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4화
제14장 불합리(不合理)(4)
“각반을 내기로 걸자고? 아니……, 잠시만, 설마. 철웅 선배가 왔다는 건. 아예 백호방 대 주작방의 기숙사 대결로?”
“아니, 아니.”
철웅이 손을 내저었다.
“백호방 대 주작방의 내기이긴 한데. 그렇다고 기숙사 대결까지 가면 안 되지. 그런 거창한 게 아니라 이번에 학관에 들어온 신입생이자 동급생들끼리 한번 겨뤄 보자! 라는 의미랄까?”
“흐응?”
“하핫! 자세한 건 여기 후배들한테 들으라고!”
처음엔 어이없어 하던 문주희였지만 가만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표정이 순식간에 몇 번이나 바뀐다. 원래도 영리한 인상의 소녀였지만, 지금의 그녀는 숙련된 장사꾼 같았다.
“그럼 선배님들은 끼어들지 않는다는 이야기인가요?”
“물론!”
“내기 대결은 신입생들끼리만?”
“그렇지!”
“흐응?”
마침내 문주희가 씩 웃었다.
“이건 재밌을 것 같네?”
그녀는 단발머리를 휘날리며, 허리에 손을 얹은 당당한 자세로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소호를 향해 있었다.
“있잖아. 내가 봤을 때 이건 백호방 느낌이 아니거든? 백호방은 생각이 이렇게 유연한 곳이 아냐. 뭐랄까. 우와! 하자! 하면 오오! 하자! 라고 하는? 그래서 불붙으면 한도 끝도 없이 타오르는 그런 느낌이야. 그런데 지금 그 제안은 그런 느낌이 아니란 말이야. 뭔가 재능 넘치는 장난꾸러기 같은데.”
문주희는 십 대 초반의 나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통찰력이 있는 소녀였다. 그녀는 확신이 가득한 얼굴로 소호를 응시했다.
“이 제안을 생각한 건 너지? 소호?”
“나?”
소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더니, 이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다 같이 생각한 거야. 특히 여기 서인이랑 같이.”
“흐응? 그래?”
“응. 그래.”
문주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럽게 바라보았지만 소호는 햇살처럼 싱글싱글 웃을 뿐이다.
“그래. 그럼 그런 걸로.”
“그런 걸로.”
먼저 어깨를 으쓱한 건 문주희였다.
“알았어. 그래서? 내기는 어떻게 할 건데?”
“그건 말이지. 우리가 생각했던 게 있는데, 우린 무산학관 관도니까 일단 무공을…….”
“잠깐. 잠깐.”
그때 옆에 있던 곽도지가 말을 끊으며 들어왔다.
“문주희, 그걸 네가 들어서 어떻게 할 건데? 네가 맘대로 할 게 아니잖아? 대상이 신입생이든 뭐든 주작방이 ‘내기’를 하는 건데, 그걸 네가 결정할 수 없잖아.”
“흐응-?”
조서인은 본능적으로 위축되어서 한 걸음 물러섰다. 문주희의 얼굴이 방금 전 조서인이나 소호를 대할 때와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가워져 있었다.
“누가 내가 결정한대?”
“어?”
“일단 백호방 친구들의 요구를 들어 보고, 그다음에 선배들한테 이야기를 하든가 해야 하는 거 아냐? 넌 방장님한테 가서 ‘저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일단 데려와 봤습니다.’ 이럴 거야?”
“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니면, 좋은 제안일 수도 있는데, 네 맘대로 여기서 안 된다고 하려고? 방장님한테는 몰래, 이야기도 안 하고?”
“몰래라니!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 그게 아니면 조용히 있어. 대체 뭐가 잘못됐다는 거람? 시간만 낭비했네.”
싸늘하다 못해 시퍼렇게 빛나는 말의 칼이 날아가 곽도지의 가슴에 깊게 박혔다. 곽도지는 치명상을 입은 환자처럼 비틀거리며 입을 벙긋거렸다.
문주희와 곽도지.
누구의 말이 더 사리에 맞는지는 누가 봐도 명확했다.
흥미 위주로 주변에 모여 있던 주작방의 학생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문주희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소호는 조서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였다.
“저 남자애가 아무 말도 못한다, 서인아.”
“그러네……. 주희가 대단해.”
“거봐. 내가 얘한테 말하면 잘될 거라고 했지?”
“정말 그래. 소호 너는 어떻게 이렇게 될 줄 알았어?”
“히힛, 내가 주해만큼 똑똑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누구한테 말하면 일이 잘 풀릴지는 감으로 알아. 삼촌들도 그건 인정했어!”
“그래?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 삼촌들이 누군지 궁금하다.”
“나중에 같이 보게 되면 좋겠다. 왠지 삼촌들은 서인이 너를 좋아할 것 같아.”
“나를……?”
“응.”
조서인은 쑥스러워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빈말이라도 자신을 좋아해 줄 것 같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일단 방장님께 전달해 볼까 싶은데, 반대하시는 분?”
문주희가 한 손을 위로 쭉 들어 올리며 묻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모두 흥미로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해 보자!”
“백호방 꼬마들아, 주작방의 내기는 신성하다고!”
“우리가 이길 거야!”
문주희가 호탕하게 웃었다.
“좋아! 그럼 이 이야기는 내가 대표로 방장님께 말씀드려 볼게!”
어디선가 환호성이 들려왔다.
“내기다.”
“내기야!”
“주작방 신입생이 내기를 한다!”
지켜보던 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열띤 토론을 벌였으며, 벌써부터 주판을 튕기며 누가 이길지 내기를 하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고작 십 대 초반의 소년, 소녀들.
그런 그들이 어른 상인들 못지않게 이해득실을 생각하며 열정을 불태운다. 그게 바로 주작방이었다.
“이게 주작방이구나.”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떤 일이 이득이 될지 항상 생각하잖아. 그게 대단하다 싶어서.”
소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조서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찬찬히 살펴보니 열정적으로 토론하며 눈을 빛내는 주작방 관원들에게서 뭔가가 느껴지기는 했다. 소호나 조서인에게는 없는 부분이었다.
열정은 열정이지만 다르다.
이들의 집착은 돈과 이득에 대한 것.
그게 주작방의 특징이다.
‘그럼 우리는?’
신안 무학대사가 백호방으로 뽑은 그들에게는 어떤 특성이 있는 걸까.
조서인은 고민하다가 떠올렸다.
같은 기숙사 학생들끼리만 통하는 공통점이자 유대감.
한마음 한뜻으로 불타오를 수 있는 동료들.
백호방에 있어서 그건 바로 무공과 수련이다.
백호방은 오로지 무공에 대해서만큼은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불태우는 아이들이 모인 곳이다.
‘맞아. 그래. 무공이랑 수련에 대해서만큼은 우리도 뜨거워. 그런데……, 나는 왜 백호방에 온 걸까?’
조서인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스스로 생각할 때 자신은 평범했다. 범재(凡才)중의 범재였다. 평범하디평범해서, 조가 창법의 삼 초식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으음.”
시무룩해진 소년의 등을 소호가 툭, 하고 건드렸다.
“서인아. 예전에 우리 아버지가 해 준 말씀이 있는데……. 아! 참고로 우리 아버지는 대단한 분이셔.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못 이기겠다! 라고 생각한 유일한 사람이야.”
“소호 네가 못 이긴다고……? 무공으로?”
“으응. 무공으로든 뭐든. 한 이십 년 뒤로 상상해도 이기는 모습이 도저히 보이질 않아.”
“그 정도로?”
소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그 순간을 상상한 듯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조서인은 진심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십 년 뒤라면 소호가 삼십 대. 아버지는 못해도 오십 대가 넘을 터. 그런데도 못 이길 사람이라니. 소호의 비정상적일 만큼 뛰어난 재능을 아는 서인이 입장에선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였다.
“뭐, 어쨌든!”
소호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아버지는 그러셨어. 항상 허리를 곧게 펴고 당당하게 정면을 응시하면서 살아라. 그렇게 하면 실패해도 나아갈 길이 보일 것이다!”
“어……, 응?”
“자세가 모든 걸 결정하는 법이래. 그러니까. 너도 항상 허리를 펴고 정면을 봐. 봐봐, 숨을 한번 쉬어 봐. 다르지? 허리만 펴도 다르지?”
“어, 음.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자, 봐! 저 친구가 너를 부르고 있잖아.”
조서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문주희가 손짓을 하고 있었다.
“아……?”
“히힛, 서인아, 허리를 쭉 펴고 가야 하지 않을까?”
소호가 씩 웃는다.
햇살처럼 밝고 상냥한 눈빛이 조서인에게 왠지 모를 힘을 주었다. 조서인은 당황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소호의 말은 다 맞았다.
주작방의 당찬 여걸. 문주희가 살짝 답답한 얼굴로 조서인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어깨를 움츠린 채 갈 수 있겠는가?
“야! 너희 빨리 와. 방장님께 함께 가야 할 것 아냐?”
소호와 서인.
두 사람은 서로를 한 번 응시한 뒤, 빙긋 웃으며 문주희를 따라갔다. 뒤쪽에서 지켜보던 철웅도 묵묵히 그런 아이들의 뒤를 따라갔다.
***
주작방은 원래 네 개의 기숙사 중에 가장 부유한 곳이었지만, 안내받은 곳은 그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티’가 나는 공간이었다.
평생 검박하게 살아온 조서인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주변이 온통 새빨갛다. 부(富)를 상징하는 게 붉은색과 금색이기는 한데, 이곳은 그 두 가지 색으로 모든 게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새빨간 융단은 이러다가 발가락이 푹 빠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고급스러운 탁자, 그 위에 올라와 있는 금박 문양이 새겨진 여러 가지 장식품들. 의자에는 어떤 동물의 것인지는 몰라도 값비싸 보이는 가죽이 통으로 감싸여 있었다.
“세상에…….”
몰락한 무가에서 태어나 검소하다 못해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난 조서인으로서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구경해 본 적이 없는 화려한 광경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시선을 내리니 발이 보였다.
구깃구깃 헤어진 혁피화가 이렇게나 부끄러울 수 있을까.
문득 어릴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서인이의 복장을 보더니 물을 좀 떠오라던 또래의 아이.
똑같이 무가의 아이였으나,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있던 초라했던 자신의 모습.
“흠흠!”
옆에서 소호가 헛기침을 했다.
팔순 노인처럼 허리를 두드리며 허리를 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조서인은 아차 싶었다.
문주희가 남감한 듯 웃으면서 조서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가 좀 너무 화려하지? 맞아. 내가 보기에도 좀 쓸데없이 화려하다 싶어. 뭐, 지금의 방장님이 주작방에 벌어다 준 돈이 워낙 많으니까 아무도 불평을 못한다지만 말이야. 그래도 고작 학생의 공간이 이렇게 화려할 필요가 있나 싶기는 해. 그치? 선생님들 방도 이렇지는 않을 걸?”
“어, 으응.”
“이래서 돈이 좋은 거야. 돈만 있으면 웬만한 약점을 다 극복할 수 있거든? 다른 걸로는 그게 안 된다? 무공을 배워서 도적질로 뺏을 게 아니면?”
씩 웃는 문주희의 말에 틀림이 없다. 역시나 소녀는 나이보다 성숙한 면이 있었다.
문주희가 화려한 대문 한편에서 묵묵히 서류를 살피며 붓을 놀리던 선배 한 명에게 말을 걸었다. 그 소년은 모두를 기숙사 방장에게로 안내해 주었다.
딱히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 소년은 마치 그들이 올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모두를 방장에게로 안내했다.
“특이한 손님들이 왔군.”
공자처럼 추레한 얼굴. 작다 못해 왜소한 체구.
주작방을 한 손에 쥐락펴락하는 학관 내부 금권(金權)의 소유자가 비스듬히 앉아 모두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