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82화 (211/686)

4권 7화

제15장 노력의 재능(才能)(2)

“잠깐만.”

백설지가 문을 열었을 때 앞에 있던 두 소년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은은한 꽃향기였다. 결코 짙지 않으면서 묘하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향기가 숨을 쉴 때마다 코끝을 맴돌았다. 처음엔 목란 향인가 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조금 더 싱그러우면서 촉촉한, 밝은 느낌의 향기였다. 잠시 눈을 감고 향을 느껴 본 소호는 기분이 편안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방 안에 꽃이 있는 걸까?’

소호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삶이었던 마을을 떠올렸다. 마을에 있을 때는 꽃향기를 자주 맡고는 했다. 아버지가 어머니께 종종 가져오시던 꽃은 물론이고, 산이며 들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들꽃들도 제각각 향기로웠으니까.

‘난은 아니고, 목란……? 아냐, 좀 더 깨끗한……. 백합? 그래. 백합 같아.’

기억을 더듬던 소호는 이내 정답을 찾아냈다. 그러고 보면 백설지는 백합꽃처럼 하얀색의 느낌을 많이 가진 소녀였다.

보통 사람들과 달리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는 한겨울의 눈을 빚어서 만든 조형물 같았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 걸까. 그녀가 주로 입는 옅은 푸른빛의 무복과 보석을 닮은 푸른색 눈동자는 한 쌍으로 매우 잘 어울렸다.

“무슨 일이야?”

능숙한 한어(漢語) 속에 북방 방언 특유의 숨소리가 들어가는 억양이 섞여서 들렸다. 소호는 방긋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선배의 도움이 필요해서 왔어요.”

“도움? 나에게서?”

“네. 전에 봉천 방장이 그랬거든요. ‘무공 중에 한 가지에 있어서만큼은 설지가 백호방에서 제일이다.’라고.”

백설지는 살짝 열린 문 사이를 가로막듯 서서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푸른색 눈동자가 잔잔한 호수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소녀는 소호를 보고, 그 옆에 서 있던 조서인을 보았다. 그러고는 뭔가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공 이야기구나.”

“그 반응을 보니 내기 이야기를 들으셨나 봐요?”

“그래. 이 년 차 중급 수업에서도 아이들이 다들 그 이야기뿐이었어.”

소호는 웃었고, 조서인은 쏟아지는 관심이 너무 커졌다고 중얼거리며 본인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맞아요.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갖고 있어요. 그래서 말이죠. 저희한테는 이번 내기가 중요해요. 할 수 있는 건 뭐든 준비해 두고 싶어요.”

“그래?”

백설지의 고요한 시선이 조서인에게로 화살처럼 박혔다.

“그런 것치고는 그리 절박해 보이지 않는데?”

“아뇨.”

소호는 스님들이 합장을 하듯 양손을 모은 채 부탁하듯 고개를 숙였다.

“사실 꽤 절박해요. 설지 선배의 도움이 꼭 필요해요.”

“글쎄? 내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 그리고 굳이 내가 아니라도 네가 직접 도와줘도 되지 않아?”

“저는……, 동생들이 그러는데 가르치는 데 재능이 없대요. 게다가 이건 제 생각인데 말이죠. 우리 무산학관에서 설지 선배만이 저희를 도와줄 수 있어요.”

“나만 도와줄 수 있다고?”

백설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도움을 받아야 할 무공이 있어요. 그런데 그 무공에 외(外)는 있지만 내(內)가 거의 실전되었거든요. 설지 선배의 무공만이 도와줄 수 있어요.”

소호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게 툭 내뱉듯이 말했으나, 반응은 극적이었다.

우선 백설지.

눈의 나라에서 온 하얀 피부와 금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는 의심과 경계심이 한껏 뒤섞인 시선을 소호에게 보냈다. 그 심정의 변화 때문일까. 실제로 주변의 온도가 내려간 것처럼 한기가 느껴졌다.

또 다른 한 명은 바로 조서인이다.

서인은 지금껏 평생 고민해 오던 문제를 소호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느꼈다. 쑥스러움, 당혹감, 호승심이 합쳐져서 절대로 좋을 리가 없는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조서인은 얼굴이 빨개진 채 말을 잃어버린 듯 굳어 버렸고, 백설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호를 추궁했다.

“그건 단순히 내가 내공의 경지가 높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넌 무엇을 알고 있는 거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설지 선배.”

“네가 말해 봐. 솔직하게. 무슨 뜻으로 한 말이야? 왜 나를 선택했어?”

소호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그게. 예전에 저희 삼촌들한테 들었던 건데, 북해(北海)는 사시사철 얼음과 눈을 볼 수 있을 만큼 추운 땅이라 그곳에서 수련하는 무공은 화려하게 몸을 쓰는 외공이 아니라, 강력하고 압도적인 내공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어요. 그리고 실제로 설지 선배는 무산학관 전체에서 손꼽히는 내공의 소유자라고 들었고요.”

“그 정도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야, 소호.”

“그리고 그 머리.”

소호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봤던 건데. 설지 선배의 뒤쪽 머리카락의 뿌리 부분이 하얗게 보이더라고요.”

“……!”

설지는 화들짝 놀라며 본인의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붙잡았다.

그런다고 뒷머리의 뿌리 부분이 보일 리가 없으니 다분히 심리적인 반응이었다.

“저희 마을에 계신 할아버지 중에 세상에 안 가 본 곳이 없는 마당발 할아버지가 한 분 계세요. 그분은 탁발 수행은 땡중의 필수 덕목이다……라고 하셨었는데. 아무튼 그분이 북해에는 삼륜이란 절학이 있어, 익히면 머리가 노인처럼 새하얗게 세어 버리는 대신에 막강한 내공과 모든 무공의 내공의 흐름을 꿰뚫어볼 수 있는 ‘삼륜(三輪)의 도(道)’를 얻는다, 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설지 선배가 삼륜공을 익힌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던 거죠.”

소호는 잠시 아련한 표정으로 과거를 떠올리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설지 선배를 당황하게 만들려는 건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백설지는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소호의 추측을 긍정하는 셈이었으나, 이 자리에 그걸 따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쩔 수 없구나. 하긴, 무산학관은 서로 무공을 감추는 곳이 아니지. 게다가 같은 백호방 후배한테 도움을 주는 건 당연한 일이야.”

금발 벽안의 소녀는 처음으로 그녀 자신의 몸으로 막고 있던 방문에서 비켜섰다.

“들어와. 일단 안에서 이야기하자.”

백설지의 손짓에 소호는 아직 당혹해하는 조서인의 어깨를 붙잡고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갔다.

***

“삼륜은 불교에서 수미산 아래 지하 세계를 받치고 있다는 금륜(金輪), 수륜(水輪), 풍륜(風輪)을 의미하고, 한편으로는 번뇌를 없애 주는 부처의 몸과 입, 그리고 의지를 의미하기도 해. 이는 삼륜공이 내면의 해탈을 중시한다는 이야기야.”

백설지는 본인의 내공 비법에 대해 말하는 내내 청산유수처럼 막힘이 없었다.

이는 자신의 성명절기를 목숨처럼 소중히 하는 무림인답지 않은 일이기도 했고, 또한 그녀가 얼마나 내공심법에 조예가 깊은지 수준이 드러나는 일이기도 했다.

“탈각에 이르면 좋겠지만, 나는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어. 다만 이 삼륜공의 성취가 삼 단계에 이르면 무공 안에 숨은 내공의 흐름을 알 수 있게 돼. 아마 소호가 나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이 능력이겠지?”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소호와 백설지는 서로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가능해. 그럼 일단 그 미완성의 무공을 보여 줘.”

백설지는 수련장 한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한편 졸지에 무공 시연자가 되어 버린 조서인은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보여 주는 무공을 익혀 본 적이 없다.

스스로 조용한 곳에서 홀로 수련했을 뿐.

누군가에게 자신의 무공을 보여 줘야 한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것이다.

“어, 으음…….”

조서인은 창날이 없는 목봉을 든 채 우물쭈물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서인아, 기본!”

“어어?”

“기본을 보여 줘. 너의 기본공. 항상 연습하던 거.”

확신이 가득한 소호의 목소리는 조서인에게 있어 흐린 하늘에서 비춘 한 줄기 서광(瑞光)과 같았다.

조서인은 자세를 낮추고 목봉을 양손으로 잡은 뒤에 앞으로 겨누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 안정된 숨소리로 목봉의 끝단, 전방만을 주시했다.

“괜찮아. 다른 건 아무것도 없어.”

나직하게 중얼거린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시작이 어려웠을 뿐, 막상 움직이기 시작하니 목봉은 스스로 살아 있는 것처럼 자연스레 무공의 투로를 따르기 시작했다. 매일 홀로 연습할 때와 똑같았다. 태어나 철들 무렵부터 붙잡고 있던 것이 바로 목봉이다. 수백, 수천, 아니, 수만 번이나 반복하던 움직임이었다. 소호와 백설지. 그 밖의 어색한 수련실의 풍경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 조서인의 세계에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 한 자루의 목봉뿐이었다.

조가창. 자룡구대식(子龍九大式).

찌르고, 휘두르고, 내려찍고.

아직 어린 나이지만, 거의 평생을 함께한 목봉이 그동안 연습한 투로를 따라 충실히 움직여 주고 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한 초식을 끝낼 때마다 끊어지는 호흡이었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늘 그랬다.

조서인은 무공을 수련할 때마다, 자룡구대식 중에 고작 한 초식을 전개할 뿐인데도 근육이 끊어질 듯 아팠던 것이다. 그 아픔을 꾹 참으며 몸을 움직이면 간신히 한 초식이 끝나고, 그러면 다시 숨을 크게 들이쉬고 호흡을 다시 시작하며 다음 초식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거칠어지는 호흡도, 날뛰는 듯한 근육들의 비명도.

평소와 똑같았다. 다를 것은 없었다.

“큭.”

그리고 그 순간이 왔다.

항상 고비가 되어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

자룡구대식 중 네 번째 초식, 뇌파(雷波)였다.

창대로 바닥을 찍고, 허공으로 떠올라 몸을 팽이처럼 한 바퀴 반 회전시켰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짧게 여러 번 내쉰다.

등골이 찌릿하면서 팡, 하고 허공에서 공기가 터지는 소음이 들렸다. 허공에서 앞으로 찌르려던 목봉이 흔들렸다. 그리고 언제나와 똑같이, 균형을 잃고 바닥에 처박혔다.

“아야야.”

얼얼한 아픔과 함께, 한없이 자신에게 몰입했던 조서인은 다시 평소의 현실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주변의 색채가 눈에 보이고, 생소한 수련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의 감촉이 느껴졌다.

거기에 한 소년과 소녀가 숨을 헐떡이는 서인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저기…….”

벌떡 일어난 조서인의 목소리엔 자신이 없었다.

언제나 아버지에게 못난 놈이라며 타박만 받던 처지였다.

불세출의 재능을 가진 두 사람 앞에서 어찌 이리 건방지게 무공을 보여 줬을까 하는 자괴감이 가슴속에서 그림자처럼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심지어 지켜보던 두 사람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깊고 오묘한 침묵이었다.

우물에 빠진 것처럼 답답하고 숨이 막혀 왔다.

“이상……해요?”

“아니.”

쭈뼛거리며 물은 질문에는 의외로 백설지가 먼저 대답해 주었다.

그녀는 드물게 감정이 드러나는 얼굴로 조서인을 응시하다가, 푸른 보석과도 같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조서인이 소호를 보자, 소호는 예상했던 대로라는 듯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조서인은 공포에 질렸다.

뭔가 이상했던 것일까.

뭔가가 잘못된 것일까.

그런 그에게 백설지가 말했다.

“미쳤구나.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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