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84화 (213/686)

4권 9화

제15장 노력의 재능(才能)(4)

“넌 정말 천재구나.”

조서인은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가감 없이 내뱉었다. 한번 마음을 열자 속마음도 쉽게 내뱉을 수 있게 되었다. 반면에 소호의 대답은 이상할 만큼 담백했다.

“칭찬은 고맙지만 난 천재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동네 할아버지들이 늘 말했는걸. 넌 천재가 아니라고.”

조서인은 어이없는 마음을 가득 담아 소호를 바라봤다.

“소호 너는 방금 내가 평생 익힌 창술을 한 번 보고 다 외웠잖아?”

“그건…….”

“설마 그건 아무나 하는 거라고 말할 생각은 아니지?”

소호는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마을에 있을 땐 몰랐는데, 무산학관에 와 보니 내가 조금 잘 하는 편인 것 같긴 해.”

“조금이 아냐, 조금이.”

조서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네가 천재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천재야?”

“그만둬. 자꾸 칭찬받으니까 쑥스러워. 사실 내가 생각하는 천재는……, 몇 명 있어.”

“몇 명? 몇 명이나 된다고?”

“우리 아버지? 아니면, 삼촌들……?”

“하하. 난 이제 네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두려워지기 시작했어.”

조서인은 진심으로 중얼거렸고, 소호는 웃었다.

“우리 마을에……. 음, 삼촌들도 그렇고. 뛰어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난 내가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 믿기지가 않네. 나 같은 둔재는 너네 동네에 가면 큰일나겠다…….”

“둔재라니? 넌 둔재가 아냐.”

“그 말은 고맙지만…….”

조서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소호가 진지하게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마음이 아플 지경이다.

‘소호는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밑에 있는 아이들은 다 똑같아 보이는 걸까?’

어쩌면 소호가 보기엔 신입생 중에 수재(秀才)로 평가받는 청룡방의 그 원씨 소년이나 자신이나 똑같아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커다란 나무 입장에선 바닥의 잡초들 사이에 누가 제일 큰지는 별로 관심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테니까.

게다가 원래 자신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 아니던가.

‘소호는 신기한 아이야.’

조서인은 소호가 조가 창법을 바꿔 보자고 했을 때 느꼈던 마음속의 불편함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뭐라고 해야 할까. 만약 누군가가 그때 정확히 무엇이 불편했냐고 묻는다면 둔하고 말주변도 별로 없는 자신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소호는 그 순간 평범한 아이들과는 뭔가가 크게 달랐고,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본질적인 무언가가 분명히 달랐다.

“그렇지만, 정말 대단해.”

“어떤 게?”

“조가 창법이 이렇게나 바뀔 줄 몰랐어. 처음과는 완전히 딴 판이야.”

“그치? 훨씬 좋아 보이지 않아?”

“맞아. 훨씬 좋아 보여.”

“재밌지? 재밌지 않아, 서인아? 난 이렇게 둘이서 함께 새로 만들어가니까 즐거워.”

소호는 열정에 가득한 채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진심으로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얼굴이었다.

‘어쩌면 천재의 조건은 이런 열정인 것일까?’

조서인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무공을 한 번 보고 모두 외워 버리는 건 기본이다.

아니, 거기까지라면 그저 이야기로 듣던 수재구나, 라고 생각하고 끝났을 테지만, 소호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무공 초식을 단순히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의 오의(奧義)라고 불릴 만한 비법까지 꿰뚫어보았다.

조서인이 처음으로 조가 창법의 전반부 초식을 시연했을 때 소호는 비전(秘傳)으로 전해 오던 핵심 요결을 그 자리에서 곧장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버렸을 정도니 말이다. 그 순간에 조서인은 이미 소호의 재능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흠칫 몸이 떨리는 전율을 느꼈었다.

신이다.

무신(武神)이 있다면 여기에 그 신내림을 받은 소년이 있다.

소호는 비전 핵심을 파악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달려들어 조가 창법을 낱낱이 해부하고, 본인의 해석대로 무공을 모조리 탈바꿈시켰다.

하나, 하나.

한 초식, 한 초식을 함께 고민하며 고치고, 또한 새로운 것을 끼워 넣는데 그게 한데 모이니 정말로 그럴싸한 무공이 되어 버렸다. 마치 식욕이 왕성한 대식가가 동시에 입맛이 까다로운 미식가이기도 한 것 같았다.

‘설명을 알아듣기 힘든 건 좀 아쉽지만…….’

섭주해가 소호에게 가르치는 일에는 소질이 없다고 했다던가.

그 말이 틀리진 않았다고 조서인은 생각했다.

“창을 땅에 짚고 뛰어오르는 건 공격을 위한 초식이 아니라고 생각해.”

“어째서?”

“으음, 그냥?”

“어……?”

“휙, 하면 피하고 파밧! 해야 하잖아?”

“…….”

조서인이 알아듣지 못하고 침묵하면, 소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차근차근 설명하는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이건 그러니까. 방어용이자 반격용이야. 상대방이 밑으로 달려들면 그때 파밧! 하고 쳐 내는 거지!”

“그러니까, 상대가 하단이나 중단을 공격하려 할 때……, 허점을 노려서 공격하는 무공이어야 한다는 거야?”

“그래! 그거야. 봐봐? 그러니까 그 전의 초식에선 일부러 여기를 휑하니 비우는 거야.”

“등각(登脚)을 찰 때처럼?”

“그래! 바로 그거야! 끌어들이고, 그리고 차올리는 거야. 그래야 말이 맞아. 이 동작이 그냥 뜬금없이 튀어나오면 안 돼.”

“그러니까……, 일부러 허점을 보여 주고 거길 공격하면 뛰어올라서 피하면서 공격해야 한다는 거지?”

“맞아. 바로 그거야. 봐봐, 그러니까 해석을 그렇게 하면 전반부 초식에도 영향을 끼친다? 바로 직전의 초식이 창을 붕붕 돌리는 초식이잖아.”

“아……! 그렇구나. 난 그동안 이 초식을 쓰면 중단이나 하단이 비니까 창을 비스듬하게 회전시켜서 방어도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아냐, 그러면 범위가 너무 짧아. 길이가 모자라.”

“그래?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

“창을 수평으로 돌려 봐. 최대한 빨리.”

“이렇게?”

“조금만 더, 회전에만 집중해서.”

조서인은 소호의 말대로 순순히 머리 위에서 최선을 다해 창을 회전시켰다. 수평으로. 비스듬한 게 아니라 상대의 머리만을 노려서 창을 회전시킨다.

“이렇게?”

“바로 그거야!”

소호가 생각하고, 조서인이 행동한다.

조서인은 열정도 전염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릿속엔 더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함께하는 무공 수련이 이렇게 재밌는 것이었다니. 처음으로 무산학관에 온 보람을 느꼈다.

거기에 옆에서 조언을 해 주는 백설지의 존재도 한몫을 했다.

그녀 또한 신비한 사람이었다.

백설지는 단전에 대해 이야기할 때랑은 완전 딴사람이 된 것처럼 과묵해져 있었는데, 그래도 수련을 하다가 내공의 흐름이 이상해지면 즉각 끼어들어서 조언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 동작. 곡지혈의 내공을 일 할 줄여야 해.”

“이, 이렇게요?”

“아니, 좀 더, 그리고 용천혈에 일 할 더 집중해.”

“이, 이렇게……?”

“아니. 그건 너무 힘을 많이 줬어. 하나에 집중하되, 전신의 균형을 망가뜨리면 안 돼.”

어려웠다.

말만 들어도 어렵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내공을 다루다 보니 조언대로 행동하기가 제일 힘들었다.

그래도 그녀의 말대로 심법을 운용하면 초식에 맞춰 내공이 자연스레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신뢰할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놀라울 지경. 소호와는 또 다른 방향의 천재가 분명했다.

‘아니, 이 경우엔 특별한 혈통이라고 해야 할까?’

소호와 백설지.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은 조서인은 그 어떤 때보다도 ‘무공’이라는 것에 순수하게 몰입하고 있었다. 천재 두 사람에게 일방적인 도움을 받는 듯한 느낌이라 황송하긴 했지만, 그 덕분에 조가 창법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감히 조가 창법을 망가뜨릴 생각이냐고 호통 칠 아버지의 모습이 잠시 떠오르긴 했지만……, 조서인은 고개를 붕붕 내저으며 잡념을 떨쳐 버렸다.

‘내가 평생 바라왔던 것이 이거야.’

십이 세.

아직 어린 나이지만, 그래도 무엇이 옳은 일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가르침을 흡수하려 노력했고,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농밀한 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지나갔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백 선배님. 고마워, 소호야…….”

녹초가 된 조서인은 햇빛을 받은 지렁이처럼 바닥에 쓰러져 축 늘어지고 말았다.

애써 상체만 일으켜 감사의 인사를 표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였다.

“수고했어, 서인아. 나머지는 내일 또 연습하면서 다듬어 보자.”

소호는 얼른 쉬라는 듯 손을 내저은 뒤, 언제나 그랬듯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일도……, 같이 연습해 주는 거야?”

“히힛, 당연하지. 우린 같이 싸울 전우잖아?”

조서인은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땀을 닦는 척, 이마를 양손으로 덮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응? 뭐라고, 서인아?”

“아냐. 고마워. 그럼 나도 좀 더 고칠 게 있나 고민해 볼게.”

“좋아. 그렇게 하자. 내일 봐, 서인아.”

조서인은 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을 배웅한 뒤, 연무장 바닥에 털썩 드러누워 버렸다.

“난 소호처럼 천재가 아냐.”

천천히, 현실을 자각하기 위해 일부러 말로 내뱉어 보았다. 나직한 목소리가 공허하게 퍼져 나갔다.

“그렇지만, 지고 싶지 않아. 열정까지 져서는 안 돼.”

조금 느리더라도 꾸준히 가면 된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사자성어도 있다.

조서인은 짝! 소리가 나게 양손으로 자신의 양 볼을 때렸다.

얼얼했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렇기에 더욱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그런 현실이다.

“난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못하니까……, 하나씩. 하나씩. 최선을 다해서.”

노력이라는 신이 있다면, 조서인은 그의 첫 번째 열렬한 신도일 것이다.

범재는 범재 나름의 수련법이 있다. 할 수 있는 것에 먼저 집중해야만 했다.

집중하고, 몰입하고, 죽을힘을 다해야 했다.

조서인은 땅바닥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며 조금 전의 내용들을 되새겼다. 범재(凡才)의 두 눈이 용광로처럼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

“물어볼 것이 있어.”

백설지는 수련장을 빠져나오던 중에 먼저 말을 걸었다. 그녀는 도드라진 분홍빛 입술을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어째서 저 아이야? 성품은 착하고 열심히 하려 하지만, 백호방을 대표할 만한 자질로 보이지는 않아. 상승 무공에 대한 이해가 없는 탓일 거야. 무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으음, 그런가?”

소호는 머리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서인이는 둔재가 아니에요.”

“그렇지만 수재도 아니잖아.”

소녀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소호는 자연스레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시선을 보냈다.

“설지 선배가 생각하는 수재란 어떤 사람이에요?”

“남들보다 학습이 빠른 사람. 남들이 일(一)을 배울 때, 이(二)를 깨닫는 사람.”

“그래요? 습득이 빠른 사람이 수재라고 생각하시는구나.”

“소호는 다르게 생각해?”

“네.”

소호는 마치 예전부터 생각해 둔 것이 있는 듯 보였다.

“일(一)을 가르쳤을 때 일(一)을 온전히 배우는 사람이 수재예요.”

“……!”

백설지는 한 방 먹은 듯, 바로 반박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듯 보였다.

“그런가.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히힛, 제가 생각한 건 아니지만요. 아버지가 예전에 해 주셨던 말이에요.”

소호가 빙긋 웃는다. 태양처럼 환한 미소 사이로 장난기가 비쳤다.

“그런데 설지 선배. 선배는 서인이가 오늘 우리 두 사람이 도와준 내용 중에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네가 가르쳐 준 초식? 아니면 내가 가르쳐 준 내공?”

“둘 다 합해서요.”

“소호 너의 말대로라면 ‘온전히’ 배우는 게 기준이겠지?”

“네.”

백설지는 잠시 고민하다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많아야 오 할(五割)이라고 생각해.”

소호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서인이는 둔재가 아니에요.”

“뭐?”

“두고 봐요. 내일. 내 말이 증명될 거예요.”

빙긋 웃는 소호의 눈빛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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