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78화 (207/686)

4권 3화

제14장 불합리(不合理)(3)

“서인아! 있잖아. 나한테 재미있는 생각이 있어. 한번 들어 볼래?”

“어?”

“나한테는 삼촌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철이 없는 삼촌이 한 명 있어. 만날 투전이며 투견이며 도박판에 안 끼는 경우가 더 드물고, 내기를 좋아해. 뭘 하든 내기를 걸어. 어느 정도냐면 오늘 문지방을 처음 넘는 사람이 왼발이냐 오른발이냐에 은자 한 냥을 걸 정도야. 어이가 없지?”

“어어?”

느닷없이 전개된 가족 이야기에 조서인은 멍하니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는 줄 알아? ‘운이 조금만 없었으면 이미 몇 번이나 남의 집 종으로 팔려 갔을 놈!’이라고 항상 혼나. 그런데도 매번 돈을 따 오는 게 신기하긴 하지만……. 아무튼 그 삼촌이 나한테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있어.”

대체 그 도박꾼 삼촌은 발랄한 소년에게 뭐라고 했을까? 궁금해하는 조서인에게 소호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손가락 하나를 척 하니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인생은 한 방이다!”

“……어?”

“나만 안 망하면 돼!”

조서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 봐…….”

“그렇지? 근데 이게 생각해 보면 은근히 맞는 말이야. 어떤 내기를 하든지 결국엔 나만 돈을 안 잃으면 되는 거거든. 따는 게 아니라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거야. 물론 그게 쉬운 건 아니지만, 가만히 있지 말고 계―속, 계에속, 생각하고 고민해서 불행의 신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지목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라는 이야기지.”

입꼬리를 올려 의뭉스럽게 씩 웃는 소호와 달리, 조서인은 그 말의 반도 못 알아듣고 혼란스러워졌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소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수업을 듣는 애들이 각자 각반을 사면 무슨 재미가 있어? 그러지 말고 내기를 해 보자. 다른 기숙사에 있는 동급생들이랑 한판 해 보는 거야.”

“……한판? 한판 해보자고?”

“응! 안 사도 되는 거야. 내기를 해서 이기기만 하면!”

“이기기만 하면, 각반을 안 사도 돼……?”

“응! 이겨 버리면 돼! 어때? 해 보고 싶지 않아?”

각반을 사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잠시 흔들렸던 조서인이지만, 이내 본인의 상황을 깨닫고 두 눈이 급격히 흐려졌다.

“어……, 그게…….”

너무나도 좋은 제안이지만.

그 제안을 건넨 사람이 소호라는 사실이 조서인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소호를 못 믿는 게 아니다. 그저, 소호라는 아이가 조서인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가진 듯한 소년이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조서인이 북두칠성 옆의 흐릿한 별이라면 소호는 태양 같은 아이였다. 정반대이자, 정 극단. 모든 것이 조서인과는 전혀 다른 아이가 장소호다.

‘소호도 돈이 없는 걸까?’

왠지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소호는 왜 이런 제안을 하는 걸까?

단순히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으음…….”

망설이는 조서인을 부추기듯 소호가 승부수를 걸어왔다.

“이건 주해가 말해 준 건데, 우리가 내기를 걸려면 두 사람의 조력이 필요하대. 한 명은 우리 백호방의 방장님이신 봉천 선배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

“……철웅 선배?”

“그렇지. 철웅 선배! 근데 이 사람은 아마 이야기하면 ‘파하핫!’ 웃으면서 바로 허락해 줄 거 같아.”

소호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파하핫!” 하고 철웅을 흉내 내듯 웃었다.

“문제는 다른 한 명이야. 난 우리가 기숙사 중에서 주작방에 내기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주작방?”

“응. 주작방은 우리 무산학관의 기숙사 중에 돈이 가장 많잖아? 기숙사에 장비를 만드는 대장간도 있는 것 같고. 그런데 말이지. 그 주작방 안에서 우리랑 동급생이고, 성격이 화끈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 말을 잘하는 사람이 누굴까 하고 생각해 보니……, 딱 한 명이 생각나더라고.”

“주작방에 그런 사람은…… 아!”

“맞아. 지금 생각한 그 친구!”

소호는 동그랗게 치켜 뜬 조서인의 두 눈을 바라보며 장난꾸러기처럼 웃었다.

“주희……, 문주희 말이야?”

“히힛. 응. 서인이 너랑 친한 듯 보이던 그 애한테 부탁해 보자.”

“아…….”

“어때? 싫어?”

조서인은 입을 꾹 다물었다. 싫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아이. 문주희와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는데. 조금 전까지의 망설임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나는…….”

조서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소호는 환하게 웃었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

“파하핫!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거야! 대단해, 너희들! 각반을 걸고 내기를 한다니! 나는 신입생 때 그런 건 생각도 못했는데!”

허리에 손을 올린 채 파핫핫 웃어 대는 철웅의 모습은 소호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조서인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파핫핫 웃는 철웅과 소호를 번갈아 쳐다봤다.

“하자! 꼭 하자고! 그리고 이겨서 주작방, 그 금귀(金鬼)들한테서 각반을 빼앗아 오는 것이야!”

철웅이 번쩍 주먹을 치켜세우며 외치자, 그가 항상 착용하고 있는 훈련용 철편 갑옷이 철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봐. 봉천에게는 내가 말하고 올게.”

철웅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야생 산양 같은 몸놀림으로 펄쩍펄쩍 뛰어 기숙사 안쪽으로 사라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공이었다.

백호 방장 봉천은 진중한 성격답게 처음엔 난색을 표했지만, 결국 철웅의 열정에 못 이겼는지, ‘양쪽 모두가 합의한다면…….’이라는 조건으로 허락을 해 주었다.

양쪽 모두의 합의.

소호에게 있어서는 이미 계획안에 상정되어 있는 목표였다.

소호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조서인과 함께 주작방으로 향했다. 처음으로 방문한 주작방의 기숙사는 어쩐지 화려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분명히 기숙사의 구조와 크기는 백호방의 것과 똑같을 텐데 이상한 일이다. 바닥에 깔린 융단. 벽에 붙어 있는 장식품들.

그런 사소한 소품들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전혀 다르게 꾸며 주고 있었다.

주작방의 선배로 보이는 학생 한 명을 붙잡고 문주희를 찾으니 처음엔 의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봤으나, 뒤에서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철웅을 보고는 떨떠름한 얼굴로 문주희를 불러 주었다.

“와아! 서인! 거기에 소호까지! 너희가 여기엔 웬일이야? 어라? 철웅 선배님도 계시네? 안녕하세요?”

문주희는 여전히 사교성이 좋고 활달했다. 그녀는 짧고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 사이로 내민 귀를 새끼 고양이처럼 쫑긋거렸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옥구슬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빛났다.

철웅은 파핫핫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고, 소호도 싱긋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문제는 조서인이었다.

“어……, 저기…….”

쭈뼛거리며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리는 조서인의 옆구리를 소호가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하, 할 말이 있어서 왔어!”

“할 말? 무슨 말인데?”

“우리랑…….”

“우리랑?”

“……내기 하지 않을래?”

“응?”

내기.

그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주변에 정적이 흘렀다. 문주희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내기……라고?”

문주희의 두 눈은 아직도 호기심에 반짝거리고 있긴 하지만, 그 안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주변을 편하게 지나다니던 주작방의 학생들도 어느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침묵이 감돌았다. 주변의 시선이 단번에 모여들었다.

“어? ……어?”

조서인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소호는 주위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고 빙긋 웃고 있었다. 다시 정면을 바라보면 문주희도 소호처럼 철웅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녀는 당황하는 조서인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기, 서인아. 다른 데선 어떨지 모르겠는데. 여기 주작방에서는 말이지. 그……, 으음, 네가 썼던 그 말이…….”

“거기, 당신들! 재밌는 대화를 나누고 있군!”

문주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녀는 갑자기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대화에 끼어든 소년을 휙 하고 몸을 돌려서 노려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 척이나 될까 말까 한 작은 키.

눈썹이 숯으로 그려 놓은 것처럼 진했고, 가느다란 실눈이라 눈을 감은 건지 뜬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피부는 평생 햇빛을 보지 못한 아이처럼 뽀얗고, 입고 있는 옷은 붉은색과 금색의 비단이 섞인 비싸 보이는 재질의 비단 무복이다.

“곽도지…….”

문주희가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곽?”

철웅이 눈썹을 팍 찡그리며 의심스럽다는 듯이 소년을 쳐다보았다. 철웅에게 있어서 ‘곽’씨를 가진 소년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거기에 ‘주작방’과 ‘작은 키’가 연관되면 더더욱 그렇다.

“알아보시는군요!”

곽도지라고 불린 소년은 자신만만하게 턱 끝을 치켜세우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그쪽의 나이답지 않게 건장해 보이는 선배님은 분명 백호방의 수치(修痴)라 불리는 철웅 선배님이겠지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저는 우리 주작방의 자랑이신 곽도엽 방장님의 동생, 곽도지라고 합니다.”

수련할 수(修)자에 몰두할 치(痴). 그래서 수련밖에 모르는 바보라는 뜻의 수치였다.

“흐응?”

소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철웅의 공공연한 별호이긴 하지만, 곽도지의 입에서 들으니 뭔가 비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하지만 철웅이 불만스럽게 생각한 건 본인의 별호가 아니었나 보다.

“역시. 어쩐지 곽씨더라니. 그런데 하나도 안 닮았잖아! 너, 그놈의 동생 맞아?”

“뭣? 무슨 실례의 말씀을! 저는 곽도엽 형님의 하나뿐인 동생입니다!”

“생긴 게 전혀 다른데?”

“물론 제가 형님보다 남자답지 못하게 생기긴 했습니다만, 제가 하나뿐인 동생인 건 사실입니다. 아니, 그보다 그걸 왜 의심하는 겁니까!”

곽도엽은 농담으로라도 잘생겼다고 할 수 없는 공자를 연상시키는 툭 튀어나온 이마의 추남.

반면에 곽도지는 눈이 실눈이고 키가 작긴 하지만, 그래도 선명한 턱 선에 뽀얀 피부를 지닌 소년이었다. 형제라고 대번에 믿기엔 무리가 있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아는 것일까.

곽도지는 치부라도 들킨 사람처럼 펄펄 뛰며 부정했다.

“크흠, 그보다 본제로 돌아와서. 내기라고 하셨죠? 후후, 대범하시군요. 주작방에서 내기라는 말을 꺼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철웅 선배는 아실 텐데요?”

“뭐 알긴…… 알지.”

거기서 궁금해졌는지 소호가 철웅에게 물었다.

“철웅 선배. 주작방에서 내기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그게…….”

철웅은 더듬더듬 대답해 주었다.

“음, 여기 주작방에서 내기라고 하면……, 뭐랄까. 현무방에서 규율이랄까. 청룡방에선 대련이라고 할까. 그런……, 뭐랄까…….”

철웅은 수치라고 불리는 소년. 안타깝게도 자신의 몸을 단련시키는 일 말고 설명을 하는 쪽에는 재능이 없었다.

지리멸렬한 설명을 보충한 건 옆에 있던 문주희였다.

“하아. 내가 설명할게. 주작방은 내기라는 단어에 굉장히, 굉장히 예민하다는 뜻이야. 우리한테는 중요한 문제거든.”

“아아. 그래서 다들 조용해져서 여기를 쳐다보는 거야?”

“응. 바로 그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주작방의 학생들이 점점 더 모여들고 있었다.

문주희는 드물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내기의 내용이 뭐야?”

“그건 얘가 이야기할 거야.”

조서인은 소호가 옆구리를 찌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각반.”

“응?”

“화검 연홍 사부의 수업에서 쓰는 각반. 그걸 걸고 내기하자. 진 쪽이 이긴 쪽 학생들에게 각반을 사 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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