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83화 (212/686)

4권 8화

제15장 노력의 재능(才能)(3)

“지금껏 내가 두 눈으로 본 것들 중에 제일 충격적이야. 넌 도대체……, 아니, 네 사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야?”

백설지는 한어가 능숙했지만 중원에서 먼 곳에서 온 만큼 말투가 좀 다른 면이 있었다.

조서인은 송아지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백설지가 왜 충격적이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부……는 없고, 아버지는 있어요.”

“그럼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네.”

백설지는 강한 말투로 단언해 버렸다. 조서인은 그녀의 말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묘한 감정을 느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상태가 최악이니까. 널 가르친 게 누구든 욕을 먹어야 마땅하니까.”

최악이라니. 충격적인 평가였다.

백설지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잠시 살펴봐도 괜찮아?”

“네? 아, 네.”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설지가 조서인의 오른쪽 팔목을 잡아챘다. 그녀가 지그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으니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두근, 두근.

백설지의 길고 서늘한 손가락이 닿은 팔목에서 맥박이 요동쳤다. 시원한 듯 오싹한 느낌. 신경을 간질거리는 느낌이 팔목 언저리를 퍼져 나가다가 사라졌다.

“역시.”

조서인의 팔목에서 손을 뗀 백설지는 두둥실 가벼운 몸놀림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쌩하니 몸을 돌려 푸른색 눈동자로 소호를 노려봤다.

“소호, 넌 알고 있었지? 얘의 상태가 이렇게 특이하다는 거. 그래서 나한테 온 거지?”

“히힛, 모르겠는데요.”

소호는 양손을 머리 뒤에서 깍지를 낀 채 순진무구하게 웃었다.

순수한 얼굴은 그 자체로 상대방이 추궁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조서인은 말문이 막혔으나 백설지는 역시나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더더욱 차가워진 목소리로 추궁했다.

“거짓말. 아무래도 논리적으로 맞지 않아.”

“그래도 선배면 가능하죠? 삼륜공이면 대부분의 올바른 내력 흐름을 추측할 수 있잖아요? 서인이는 많이 괴로워했어요. 내공을 제대로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거봐.”

백설지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분홍빛 입술을 삐쭉였다.

“알고 있었네.”

“에이, 설마요.”

“그래도 나한테 온 건 잘했어. 이 상태로 무산학관에 입학한 것만 해도……, 정말, 대단해. 아직 첫 번째 학년이라 그런 걸까? 외공만 익히는 과정이니까.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조서인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귀가 먹은 것은 아닌데,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잘 되질 않았다.

“서인이라고 했지? 너는 어때?”

“네? 저요?”

“응. 넌 네 문제가 뭔 거 같아?”

조서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내공의 흐름……을 잘 모르겠어요. 무공 초식이랑 내공의 흐름이 안 맞는 것 같아요. 매번 하나의 초식에서 무공이 멈춰요. 뭔가 잘 될 듯 말 듯, 항상 수련할 때마다 이상해요. 동작은 맞는데…….”

“마지막에 실패했던 그 초식 말이지?”

“네.”

백설지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너는 내공심법을 배운 적이 있어?”

“네. 완전한 심법은 아니라고 듣긴 했지만. 가문의 심법을 배웠어요.”

“그 심법은 가부좌를 틀고 하는 좌공(坐功)이야?”

“그렇다기보다는 심법의 구결 같은, 운문만 전해져서…….”

백설지의 표정이 점차 굳어지자, 조서인의 목소리도 점점 작아졌다. ‘불안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먹구름이 조서인을 휘감았다. 영민하게 빛나는 백설지의 푸른색 눈동자가 소년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제 알겠어.”

“네?”

“몸은 초식에 따라 움직이는데 내공은 움직이지 않았어. 그렇지? 내공이 강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게 아니라 움직임이 바뀔 때마다 내공이 끊어졌고. 그래서 초식도 끊어지는 거야. 무공을 잘 쓸 수 있을 리가 없지. 하루하루 수련을 할 때마다 뭔가 달라지긴 하는데 크게 나아지는 것 같지는 않고. 불안했을 거야. 그럴수록 너는 더욱 열심히 수련했어. 처절할 정도로. 말 그대로 피를 토하도록.”

조서인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신내림을 받은 점쟁이를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눈앞에서 그를 응시하는 푸른 눈의 미녀는 조서인의 내면을 모두 꿰뚫어보는 듯했다.

“그게, 저기, 아버지는 일단 열심히 수련하다 보면 내공은 저절로 따라올 거라고만…….”

백설지는 탄식했다.

“역시 그게 문제였어.”

“네?”

“미안한 말인데. 너의 아버지는 무공에 조예가 깊지 않으시지?”

조서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침묵이 이미 답이라는 듯, 백설지는 다시 되묻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히 말을 이어 나갔다.

“누구나 훌륭한 무공 스승이 필요하다고 말해. 그건 십 년이 걸릴 것을 불과 오 년 만에 숙달하게 만드는 훌륭한 사부가 갖고 싶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공을 익히다가 생길 수 있는 ‘주화입마’ 같은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야. 그래서 훌륭한 스승이 필요한 거야.”

백설지는 은어 같은 손가락을 움직여 조서인의 팔목 위를 짚었다.

“너는 기경팔맥의 모든 혈도가 막혀 있어. 내공이 온전히 흐를 수 없는 몸이야.”

“네……?”

조서인은 청천벽력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아니……, 그럴 리가…….”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내공이 온전히 흐를 수 없는 몸이라니.

그 말은 무인으로서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말이 아닌가.

조서인은 자신이 눈보라 속에 내던져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앞이 캄캄하고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시려 왔다. 순간적으로 온갖 생각들이 다 났다. 덜덜 떨리는 입술 사이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매일,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무공을 수련했어요. 그런데, 내공이, 온전히……, 흐를 수 없다고요? 정말요? 그래서 그동안, 수련이 힘들었던 거예요?”

“그래.”

백설지는 잠시 시간을 둔 뒤 다시 말했다.

“지금은.”

“……네?”

“너의 몸은 지금 굉장히 특이한 상태야. 내가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본가에서 무공을 배울 때 삼륜공과 관련된 수많은 기록을 보았는데 그 안에서도 너와 같은 이야기는 본 적이 없어. 네 몸의 혈도 상태를 표현하자면……, 뭐랄까. 매일매일 주화입마를 겪으면서 혈도가 막히고, 매일매일 새로 단전을 만들어 낸 듯한 상태 같아. 그것도 하단전만이 아니라, 기경팔맥을 포함한 온몸의 혈도 각각에 말이야. 말 그대로 넌 온몸이 단전이야.”

조서인은 눈을 끔뻑거렸다.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일까.

백설지의 말을 귀로 듣고는 있는데, 머릿속으로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은 한 번 큰 길을 만들면 매번 그 길로 다니잖아? 그런데 너는 매번 갈 때마다 조그마한 길을 새로 파면서 돌아다닌 거야. 그것도 매일. 하루도 안 빠지고.”

백설지가 조서인의 왼손 손등을 가리켰다가, 팔꿈치 부근의 곡지혈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다시 어깨와 머리 부분의 태양혈도 가리켰다.

“심지어 여기. 그리고, 여기. 이렇게 띄엄띄엄 바위로 길을 막아 버렸어. 그 덕분에 막힌 곳에 내공이 좀 쌓이긴 했는데, 오히려 그게 안 좋은 일이 되었지. 막힌 쪽에 내공이 모여 있으니 무공이 써지기는 써지는 거야. 잘못된 게 뭔지도 모르고……, 무공이 써지니까 계속 그 길로 가서 바위만 들이받는 거지. 그래서 매번 초식에 실패하는 거야, 너.”

백설지는 한 걸음 물러서서 조서인의 전신을 다시 한번 품평하듯 지그시 응시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신비롭게 빛났다.

“이런 경우는 처음 봐. 보통 하단전(下丹田)의 기해(氣海)에 내공을 모으고, 거기에서 강물이 흐르듯 온몸으로 퍼지는데. 너는 혈도의 개수만큼 단전을 갖고 있어. 작고, 모래알 같은, 얼핏 쓸모없어 보이는 웅덩이들을 말이야. 초식을 수련할 때 막히면 어떻게 했어? 초식을 끝까지 전개할 수 없을 때. 너는 어떻게 수련했어?”

“맨 처음부터 다시, 아니면, 비슷한 다른 초식으로 연습했어요. 항상 같은 지점에서 멈추고, 숨이 멎었지만…….”

“거봐.”

백설지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잘되었어. 막혀 있다면 뚫으면 돼. 적어도 혈도마다 웅덩이는 있으니까. 거기에 물길을 뚫어 주면 되겠지.”

조서인은 여전히 멍하니 굳어 있었다.

너무나 큰일들이 연달아 벌어져서 소년의 자그마한 그릇으로는 감당을 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백설지의 말이 들리기는 하는데,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그저 희망이 조금 있는 건가? 하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그런 조서인에게 소호가 다가왔다.

여전히 환한, 태양처럼 빛나는 순수한 웃음이 얼굴 한가득 배어든 채.

“그러니까 서인아. 설지 선배 말은 이거야. 간단히 말하자면……. ‘그동안 너의 노력은 잘못된 게 아니었다.’는 거지.”

“어……?”

조서인은 멍하니 소호를 바라봤다.

항상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던 소년, 소호의 눈빛은 진지했다.

“잘못된 게 아니었어?”

“응.”

“내가, 매일 수련한 건 잘한 일이었을까?”

“응.”

“잘못된 방법이었더라도. 괜찮은 거야? 계속 무공을 익힐 수 있어?”

“응. 다 괜찮아. 걱정하지마. 넌 잘해왔어.”

조서인은 경이로움을 느꼈다.

소호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조서인 본인조차 스스로를 못 믿는데, 어째선지 소호는 그를 믿어 주고 있었다. 그 몇 마디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평상시 한없이 가벼워 보였는데 소년이 지금만큼은 거대한 바위처럼 듬직했다.

입술에서 떨림이 멎고, 식어 버린 것 같았던 폐부에 온기가 돌아왔다. 양손의 주먹을 꽉 한 번 쥐었다가 펴 보았다.

신기했다. 온몸에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따스한 온기, 살아갈 용기. 희망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랬구나. 괜찮았구나.”

어째서일까. 조서인의 눈가에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

“주작방과의 내기에서 우리는 무산학관에서 배운 무공만 사용해야 해. 그러니까 수업 때 배운 역근경을 사용하자.”

“역근경? 그, 파권 사부님이 가르쳐 주신 거?”

소호와 조서인, 그리고 백설지는 함께 수련을 하기로 했다. 조금 전에 눈물을 흘렸던 일은 부끄러우니까 비밀로 해 달라고 두 사람에게 약속을 받은 상태였다.

조서인은 역근경이란 말에 파권. 황보정 사부의 수업에서 배운 기묘한 동작들을 떠올렸다.

평소에 사람이 잘 사용하지 않는 근육들을 자극하는 동작들이라, 신입생들 대부분이 수업중에 쓰러지거나 뻗어 버리기로 악명이 높았던 수업이다. 실제로 선배들이 말하길 파권 사부의 수업이라면 지금도 치를 떨 만큼 다들 싫어하는 수업 일 순위라고 했다.

“그건 이미 수련하고 있는 거잖아?”

“우린 ‘그 역근경’만 수련하고 있었지.”

“다른 역근경이 있어?”

“응. 그리고 우린 그걸 서인이 네가 익힌 창술과 접목시켜볼까 해.”

“어……?”

“재밌겠지? 지금의 무공을 버리고. 우리가 창술을 새로 만드는 거야!”

소호는 한껏 신이 난 모습이었다.

조서인은 눈이 동그래진 채 그런 소호와 한 걸음 옆에 떨어진 곳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는 백설지를 번갈아 쳐다봤다.

“저기, 그게……, 그래도 되는 거야?”

“응? 당연히 되지!”

“그, 그래? 난 무공을 변형시키면 안 된다고 배워 왔어서…….”

조서인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기억이 시작될 무렵부터 조서인은 늘 ‘조가 창법’만을 수련해 왔다. 아버지가 믿을 만한 무인인가? 조가 창법은 정말 최고의 무공인가? 라는 의문은 떠나서, 일단 조가 창법을 있는 그대로 모두 배워 낸다는 것은 어린 소년에게 하나의 종교 같았던 것이다.

“그래? 음, 그러니까……. 원래 익힌 무공을 버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구나? 그런 이야기지?”

“불편……하다기보다는.”

“서인아. 넌 이미 네 창술에 대해 다 익혔고, 누구보다 제일 잘 알고 있잖아. 그럼 너의 무공이 강하다고 생각해? 네가 아는 어떤 무공보다 뛰어난 무공이야? 넌 지금 이상으로 강해질 수 있어?”

조서인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소호의 질문엔 사심이 전혀 없었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두 눈에선, 만약 조서인이 정말 그렇다고 대답하면 존중해 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고민하게 된다.

조가창법은 정말로 뛰어난 무공인가?

자기 자신은, 조씨 가문의 아들로서 그걸 진심으로 믿고 있는가? 이대로도 괜찮은 것인가?

“그건, 아니……야. 내공도 그렇고……, 불완전해.”

“그래?”

“응. 불……완전한 무공이야.”

막상 입 밖으로 꺼내니 인정하는 건 쉬웠다.

마음에 걸리는 불편함은 있었으나 그건 무공에 관한 것이 아니다.

조서인은 확신했다.

그동안 무공을 수련하며 부족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바꿔버릴 수 있는 기회가 지금 찾아왔다고.

“그럼 다시 만들자. 조가 창법을.”

씩 웃는 소호의 말엔 반문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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