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11화
제15장 노력의 재능(才能)(6)
소호는 애써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연노랑 전낭에서 손바닥만 한 천 조각을 꺼내 조서인의 코에 갖다 대 주었다.
소호가 웃음을 참는 모습을 보니, 조서인은 갑자기 너무 흥분했나 싶어 조금 쑥스러워졌다.
“아아, 근데 뭔가, 되게 부끄럽네…….”
“히힛, 아냐, 아냐. 대단한 거야. 그래서? 어제는 언제까지 연습했어?”
“어두울 때도 계속 하긴 했어. 내 기억에 하늘이 어스름하게 밝아 올 때쯤까지 수련했었는데……, 시간을 잊어버려서 언제까지 연습했는지는……, 잠깐만! 지금 몇 시야?”
조서인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늘은 환하고, 해도 중천에 떠 있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수업이 시작하는 이른 아침의 느낌이 아니었다.
“됐어, 됐어. 어차피 파권 사부님 수업은 끝났어. 내가 오늘 서인이는 몸이 안 좋아서 수업에 못 온다고 했으니까. 걱정 마.”
소호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으나, 조서인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파권 사부한테 그런 변명이 통했어?”
“아니. 감히 요령을 피워! 라고 소리치시면서 내일 수업에 오면 수련을 두 배의 강도로 시키겠다고 하시더라.”
“으아아…?”
조서인은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난 죽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야……. 멍청이야 나는. 왜 난, 다음 날 수업을 생각도 못했지?”
“히힛, 그만큼 수련에 몰두했다는 거지, 뭐.”
“그런 말로 넘어갈 일이 아냐…….”
“괜찮아, 괜찮아. 그보다 일단 운기조식부터 해 봐. 웅묘 같은 너의 얼굴부터 해결해 보자.”
“하아……. 알았어.”
조서인은 순순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사실 이 좌식 내공 수련법도 소호와 백설지 두 사람에게 배운 것이다. 무산학관에서 배우는 기본 호흡법에, 백설지가 조가 창법에 내공의 흐름을 맞춰서 구결을 짜 맞춰 준 것이었다.
들이쉬고, 내쉬고.
조용히 호흡에 집중했다.
조서인의 숨소리가 안정되며 나직하게 잦아들었다.
단전에서 시작된 내공의 흐름이 전신을 돌기 시작했다. 온몸이 따뜻해지면서 전신에 활력이 도는 느낌이었다.
“후우…….”
몸 안의 기(氣)로 기경팔맥을 한 바퀴 돈 뒤에야 조서인은 눈을 떴다.
소호가 근처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은 채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얼굴이 훨씬 좋아졌어. 내공에 완전히 익숙해졌구나?”
“그, 그래?”
“응. 운기조식 한 번 한 게 효과가 좋네. 이제 웅묘 같지가 않아.”
“다행이다.”
조서인은 괜스레 손바닥으로 눈 밑을 문질러 보았다.
“그래서 서인아. 어제 수련은 어땠어? 결과는?”
조서인은 곰곰이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사실 특별한 기억은 없어. 그냥 초식을 수련하다 보니 정신없이 빠져들어서……. 계속해서 수련하고, 수련하다가 잠깐만 운기조식을 하면서 쉬자고 앉았는데……. 그걸로 끝이네.”
“그럴 것 같았어.”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소호는 그 말만으로 다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다 안다는 듯이 씩 웃기까지 한다.
“그래도 뭔가 달라졌지?”
“……응.”
“연습한 걸 한번 보여 줄래? 괜찮겠어?”
왠지 소호는 조서인이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도 눈치채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조서인은 소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대단한 친구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 아이를 따라가긴 힘들겠지? 그래도 따라가고 싶어. 이 친구와 같은……. 아니, 비슷한 높이에서라도 세상을 보고 싶어.’
친해질수록 호승심이 생겼다. 마음이 확고해지니 더 이상 근육통조차 두렵지 않았다.
“한번 해 볼게.”
조서인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손가락 끝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부위가 없었지만, 희한하게도 양손에 목봉을 잡는 순간 아픔이 사라졌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전신이 고양되고 머릿속이 맑아지고 있었다.
‘그래. 나는 항상 소호처럼 되고 싶었어.’
조서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할 수 있어.”
단숨에 몰입되는 감각, 온몸의 신체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선 느낌.
“……해 볼게.”
조서인은 목봉 끝으로 상단을 겨누며 힘차게 뛰어올랐다.
***
조서인은 모든 일들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소호나 백설지와의 수련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내기 승부 당일이 되어 있었다.
“소호의 말이 맞았어. 내가 틀렸네.”
“네?”
“넌 둔재가 아니야.”
수련 둘째 날, 무공 수련의 결과를 본 백설지는 살짝 분한 얼굴로 조서인 본인도 모르는 무언가를 인정해 주었었다.
백설지가 갑자기 둔재가 아니라고 인정해 준 것에 당황하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기뻐하는 게 맞는 걸까?
두웅― 두웅―.
심장을 울리는 북소리를 들으며, 조서인은 백설지에게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던 그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난 둔재가 아니다. 난 둔재가 아니다. 난 둔재가 아니다…….”
조서인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입안이 바짝 말라 왔다.
계속 중얼거리는 건, 지금 머릿속에 생각나는 게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무산학관 본관에 있는 ‘연무장’에 서 있었다. 주작방과의 내기의 승부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 층짜리 목조 전각 앞에 평탄하게 깎인 값비싼 대리석들이 바닥으로 깔려 있었다. 연무장은 건장한 성인 일백 명이 양팔을 벌리고 서도 공간이 남을 만큼 커다란 규모로 만들어져 있었고, 한쪽에는 십팔반병기와 몸에 착용할 수 있는 묵직한 장구들이 수련을 돕기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조서인은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사방에서 웅성거리며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무산학관의 학생들이었다. 오십 명가량의 신입생은 물론이고 선배들도 많은 수가 모여 있었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필요는 없었잖아!’
조서인은 무대 체질이 아니었다. 아니,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 오히려 기가 꺾이는 성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소년은 단언할 수 있었다. 지금이 바로 남루하지만 평온했던 십이 년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걱정하지 마, 서인아. 넌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어. 얼마 전의 너랑은 전혀 다르다고!”
소호가 밝은 목소리로 위로해 주었으나 어쩐지 평소와 달리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았다.
“그, 저기, 넌 정말 대단하다……. 저 많은 사람들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거야?”
“응? 사람들이 많으면 어때?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 되잖아?”
소호는 진심으로 이해를 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서인은 잠시 욱하고 튀어나오려던 감정을 눌러 담았다.
“너의 그런 점이 나와는 다른 것 같아, 소호야…….”
조서인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한두 번 느꼈던 것이 아니었다.
소호든 백설지든, 두 사람은 모두 ‘범재(凡才)’의 고민이라는 걸 모르는 듯 보였던 것이다.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네. 누가 그 두 사람을 평범하다고 부를 수 있을까?’
조서인은 두 사람 모두, 처음 엄마 배 속에서 나왔을 때부터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쳤대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인아. 오늘은 너한테 되게 중요한 날이 될 거야.”
반면에 소호는 평소보다 진지한 기색이었다.
“나한테? 그런 말을 들으면 더 긴장이 되는 것 같아……. 그리고, 저기, 오늘 내기에 내가 나가지 않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럴까? 근데 난 지금껏 주해가 한 말이 틀리는 걸 거의 못 봤어.”
“끄응.”
조서인은 섭주해의 예측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 소호를 보니, 실제로 자신이 싸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긴장 돼?”
“어. 잠깐이라도 긴장을 풀면 주저앉을 자신이 있어.”
조서인은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몸이 뻣뻣하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소호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히힛. 그런 건 자신 있으면 안 되잖아!”
“하아, 그렇긴 한데…….”
“음, 그러니까 서인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소호가 손가락으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구경꾼들을 가리켰다.
“저어―기 있는 사람들 전부 너랑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야. 알았지? 무공을 겨루는 순간만큼은 상대와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거야. 누가 보고 있든 신경 쓰지 말고 내기에만 집중해. 알았지? 그럼 다 잘 될 거야.”
“으음……, 알았어. 그래! 해 보자!”
조서인은 짝 소리가 나도록, 양손으로 자신의 볼을 두드렸다.
“친구가 이렇게까지 말해 주는데, 계속 떨고 있을 수는 없지!”
“그래. 바로 그거야. 서인아.”
소호는 가까이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 집중력만 있으면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잊지 마, 서인아. ‘집중력’이야. 넌 그걸 타고났어.”
“그래? 내가 뭔가를 타고났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내가 보증할게. 넌 재능이 있어.”
소호는 방긋 웃으면서 조서인의 어깨를 팡팡 두드려 주고는 멀어졌다.
조서인은 종교에 빠진 신도처럼 멍하니 집중력이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되뇌었다.
“나는 재능이 있다. 나는 재능이 있다. 나는 재능이 있다…….”
보라색 무복을 입고 귀밑쯤에서 머리를 짧게 자른 단발머리의 소녀가 다가오지 않았다면, 조서인은 내기가 시작할 때까지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서인아!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네?”
불쑥 나타난 문주희는 여전히 장난기 많은 고양이 같은 소녀였다. 쌜쭉하니 올라간 입꼬리에서 도발적이고 장난스러운 기색이 느껴졌다.
“준비는 잘 됐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으음,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어.”
조서인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바닥을 툭툭 누르면서 대답했다.
“그거 참 서인이 답네.”
“그, 그래?”
“응. 난 재능이 있다고 중얼거리면서 잘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니.”
“하하하…….”
서인은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긴장은 되는데……, 뭐랄까. 그래도 지금의 나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야. ……아니지. 아니지. 방심하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오늘 꼭 이길 거야. 견갑을 따내야 해! 내기에서 이길 거라고!”
“어머나, 무서워라. 주작방은 긴장해야겠는걸!”
문주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말로만 그럴 뿐, 별로 주작방의 승리에 연연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 그녀다웠다.
“그래도 다행이야. 원래는 오늘 주작방 방장님이 여기에 신경을 더 쓰려고 했는데, 마침 지금 학관에 귀빈이 찾아온대. 그 일 때문에 각 기숙사의 방장들이 다 학관장실로 불려 갔어. 그 덕분에 여기가 좀 허술해진 거야.”
조서인은 문주희의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어? 어쩐지 오늘 우리 백호방의 봉천 방장님도 안 보였어.”
“그렇지? 그게 다 학관장실로 불려가서 그래.”
“그런데 어느 정도의 귀빈이시길래 기숙사 방장님들이 전부 불려 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뭔가 관직에 있는 사람 같기도 하고, 커다란 상회의 사람 같기도 하고……. 아무튼, 학관장님과 예전부터 아는 사이래. 대단한 손님인가 봐. 가면철왕이 직접 나서서 연회를 준비하고 있다던데?”
“학관장님이 직접 나설 정도라고……?”
조서인은 무산학관의 학관장, 가면철왕 철우의 위풍당당한 거구를 떠올렸다.
가면철왕이라고 하면 전대 무림맹주를 보필하던 수신호위로서 무림에서 손꼽히는 고수다. 그런 그가 직접 나서서 예를 차릴 정도라니. 누군지는 몰라도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일 게 분명했다.
“그보다 서인아. 이번 내기에서…….”
“응?”
“그게…….”
문주희는 드물게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