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85화 (214/686)

4권 10화

제15장 노력의 재능(才能)(5)

“거기 너, 이름이 명로라고 했던가?”

화려한 주작방의 집무실, 주작방의 방장 곽도엽은 평소처럼 비스듬히 앉은 채 손톱을 다듬으며 질문했다. 대답은 곧바로 들리지 않았다. 방장의 집무실에 들어온 이번 신입생은 당돌한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느긋하게 집무실을 둘러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흠! 야, 야, 신입생. 방장님이 묻잖아.”

“예에? 아, 예.”

주작방 제 이(二) 책사, 고진명이 다그치니 신입생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곽도엽을 쳐다봤다.

‘흥미롭군.’

직접 보니 꽤나 멀끔하게 잘생겼으나 눈빛이 또렷하지 못하고 재기가 느껴지지 않는 멍한 얼굴이었다. 단출한 백의(白衣)를 입고 허름한 끈으로 허리를 묶었는데, 매듭도 제대로 매지 않고 허리끈이 축 늘어져 있었다. 거기에 머리까지 부스스하니 누가 봐도 게으르고 지저분한 인상이었다.

“이런 놈이 위충현과 동수를 이뤘단 말이지.”

“그건…….”

명로는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그냥, 어쩌다가…….”

“그냥? 어쩌다가?”

“대련을 하면 너무 몰입해 버려서…….”

곽도엽은 코웃음 쳤다.

“위충현이 들으면 화내겠어. 너무 집중해서 비겨 버렸다니.”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를 들으려는 게 아니야. 그보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나는 사람을 잘 믿지 않아.”

곽도엽은 자신이 목에 걸고 있는 비단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딱 두 가지 경우에만 사람을 믿어. 첫째, 그 사람이 진심으로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을 때. 둘째, 그 사람이 원하는 걸로 내가 거래를 할 수 있을 때. 그때만 나는 사람을 믿는단 말이야.”

곽도엽은 “상도(商道)라는 건 그래서 재밌는 거야.”라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런 의미에서 난 너를 믿을 수 있다.”

“저를……?”

명로가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명로. 주작방으로 온 체 시험 합격자 중에 꼴찌였던 녀석. 그저 그런 지방 군벌의 추천으로 입학 한 신입생.”

“제가 좀 부족해서…….”

“아니, 부족해서는 아니지.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던 거겠지. 개방의 후개(後丐)가 무산학관에 들어왔다면 큰 소동이 벌어질 테니까. 안 그래?”

집무실에 정적이 흘렀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고진명조차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라 눈을 부릅뜨고 명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구파일방 중에 하나인 개방.

그 후계자가 관에서 운영하는 무산학관에 들어와 있다면 이건 생각보다 훨씬 큰일이다.

“무슨 소리신지……?”

“아직도 시치미를 떼는 건가? 하긴 뭐, 자신만만할 만도 하겠더군. 구파일방 중에 개방이 워낙 사람이 많기는 하니까. 그 안에서 누가 누군지 어떻게 다 파악하겠어. 개방에는 후개 후보가 세 명이 있다던데……. 머리가 좋다고 소문난 무칠인가 무팔인가 그 녀석 말고는 무림에서 후개 후보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더란 말이지. 심지어 같은 개방의 장로들도 말이야. 현 방주가 꽁꽁 숨기고 있나 봐. 그렇지?”

곽도엽은 만지작거리던 비단 주머니를 손에서 놓았다. 그러고는 손톱을 다듬던 자그마한 칼을 명로를 향해 집어 던졌다.

“……!”

가볍게 던진 듯 했는데, 바람 소리가 날 만큼 칼에 담긴 힘이 심상치가 않았다.

명로는 한 발을 부드럽게 뒤로 돌려서 빼며, 자신의 미간을 향해 날아오는 소도를 손바닥으로 아래로 쳐 냈다.

팍! 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작은 칼은 바닥의 양탄자에 꽂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런데 말이지.”

곽도엽은 명로의 항의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도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작은 소문들은 돌았어. 개방의 후개 세 명은 각각 재능을 나눠 가졌다. 한 명은 평범한 듯 인품이 좋고, 한 명은 머리가 좋고, 한 명은 무골이 좋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올해 무공을 숨기고 들어온 신입생이 있네? 거지라기엔 깨끗하긴 한데, 생활 습관은 좀 게으른지 외모를 가꾸지 않고. 희한하게도 백의에 허리끈은 절대로 매듭을 매지 않는단 말이지. 그래서 내가 좀 알아보니 개방의 후개들은 백의를 입고 허리에 매듭을 매지 않는 백의개(白衣丐)에 무결(無結)이 규칙이라며? 이쯤 되니 답은 저절로 나오더군. 다만 내 생각엔……. 너는 이런 단서들을 일부러 흘렸어. 알아봐 줄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다시 한 번 집무실에 침묵이 흘렀다.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명로가, 갑자기 씩 웃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정황상 증거일 뿐인데요.”

“그렇지. 네가 조금 전에 취팔선보를 보이지만 않았다면.”

“후하핫! 그래서 칼을 던지셨나요? 살기까지 담겨 있던데.”

“피할 줄 알고 있었다. 뭐, 못 피하면 쓸모가 없으니 상관없기도 하고.”

“무서운 분일세.”

명로의 멍했던 눈빛이 재기 넘치는 소년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제야 모든 조각들이 맞춰진 것처럼 명로의 모습이 달라졌다.

재기 넘치는 거대 정파의 후계자.

그것이 명로의 진정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맞아요, 곽도엽 방장. 저는 일부러 누군가 저를 알아봐 주길 바랐어요. 그 누군가는 곽도엽 방장일 거라 생각했고. 제 예상이 틀리지 않았네요.”

“역시. 그렇다면 내가 뭘 제안할지도 알고 있나?”

“아뇨, 하지만 대가로 뭘 줄 건지는 알겠네요.”

곽도엽은 피식 웃었다.

“뭘 대가로 줄 것 같지?”

“당연히 돈이죠.”

명로는 잠시 한 호흡을 쉬고 계속 말했다.

“여기는 주작방이잖아요?”

“그렇지. 여기는 주작방이지. 그리고 너도 주작방에 뽑힌 인재고.”

“옳으신 말씀.”

황금과 욕망.

그 두 가지가 주작방이 추구하는 것 아니던가.

“개방에 왜 돈이 필요한지 궁금하긴 한데……, 뭐, 다른 건 아무것도 묻지 않겠어. 다만 이번에 백호방과 하는 내기에선 무조건 이겨라. 최선을 다해서.”

“흐음? 금액은요?”

“합리적인 가격으로 하지.”

가격 따위 정하지 말고 일단 믿고 일하라는 소리였다.

명로는 세세하게 캐묻지도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하더니 곧바로 수락하였다.

“좋아요. 하겠습니다.”

“그래. 아마 내기는 내일일 거다.”

“언제든 좋아요. 그보다. 방장님, 한 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곽도엽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요즘 신입생들은 질문하는 게 취미인가? 아니면, 무골(武骨)인 놈들 특징인가?”

“예?”

“아니다. 그래서 질문이 뭐지?”

“방장님이 목에 걸고 있는 비단 주머니엔 뭐가 들었죠?”

곽도엽은 비단 주머니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의 취향치고는 얌전한 백색 비단 주머니였다.

“염주.”

“……예?”

“학관 뒤에 있는 영험한 절의 주지 스님이 쓰던 염주다. 비싸게 주고 사 왔어.”

곽도엽이 비단 주머니를 만지작거리자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명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지 눈빛이 흔들렸다.

“어어? 그걸 왜 목에 차고 있는 거죠?”

“치료를 위해서.”

“예?”

“됐지? 그럼 이만 가라. 내일 내기를 잘 준비하고.”

“아아, 예.”

명로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처음 집무실로 들어왔을 때처럼 다시 멍한 얼굴로 변해서 밖으로 나갔다. 명로를 데리고 왔던 고진명도 나가자, 곽도엽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몸을 똑바로 하여 앉았다.

“요즘 들어 쉬운 일이 없군.”

그는 여전히 아픈 옆구리를 만지작거리다가, 비단 주머니를 상처 가까이 가져갔다.

재미있는 건, 정말로 이 염주를 가져온 뒤에 확실히 몸이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녀석의 말이 맞았군.”

곽도엽은 내심 소호에 대한 경계심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심검에 대한 상처를 알아보고, 그 해결책도 알려 준 소호.

경계하지 않는다면 더욱 이상한 일일 것이다.

“역시, 주목해야 할 녀석이야.”

곽도엽은 깊은 생각에 빠져 침묵에 잠겼다.

***

“……인. 서인아!”

조서인이 눈을 떴을 때 제일 처음으로 본 얼굴은 소호였다.

멍한 머릿속, 눈을 끔뻑거리다 보니 흐릿했던 시야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온다. 거무튀튀했던 세상에 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와중에 생각했다.

소호의 얼굴은 어째서 이렇게 심각해 보이는 걸까? 평소에 햇살 같던 얼굴은 어디로 간 것일까?

“웃는 얼굴은 어디로 갔어……?”

“응?”

“소호는 웃는 아이잖아…….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야……?”

“하하핫! 하하하핫!”

소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배를 잡고 드러누웠다. 웃을 만한 말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웃는 거야?”

“하하하핫!”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런 걸까? 머릿속이 멍해서 생각이 제대로 되질 않았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몇 번 두드려 보았다.

“아우으…….”

조서인은 몸을 움직이려다가 그제야 깨달았다.

온몸에 성한 곳이 없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데도 근육통이 느껴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픔이 느껴지니 기억이 조금 돌아왔다는 점이다. 딱딱한 대리석 바닥에 누운 채로 잠이 들다니. 지금 다시 생각해도 대단하다. 옆을 보니 잠들기 직전까지 잡고 있었던 뭉툭한 목봉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잠깐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려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내가 수련을 하다가 잠이 든 거야? 세상에!’

경이로운 일이었다. 조서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웃지 마…….”

“하하하핫! 하핫!”

소호는 조서인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웃음보가 터져서는 정신없이 웃어 댔다.

“그거 알아, 서인아?”

“내가 땅바닥에서 잔 거?”

“아니, 그거 말고. 너 지금 웅묘(熊猫) 같아. 눈 밑이 엄청 시커매.”

“어? 뭐라고!”

깜짝 놀란 조서인이 몸을 일으키려다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온몸에서 강렬한 근육통이 느껴졌다. 그 와중에 너무 갑자기 움직인 탓일까. 코끝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야야, 코피난다, 서인아.”

“뭐어?”

조서인이 소매로 슥 코밑을 훔쳐보니 생생한 핏덩이가 묻어 나왔다.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세상에, 내가 코피를 흘리다니! 그것도 수련을 하다가!”

“히힛, 어째 서인이 너는 좋아하는 것 같다?”

“기, 기쁘지. 당연한 거야! 이렇게 미친 듯이 수련해 본 건 생전 처음이야!”

“그래? 어제 무공 수련이 그 정도로 재밌었어?”

“엄청! 말로 표현 못할 정도로!”

조서인은 잔뜩 흥분해 있었다.

잠에서 완전히 깨고 나니 기억난다.

어젯밤 얼마나 집중했고, 얼마나 기뻤는지.

밀도 있는 시간을 보낸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지.

“그래? 같이 무공 수련을 하길 잘했다.”

“내가 할 말이야. 소호야, 정말 고마워. 난 지금 모든 게 놀랍고 신기해!”

조서인은 두근거리는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솔직한 표현이 의외였던 걸까.

소호는 잠시 숨을 삼키더니, 자못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나도 그래. 그래서 널 보면 신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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