 부운화의 두 눈에선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다 죽었는데……, 너는 왜 살아 있는 것이지?”
몽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솔직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당황스러운데…….”
“낭인. 진지하게 묻겠는데. 무능한 건 둘째치더라도 혹시 습격자들과 미리 알고 있었나?”
“이보셔.”
몽도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내가 이런 실패를 한 건 처음이야. 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 건 분명한데…… 그렇다고 내 자존심까지 짓밟지는 마.”
“아직 기가 살았군.”
조용히 앉아 있던 부운화로부터 거대한 기세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몽도는 눈을 부릅떴다.
차기 낭인왕의 자존심을 걸고 버텨 보려 해도, 자연히 숨이 거칠어지고 손끝이 떨려 왔다.
‘뭔 놈의 기세가.’
오금이 저리고 전신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내 의뢰는 포로들을 ‘무사히’ 데려오는 거였다. 내 말이 틀린가?”
“……아니.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잘났다는 듯 입을 놀리는 건가? 혼자만 살아 돌아와 놓고 의심받지 않기를 바라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주위를 압도하는 무언가가 부운화에겐 있다.
“큭…….”
몽도는 고개를 푹 숙였다가 다시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따지면 이쪽도 할 말이 있다고. 스무 곳이 한꺼번에 당했다니. 이건 전례가 없는 일이야. 상대가 엄청난 규모의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 거대한 조직이라는 뜻이지. 난 이 정도의 상대가 우릴 노리는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고.”
“상대가 달라지면? 너희가 하는 일이 달라지나?”
“그건 아니지만……. 좀 다른 방식으로 대비를 했겠지.”
“핑계다.”
부운화의 눈빛이 차갑다.
몽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핑계지……. 면목이 없어. 경우야 어찌 되었든 간에 난 의뢰를 실패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낭인의 규칙에 따라 대가를 치를 테니.”
“대가를 치른다? 자신만만하시군?”
“사나이 몽도는 두말하지 않는다.”
“그래? 정말로 어떠한 대가든 치를 건가?”
“설령 목숨이라도.”
낭인 세계에서의 실패는 곧 평판의 추락. 그리고 평판의 추락은 낭인으로서의 목숨을 잃는 것과 같다.
“끝까지 꼿꼿하군.”
찢어진 옷을 입고 흙투성이의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몽도의 자긍심까지 더러워지진 않았다.
상처 입은 야수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결연했다.
“덮어 둬.”
부운화는 고개를 저었다.
“……뭐?”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대신 놀지 말고 일이나 더 하도록 해라.”
이렇게 순순히 봐줄 거라 생각하진 않았던 걸까? 몽도는 멍한 얼굴이 되고 말았다.
“뭘 그렇게 놀라?”
“아니. 정말로…… 그냥 넘어간다고? 괜찮은 건가? 이번 일?”
“아니, 괜찮지는 않지. 이번 실패는 뼈아프다. 후폭풍을 생각하면 수습하는 데 골치 아파지겠어.”
“그런데……?”
“그럼 뭐. 죽이라고? 네 목을 어디다 쓰나. 저 진열대 위에 장식이라도 하나?”
몽도는 미묘한 얼굴로 부운화가 가리키는 진열대를 바라봤다. 휘황찬란한 황금빛 염료로 임명(任命)이니 치하(致賀) 같은 글자가 적혀 있는 위압적인 붉은색의 서찰들이 줄지어 꽂혀 있는 자리다.
“안 어울리긴 하겠군.”
“내 말이 그 말이다. 그 어벙한 얼굴은 아무리 잘 봐줘도 내 진열대 바닥에도 놓기 부족해.”
부운화는 꼿꼿했던 자세를 풀고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그것만으로도 부운화의 인상이 변했다.
불혹의 나이에 가깝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매끈한 얼굴에 싸늘한 웃음이 걸리니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몽도는 사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운화를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이상한 표정이군. 뭘 기대한 거지? 아. 혹시 평생 노예로 삼아 주길 기대한 건가?”
“그게 무슨 징그러운 소리야?”
부운화가 살짝 웃었다.
몽도는 당황스러웠지만 그 덕분에 평소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되찾았다.
“만날 얼굴 보긴 지겨우니까 일은 하나만 더 하도록 해.”
“하나…….”
“왜, 아쉽나?”
“그럴 리가!”
몽도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부운화는 곱게 자란 것처럼 멀끔한 인상이었지만 사실 대군을 지휘한 적도 있는 능수능란한 사내다.
특히 낭인 같은 거친 사내들에겐 익숙할 대로 익숙하니. 몽도는 그 사실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 ‘하나’는 쉽지 않을 거다. 각오하고 있어.”
“……알겠다. 다음번엔 절대로 실패하지 않겠어.”
“믿어 보지. 미래의 낭인왕.”
몽도는 결연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홀로 남은 부운화는 좌측의 어두운 공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쓸 만해 보이지?”
“예. 과연, 낭인계에서 차세대 왕 후보로 불리는 자다웠습니다.”
“그런데 저놈들로도 호아는 못 잡았지.”
부운화의 얼굴에서 뿌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에게 있어 소호는 자랑스러운 조카였다.
“잘 활용해 봐야겠습니다. 그런데…… 피해가 너무…….”
“소문이 빨랐지?”
“예, 기다렸다는 듯이 각지에 소식이 전해지더군요. 무림 쪽에선 거의 역적 취급입니다.”
“그렇겠지. 역시 우리 예상이 맞았어. 이렇게 된 이상 흉수는 황실 안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중년의 환관은 분칠을 한 새하얀 얼굴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우리라니. 당치도 않은! 대인의 통찰력 덕분입니다.”
“아부는 됐어. 움직인 건 흑잠문이 맞아?”
“예, 확인했습니다.”
부운화의 두 눈이 번뜩였다.
“드디어 꼬리를 잡았군.”
“희생이 컸습니다만…….”
“안타깝지만 할 수 없어. 이렇게까지 안 했으면 절대로 먼저 흔적을 남길 놈들이 아니야. 손은…… 내가 더럽힌다.”
중년 환관이 부운화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돈. 명예. 지위.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그의 ‘대인’이 누군가의 암중 수호자를 자처한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흑잠문의 피해는?”
“흑잠문의 피해는 컸습니다. 정찰 결과, 시신과 혈액량으로 봐서는 최소한 열다섯 명 이상이 죽었다고…….”
“억지로 일을 시킨 거로군.”
부운화의 두 눈이 영민한 빛을 발했다.
“그쪽은 실력이 좋은 무인으로 조심해서 추적시켜. 희생은 지난 한 번으로 충분하다.”
“백귀(白鬼)……로 보십니까.”
“당연하지.”
부운화는 확신하고 있었다.
“흑잠문은 큰 문파야. 백귀 정도는 움직여야 해.”
“예, 조심하겠습니다.”
“좋아. 황실 쪽은?”
환관이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
“잡았습니다.”
“좋아.”
부운화는 곧바로 일어섰다.
“바로 진행한다. 대체 누가 이렇게나 집요한지. 얼굴 한번 보지.”
“예! 대인!”
기쁘게 대답한 환관이 종종걸음으로 물러나고 부운화는 힘찬 걸음걸이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장기린은 딱딱한 대나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건너편에 앉은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여인이다.
흑단처럼 새카만 머리, 복숭앗빛이 도는 매끄러운 피부에 반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 당당하고 솔직한 눈빛이 정면을 똑바로 응시한다.
탁자 위에 놓인 찻잔에서 질 좋은 잎차가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녀가 지닌 향기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본래 그렇다.
사람이 내면을 가꾸었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기품이란, 억만금짜리 향기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한 것이다.
“휘연. 으음…….”
장기린은 여인의 이름만 불러 놓고 그답지 않게 우물쭈물했다.
먼저 말문을 뗀 것은 휘연 쪽이었다.
“너무하잖아요, 객주님.”
장기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황스러웠다.
‘객주님’이란 호칭은 휘연의 기분이 안 좋을 때만 나온다.
“예전에는 중요한 일은 그때그때 상의하고 결정했었는데…… 요즘은 숨기는 일이 많네요.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그건…… 아니야.”
“저는 은자촌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하면서 호아는 밖으로 내보내 버리고, 객주님도 보름씩이나 외출해 버리시고…….”
유구무언.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밖에서 그가 무엇을 하고 왔는지 모두 다 그녀에게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휘연의 곧은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저는 도움이 안 되는 존재인가요? 아직도 ‘항주’ 때와 달라진 게 없나요?”
항주.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 곳.
사랑과 추억. 그리고 아픔이 공존하는 곳.
“그런 게 아니야, 휘연.”
“그런데 왜 저를 금이 간 도자기처럼 대하는 거죠?”
“내가…… 그랬나?”
“네.”
장기린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누가 천하의 장기린을 이렇게 만들 수 있을까.
이 세상에서 오직 단 한 사람. 휘연뿐이다.
‘하긴 휘연은 휘연이지.’
장기린은 문득, 과거의 추억들을 선명하게 떠올랐다.
맹인인 척 눈을 감고 있던 장기린을 붙잡던 맑은 목소리. 홍화객잔의 마차에서 뛰어내려 그를 붙잡던 당찬 여자.
항주 금선로 강물에 연등 두 개를 띄워 둔 채 다리 위에서 처음으로 바라본 그녀의 얼굴.
자신이 상가의 후예라며, 봉급은 됐으니 풍운객잔과 운명을 함께하겠노라 선언하던 당당한 눈빛.
그랬던 그녀가, 이제는 그의 반려자로서 장기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객주님. 저는 당신의 아내예요.”
“그렇지.”
“그 말은 당신과 생을 함께하겠다는 뜻이에요. 죽는 그 순간까지.”
강한 눈빛. 단호한 얼굴.
휘연의 말은 숨소리 하나까지 모두 진심이었다.
장기린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이가 무색하다.
기껏해야 이제 막 이십 대 중반밖에 안 되어 보이는 미모는 여전했다.
‘다시 한번 반하겠군.’
장기린은 결국 항복하듯 모든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난 당신을 험한 일에 연관시키고 싶지 않아.”
“알아요. 하지만 저는 그게 싫어요.”
“휘연…….”
“이래 봬도 저는 꽤 능력이 있다구요.”
휘연의 눈빛이 일렁거렸다.
분함, 서러움. 온갖 복합적인 감정이 장기린에게로 쏟아져 내린다.
“미안해. 앞으로는 상의하지.”
“네.”
비로소 휘연의 표정이 풀렸다. 장기린에게 항복이란 얼마나 받아 내기 힘든 것인지 그녀는 잘 알았다.
장기린은 그녀의 얼굴이 풀리자 그의 마음도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휘연은 곧바로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렸다.
“우리 호아를 보고 싶어요.”
“……호아도 독립을 해야 해.”
“때가 되면요. 너무 갑자기 보냈다구요. 최소한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확인해 봐야겠어요.”
장기린은 잠시 생각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학관이라는 곳을 한번 봐 둘 필요는 있겠지.”
“네. 바로 가 봐요.”
휘연이 생각만으로도 즐거운지 살며시 웃었다. 처녀 때와 똑같이 연노랑의 경장 옷을 입고 있는 그녀.
양 볼이 복숭앗빛으로 물들고 선명한 검은색 눈동자가 별빛처럼 반짝였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휘연과 단둘이 움직였던 게 언제였지……?’
장기린은 반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가화만사성.
가정의 중요성을 뜻하는 고사성어는 무수히 많다.
무수히 많은 고난을 넘어 겨우 평범한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는데 어째서 이렇게나 신경을 쓰지 않았단 말인가.
“미안해, 휘연.”
“네?”
“바로 가자. 우리 아들이 있는 곳으로.”
휘연이 환하게 웃었다.
장기린은 머릿속으로 무산학관까지 가는 경로와 그 사이에 휘연이 좋아할 법한 장소들을 떠올려 보았다.
‘잘 모르겠군. 운화…… 아니, 진구에게 물어봐야겠어.’
원래 이런 세속적인 부분에선 형제들 중에 진구가 제일 아니던가. 가장 처음 객잔 운영을 추천했던 게 진구였듯이 말이다.
장기린과 휘연은 가볍게 떠날 준비를 한 뒤, 은자촌을 나와 흑석촌에 있는 풍운전장으로 향했다.
외전―기옥의 망치
농촌의 하루는 빠르게 시작한다.
푸른 잎사귀 끝에 맺힌 몽글몽글한 이슬이 동 터오는 해를 비출 때쯤엔 이미 일어나서 준비해야 하루의 일과를 다 끝마칠 수 있다. 집에서 기르는 작은 가축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소나 돼지에게 줄 풀죽을 끓이고 논밭의 잡초도 뽑아야 한다. 다음 농사를 준비하기 위해 밭을 새로 갈고 모종을 심는 일도 남아 있다.
해가 뜨면 너무 더워서 일을 할 수 없으니 시간 또한 촉박했다.
농촌의 사람들이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 난 그런 줄 알았지.”
주기옥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열 살가량의 어린아이답지 않은 깊은 고뇌가 한숨 속에 담겼다.
“내가……, 천하의 이 몸이……, 이딴 잡초나 나르고 있다니. 그것도 하찮은 미물 때문에.”
무워어어어―!
항의하듯 터져 나온 울음소리에, 순간 뒤로 날아갈 뻔했던 주기옥은 휘청거리며 나무 기둥을 붙잡았다. 소년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시끄러! 뭘 잘났다고 시끄럽게 소리를 내! 너 때문에 내가 고생하잖아!”
무워어어―!
“사방 천지가 풀인데, 아무거나 처먹을 것이지. 왜 양기를 가득 품은 바싹 마른 풀을 먹여야 한다는 거야? 난 농촌이라서 바쁜 줄 알았지. 근데 내가 바쁜 건 온전히 네 탓이야! 그걸 알기는 해? 이 덩치만 큰 미물아!”
푸르륵.
소가 커다란 콧구멍으로 콧김을 내뿜었다. 바싹 마른 누런색 풀을 질겅질겅 씹는 소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비웃음을 짓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이이익!”
주기옥은 들고 있던 풀을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으나, 십 세 소년답지 않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꾹 눌러 참았다.
이유는 단 하나다.
인생은 인과응보. 풀을 내던지면 자신이 다시 치워야 한다.
그것도 자신을 비웃은 소 앞에서.
바닥을 기면서, 비굴하게.
“내가 진짜. 밖에 있을 때였으면…….”
그랬다면, 일만(一萬) 황군(皇軍)에게 명하여 이 소를 쇠사슬로 칭칭 감아서라도 무릎 꿇렸을 텐데.
보통 소가 아니라는 점이 더 열받는다.
이 소는 말만 못할 뿐이지, 소년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온몸으로 늘 표현했다. 항상 비웃고, 무시하고, 무례하게 굴었다. 넌 내 밥이나 챙기고, 뒤치다꺼리나 하는 하인이라는 식이다. 열이 안 받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말을 말자. 미물이랑 무슨 말이 통하겠냐.”
푸르륵.
또다시 비웃음.
주기옥은 애써 못 본 척하며 들고 있던 풀 덩어리를 낑낑거리며 여물통에 넣어주었다. 여물통 하나가 얼마나 큰지, 주기옥의 키보다 조금 작은 정도라서 힘이 두 배로 들었다.
“이 마을은 이상해. 사람들도 이상해. 상식이 달라. 너도 당연히 이상해.”
무워어.
붉은빛 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뒷발로 땅바닥을 걷어찼다.
쿵, 하고, 지진처럼 땅이 울렸다.
이미 마을의 비상식에는 적응할 대로 적응한 주기옥은 눈도 깜짝 안 했지만.
“그래도 재밌는 게 있어. 딱 하나. 소호…… 형이 간 뒤로 관심 가는 건 하나도 없었는데, 그래도 재밌는 게 있더라고.”
형이라는 단어는 아직도 입에 잘 붙지 않지만, 그래도 소호는 계속 기옥에게 형이었다. 소호가 떠나기 전날 두 사람이 나눴던 대화는 지금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성격은 이상하지만 머리가 비상한 영감이 하나 있어. 그 사람 집은 재밌어. 정말 기이해. 황궁에서도 볼 수 없던 것들을 쉽게 볼 수 있다니까? 어떻게 그런 사람이 이런 곳에 있는 걸까? ……아니,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들 이상하지. 이해하는 수밖에 없어. 그렇지. 그렇지.”
혼자 묻고, 혼자 납득하고.
최근에 생긴 주기옥의 습관이었다.
“자, 이제 마지막이야. 봤지? 오늘도 난 네 밥 다 챙겨 줬다? 맞지?”
무워어.
마지막 풀 덩어리를 던져 넣어주자, 소는 고맙다는 건지, 귀찮다는 건지. 뱀처럼 길쭉한 꼬리를 휘휘 내저으며 인사해 주었다. 주기옥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주기옥의 하루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
“영감!”
허름한 집에서는 화덕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풀무질을 하는 쇳소리가 깡깡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당에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장작은 대석이라는 덩치 큰 사내가 사흘에 한 번씩 잘라다 주는 것이다. 주기옥은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장작의 산을 넘어 다시 한 번 외쳤다.
“영감!”
대답은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이 또한 항상 있는 일이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철기(鐵器)들을 밀어내며 주기옥은 오늘도 불과 철의 세계로 입장했다.
뜨거운 불은 오감(五感)을 모두 자극했다.
화로 안에서 새빨갛게 넘실거리는 불꽃. 주황빛으로 한껏 달아오른 철괴. 그것을 붙잡고 있는 쇠 집게와 그걸 후려치며 불똥을 튀기게 만드는 거무튀튀한 망치.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온몸으로 닥쳐드는 열기의 파도 속에서 새로운 철기(鐵器) 하나가 오늘도 또 하나의 생명을 얻고 있었다.
상의를 벗어 던진 근육질의 노인은 주기옥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묵묵히 망치질에 집중하고 있었다.
주기옥은 더 이상 그를 부르지 않았다. 노인이 망치질을 하고 있는 철괴의 모양을 흘깃 쳐다본 뒤, 작업 공방 한구석에 놓인 탁자 위의 죽간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화기(火器)! 오늘은 화기네! 움직이는 건가? 아냐, 이건 사출식 같아. 뭘 쏘는 거지? 탄환? 쇠구슬?”
주기옥은 목간 안으로 들어갈 것처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다시 근육질 노인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노인은 그사이에 작업이 한 단계 끝났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철 덩어리를 옆에 놓인 물동이 안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쌀알이 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노인은 그제야 주기옥을 흘낏 쳐다본 뒤 집게를 들지 않은 손으로 무언가를 달라는 듯 손짓을 보냈다.
주기옥은 그것만으로도 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듣고 뒤쪽에 놓인 쇠 집게를 하나 더 건네주었다.
“여긴 함부로 오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냐.”
“흥! 영감. 난 내가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갈 거야.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주기옥은 혀를 끌끌 차는 노인의 곁에서 작업을 들여다보다가, 집게를 받아 들고 다시 망치를 건네주었다.
“원래는 이 몸께서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대대손손 자랑할 만한 영광인 거라고.”
“그 영광 필요 없으니 오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니까.”
“네놈은 평생 이 길을 갈 놈이 아니니라.”
“그걸 영감이 어떻게 알아?”
오가는 대화 속에서도 작업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노인은 망치를 두드렸고, 주기옥은 곁에서 집게와 망치를 번갈아 건네주었다.
“그럼 한번 잡아 볼 테냐?”
“어? 뭐를?”
노인이 주기옥의 코앞으로 망치 손잡이를 내밀었다.
주기옥은 숨을 멈추고 손잡이를 응시했다.
소가죽으로 마감한 단단해 보이는 쇠망치였다. 열 살배기가 들기에는 무거운 물건임에 분명하지만, 그래도 양손으로 잡으면 들 수는 있었다.
“…….”
하지만 주기옥은 그 손잡이를 잡을 수 없었다.
잡아 보고 싶었는데, 손을 뻗을 용기가 없었다.
노인은 혀를 끌끌 차며 망치를 치웠다.
“그럴 줄 알았지.”
“…….”
“나는 말이다. 꼬맹아. 밖에 있을 때 일흉대기(一凶大器)라는 별호로 불렸다. 일흉대기 광사로라고 하면 무림 어디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었어. 그게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흉흉해 보이는 밉살맞은 별호긴 하지만 말이지.”
깡. 깡.
규칙적인 망치질 소리 사이로 근육질 노인, 아니, 일흉대기 광사로의 목소리가 주기옥의 귀로 파고들었다.
“나도 젊을 때는 혈기왕성해서 말이다. 이 세상에 즐겁고 좋은 게 그렇게나 많은데도, 나는 내 ‘재능’에만 심취해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인 줄 알겠느냐?”
“아니……, 잘 모르겠어. 건방졌다는 거야?”
“그 정도가 아니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만했다. 척― 하니 보기만 해도 물건의 규격이니 무게니 한눈에 보이는 데다, 머릿속에 뭔가가 떠오르는 족족 만들기만 하면 무림에서 난리가 나더라 이거야. 나중엔 줄을 서서 제발 물건 좀 만들어 달라고 나한테 절까지 하곤 했지. 그래서 그 오만하고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젊은 광사로는 외로웠던 게야. 제자를 고를 때 다른 건 아무것도 안 보고 재능만 따졌어. 적어도 제자라면 내 발끝은 따라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지.”
깡.
별 의미 없이 내리치던 망치가 멈췄다.
“나중에 보니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어. 재능이 있으면 뭐해. 인성이 덜 된 놈인걸. 그런 놈을 재능만 보고 데려와서 기술을 가르쳤으니 뻔하지. 선의의 경쟁자였던 기갑문은 불타고, 사문(師門)은 역적이 되어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었다. 명심해라, 꼬맹아. 인륜과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는 자를 가까이 두면 망할 수밖에 없느니라.”
광사로의 말에는 무게감이 있었다.
관직에 오른 것도, 그렇다고 학식이 높은 것도 아니건만. 한 분야에서 남다른 결과를 성취한 천재는 그에 걸맞은 품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주기옥은 묵묵히 광사로의 말을 경청했다.
“그렇게 큰 실패를 하고, 장인으로서 수많은 손님들을 봐 온 내가 말하는 거다. 네놈은 묵묵히 산속에서 망치나 두드릴 인생이 아냐. 만약 그래도 망치질을 해 보겠다면……. 그만한 각오는 하고 시작해야 할 거다. 엄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지 않게 말이다.”
광사로는 주기옥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냥 재밌어서 놀러오는 거면 언제든 놀러 와라. 가끔 장난감도 만들어 주마. 하지만, 진심으로 망치질이 하고 싶은 거면……, 망치 말고 다른 건 버리고 와.”
주기옥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게 있어. 그 제자. 지금 살아 있어?”
“살아 있을 거다. 천둥군주인지 뭔지로 불린다던데.”
“흐음.”
주기옥은 입을 다물고 잠시 고민하다가 밖으로 나갔다.
바람은 선선하고 하늘은 맑았다.
삼산(三山)의 정기를 받는 은자촌은 깨끗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주기옥은 얼마 전에 소호가 떠날 때를 떠올렸다.
“같이 갈래, 기옥아?”
“간다고? 어딜?”
“무산학관. 아버지가 보내 준다고 하셨어. 나랑 주해랑 미미가 같이 갈 거야.”
“무산……학관? 무공을 배우는 거야?”
“응. 무공도 배우고, 그 밖의 여러 가지도 배운대. 같이 가자. 재밌을 거야. 지겹게 마을에만 있는 게 아니라 넓은 세상에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아니, 난 갈 수 없어.”
“왜? 너만 괜찮으면 아버지께 말씀드려 볼게.”
“아냐. 난……, 갈 수 없어.”
주기옥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때와 똑같다.
용기가 부족했다.
어째서인가.
나는 무엇을 그렇게나 두려워하는가. 어째서 새로운 것에 손을 내밀기를 싫어하는가.
아니, 질문이 잘못되어 있었다.
나는, 무엇을 그리 버리기 싫어하는가.
“아냐!”
주기옥은 다시 공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광사로가 놀란 듯 눈을 부릅뜨고 돌아보았다. 주기옥은 허리에 척 손을 얹고 외쳤다.
“난 내가 신의 자손이라 생각했어! 내 ‘혈통’에 심취해 있었지만 이젠 아냐. 난 평범해. 그러니까 다 버릴 수 있어.”
주기옥은 쪼르르 달려가 광사로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광사로는 허탈한 웃음을 짓더니, 한쪽 무릎을 굽히면서 주기옥과 눈높이를 맞춰 주었다.
“잡아 볼 테냐?”
“흥! 당연하지.”
주기옥은 양손으로 망치를 붙잡았다.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단순한 철의 무게가 아니라, 십 년 남짓한 인생의 무게다.
그런데 그 순간, 이마에 따가운 아픔이 번쩍였다.
“아얏. 왜 때려!”
“시건방진 꼬맹이 같으니. 다 버렸으면, 이제 예의는 좀 가져와라.”
“흥. 생각해 보고.”
앳된 소년과 백발의 노인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주기옥은 그 날, 평화촌의 소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