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87화 (216/686)

4권 12화

제15장 노력의 재능(才能)(7)

“음, 이런 거 말하면 반칙이려나? 하지만 말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아아! 정말, 나도 주작방이니 아무래도 좀 그렇겠지?”

“무슨 말이야, 주희야?”

“주작방이 좀 치사한 느낌이 들어서 그래.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그래! 말해 줄게! 우리가 모르는 사이가 아니잖아? 있잖아. 주작방에서 무공이 가장 강한 사람을 고르라면 다들 누굴 고를 것 같아?”

“위충현…… 선배?”

조서인은 수업을 들으면서 언뜻 들은 적이 있었던 이름을 떠올렸다.

“맞아. 누구나 위충현 선배를 말해. 현무(玄武)의 이태산, 청룡(靑龍)의 태성천. 백호(白虎)의 유준. 그리고 주작(朱雀)의 위충현. 지금은 그 네 명이 사신(四神)의 최강자라 불려. 그중에 위충현 선배의 검술은 대단하거든? 그런데 이번 신입생들 중에 그 위충현 선배랑 맞먹는 실력을 가진 신입생이 한 명 있었어.”

“어? 뭐라고!”

조서인은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내기 직전의 긴장감이 단번에 날아가 버렸다.

“위충현 선배는 웬만한 일급 고수들이랑 비슷하다고 들었었어. 그런데 우리 같은 신입생이 그 선배님이랑 비슷한 실력이라는 거야?”

“글쎄. 무공 실력이라는 게 평가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대련에서 승부를 쉽게 못 가릴 정도로 뛰어난 건 분명해.”

“대단한 친구네…….”

“맞아. 뭔가 신기한 애야.”

“근데 그 애는 어떻게 위충현 선배랑 대련하게 된 거야?”

“기숙사 내부에서 신입생들이 선배들이랑 한 번씩 겨뤘어. 너희도 그랬지? 듣자하니 무산학관 기숙사가 각자 다 하는 전통이라고 하던데?”

“으음…….”

조서인은 얼마 전에 백호방에서 있었던 선배들과의 대결을 떠올렸다.

백호방의 무투파 신입생 네 명 중에 조서인 혼자만 패배했던 쓰라린 기억이었다.

“그런데 재밌는 게 뭔지 알아?”

“뭔데?”

“그 신입생은 입학 시험 때는 순위 안에도 못 들었다는 거야.”

“정말로? 위충현 선배랑 비길 만한 애가 순위에도 못 들었다고?”

“내 생각에는 시험에서 실력을 숨겼던 것 같아. 그 아이가 이번에…….”

문주희가 귓속말로 뭔가를 더 말해 주려던 그 때, 연무장 한쪽 구석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쿵―. 쿵―.

질 좋은 가죽 재질의 북이 심장 소리를 닮은 울림을 뿜어냈다. 주작방의 소년, 소녀들이 북소리에 맞춰 금색 주작문(朱雀文)이 새겨진 깃발을 펄럭거리며 양쪽으로 휘둘러 댔다.

주작방에 있어서 내기란 신성하다더니.

붉은색 깃발 아래 모여 있는 학생들은 모두가 전쟁 직전의 군인들처럼 서슬 퍼런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여기까지네. 난 이제 저쪽으로 가 봐야겠어. 힘내, 서인아.”

“어어. 와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긴장은 좀 풀렸지?”

“어. ……어?”

그러고 보니 어느새 조서인은 다리를 떨지 않고 있었다.

설마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지금껏 말을 걸어 준 것일까?

조서인은 깜짝 놀랐으나, 감사를 표할 시간은 없었다.

문주희는 여전히 장난기 많은 고양이처럼 웃을 뿐이었다. 소녀는 마지막으로 ‘개를 조심해!’라고 속삭인 뒤, 지금부터 대결할 사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친근한 태도로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뭐가 뭐였던 거지……?

조서인은 여우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소호와 기숙사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미 백호방과 주작방의 사람들은 연무장의 중심에 모여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기숙사 방장들이 모두 학관장실로 호출된 탓일까. 백호방 쪽에는 철웅이, 주작방 쪽에는 주작방 제 이(二)의 책사라 불리는 퉁퉁한 몸매의 고진명이 앞으로 나와 있었다. 각 기숙사의 이인자들이 이번 내기의 주최자인 듯 보였다.

“어이, 백호방의 수치. 우리가 제안할 경기는 일수일퇴(一手一退)다. 숫자가 적은 너희한테도 좋은 가장 공평한 경기이니까. 불만은 없을 테지?”

철웅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일수일퇴라고? 각자 초식을 하나씩 쓰고 누가 물러나나 겨루는 그거?”

“그래, 그거다. 너희 백호방은 항상 그랬잖아? ‘우린 몇 명 안 되지만 모두 천재다.’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별문제 없으시겠지? 천재님들?”

철웅은 다혈질 성격이었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고진명이 노골적으로 도발하고 있음에도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천재라고 하기는 좀 그런데. 뭐, 그래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일수일퇴면 괜찮을 것 같네. 숫자가 많다고 유리한 승부도 아니고.”

“그래. 우리 방장님께 감사하라고. 너희가 먼저 내기를 걸어온 이런 상황에서도 너희가 숫자가 적다는 것을 배려하여 그렇게 정하신 거니까.”

철웅은 코웃음 쳤다.

“글쎄? 너희 방장님은 내가 좋아할 수가 없어서. 이번에도 틀림없이 쓸데없는 속내가 있겠지. 주목받는 우리 백호방 신입생들의 실력을 알아본다든가 하는 그런 거 말이야.”

“흥! 역시 속이 좁구나, 너는.”

고진명은 말과는 달리 뜨끔한 듯한 태도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찌됐든 빨리 시작하자고. 대단한 것도 아니고. 고작 수업에 쓸 각반을 걸고 하는 건데. 뭐, 이리 난리들인지 모르겠네.”

“그래. 그건 동감이다. 빨리 시작하자고. 우리 애들이 당연히 이길 승부인데 뭐 이리 난리들인지.”

“하? 뭐라고 했냐, 지금. 당연히 너네가 이길 승부다?”

“당연하지.”

철웅이 자신만만하게 웃는 만큼 고진명의 얼굴도 찌푸려져야 정상일 텐데, 이상하게도 고진명은 명백히 비웃고 있었다.

“뭐, 그리 자신감을 갖는 건 좋지. 해 보자고, 한번.”

“흐음, 그래서? 주작방은 몇 명이 나오지?”

“한 명. 단! 입관 시험에서 성적이 제일 낮았던 아이들끼리 붙어 보자고.”

“뭐?”

“왜? 내 말이 이상해? 입학 시험 때 시험 성적이 낮았던 순서대로 대결해 보자는 거야. 내가 굳이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너희 신입생들 중에는 체 시험과 용 시험 수석이 한 명씩 있잖아? 그래서야 우리가 너무 불리하지. 그러니까 반대로 성적이 ‘제일 낮은 아이’끼리 대결해 보자는 이야기다. 일 등끼리 싸우든 꼴찌끼리 싸우든 결국 똑같이 기숙사의 수준을 잴 수 있잖아?”

고진명의 제안은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이야기만 봐서는 그럴듯했다.

“생각해 봐. 우리 쪽도 상위 성적을 가진 아이들은 포기하는 거라고? 대표로 주작방 신입생 중에 꼴찌를 내보낼 거야. 어차피 서로 성적 순위를 아니까 속임수 따위는 없지. 어때? 이게 기숙사 대 기숙사의 평균적인 실력을 겨루기엔 오히려 좋은 방법이지 않냐. 너희 백호방은 숫자는 적어도 전부 천재들이라면서?”

“흐음.”

실제로 철웅은 고민하고 있었다.

철웅뿐만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백호방의 학생들 모두가 고민했다.

다만, 뒤에서 듣고 있던 조서인은 그 순간 문주희가 해 줬던 말이 떠올랐다.

‘이번 신입생들 중에 그 위충현 선배랑 맞먹는 실력을 가진 신입생이 한 명 있었어.’

‘내 생각에는 시험에서 실력을 숨겼던 것 같아. 그 아이가 이번에…….’

“설마…….”

아차, 싶긴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기를 시작하기 직전인 이 시점에서 고진명이 하는 제안은 치명적이다.

지금 이 순간에 결정권을 가진 것은 철웅 선배.

그리고 철웅은, 이런 일을 거절하기엔……, 호승심이 너무 강했다.

“좋아. 해 보자고! 우리 서인이가 너희 꼴찌를 박살낼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철웅은 두말없이 승낙해 버렸다.

***

“미안하다.”

철웅은 솔직하게 사과했다. 소매가 뜯어진 어깨 부근에서 철웅의 팔 근육이 미안하다는 듯이 꿈틀거렸다.

“갑자기 서인이한테 부담을 주게 되어 버렸네. 하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어. 난 우리 백호방 후배들은 주작방 놈들 중에 어떤 놈이 나오든 이길 수 있을 거라 믿고 있거든. 그때 거기서 거절하면 저 퉁퉁한 고진명이 무슨 말로 약을 올릴지 뻔하니까.”

철웅은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졌는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래. 그 꼴을 볼 수는 없지……. 그러니까 서인이가 우리를 대신해서 이기고 올 거라 믿어 보자. 저깟 놈들. 백호방이 숫자는 적어도 일당백이라는 걸 알려 주자고. 그러니까 서인이 너는 평소대로만 하면 돼! 응? 그런데 너희들은 왜 그런 표정이냐?”

철웅은 주변에 모여 있던 백호방 신입생 아이들의 표정이 오묘하게 굳어져 있는 것을 알아채고는 되물었다.

“그게, 철웅 선배. 사실 대결 상대로 서인이가 지목될 거라고 미리 말한 아이가 있었거든요.”

대답해 준 건 뻐드렁니의 소년 윤지관이었다.

“그래? 누구였는데?”

“섭주해였어요.”

“그래? 주해가?”

철웅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역시 머리 쓰는 애들은 다르다니까. 작년에 들쥐 선배님도 그러더니. 너도 주작방 놈들 머릿속 따위는 금방 꿰뚫어 보는구만! 그래서? 주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우리가 이번 내기에서 이길 수 있겠어?”

모두의 시선이 섭주해에게로 모였다. 마른 체형에 낯빛이 창백한 소년은 아직 나이만 어릴 뿐 영락없이 낙향한 유생 같은 풍모였다. 선이 가는 외모와 청정한 분위기가 더해지니 더욱 그렇다.

섭주해는 그다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나긋나긋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선선히 웃기까지 했다.

“당연히 이길 겁니다.”

“그래? 어째서?”

“소호 형이 말하길, 같이 수련하면서 보니 최근에 상전벽해(桑田碧海) 같은 변화가 있었다고 장담했으니까요.”

“서인이가 그 정도로 크게 달라졌다고? 정말이냐., 소호야?”

소호는 환하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척하니 치켜세웠다.

“네! 완전 달라졌다고요!”

“그렇단 말이지!”

소호는 한술 더 떠 칭찬을 하기까지 했다.

“선배도 직접 보면 깜짝 놀랄 걸요? 지금 서인이는 엄청나다고요!”

“오오! 그 정도란 말이지!”

백호방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자그마하게나마 남아 있던 긴장감마저 날아가 버린 듯 보였다.

“무, 무, 무슨 소리야…….”

조서인의 자그마한 항변 따위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가 이미 축제의 분위기였다.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내기에서 진 주작방을 어떻게 놀려 줄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인상을 쓰고 못 미더운 얼굴인 건 평소에 서로 사이가 안 좋았던 은위군 뿐이었다.

“잠깐만,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이야……?”

기껏 문주희가 날려 보낸 긴장감이 저승에서 손짓하며 되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조서인이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서 난감해하는 사이, 주작방 쪽에서 북소리가 짧게 반복되기 시작했다.

조서인은 화들짝 놀랐다.

때가 되었다.

내기가 시작된 것이다.

***

“어……, 그러니까…….”

내기가 시작되기 전, 철웅에게 일수일퇴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한 사람이 무공 초식을 사용해 공격하면 한 사람은 방어하고, 이때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서면 그건 한 판을 진 것으로 간주한다. 총 합쳐서 세 판을 져서 뒤로 물러서면 그걸로 패배. 내기는 끝.

일수(一手)는 한 호흡이 끝날 때까지의 초식이며,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막아 내면 승부는 무승부, 공방(攻防)의 순서만 바뀐다.

규칙은 꽤나 간단한 편이었다.

다만, 내기 상대를 마주하게 된 조서인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규칙을 못 들을 뻔했지만 말이다.

“누가 봐도 개잖아…….”

상대방은 멀끔해 보이는 얼굴의 소년. 머리카락은 정리되지 않았고, 허리띠는 매듭 없이 대충 묶여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소년이 들고 있는 단단해 보이는 몽둥이였다.

소년이 들고 있는 몽둥이의 끝은, 개의 머리 모양으로 깎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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