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88화 (217/686)

4권 13화

제15장 노력의 재능(才能)(8)

그 몽둥이를 보자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얘구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개를 조심하라던 문주희의 의미심장한 조언은 눈앞의 소년을 가리키는 게 분명했다. 그 ‘위충현’과 동수를 이루었다는 소년. 입관 시험 때 실력을 감춘 주작방 비장의 한 수.

그렇게 의심하며 보니 헝클어진 더벅머리와 대충 풀어헤친 옷차림도 뭔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멍한 얼굴마저도 세상을 통달한 도인의 그것처럼 보였다.

‘얘가 걔라면, 나는 주작방 최고 고수에게 도전을 하는 거겠지?’

상황을 인식하니 긴장해서 점점 호흡이 가빠지고 손발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지면 안 된다.

질 수 없다.

이 내기에는 각반이 걸려 있다.

조서인은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되뇌며 애써 힘을 냈다. 옆에서 언쟁을 벌이는 철웅과 고진명이 그런 조서인이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야야야! 지금 뭐하는 짓이야!”

“뭐? 뭐가 불만이야?”

“그 희한한 몽둥이는 뭐야! 대련용 무기만 쓰는 거 아니었어?”

“뭐, 어때. 재질은 똑같이 나무고. 기껏해야 나무 몽둥이를 개머리 모양으로 깎아 놓은 것뿐인데.”

“허어?”

“백호방 놈들아. 작은 일에 호들갑 떨지 말라고. 이름이 아깝지 않냐?”

고진명은 어깨를 으쓱하며 능글맞게 받아쳤다. 그게 철웅의 화를 돋웠다.

“헛소리 마. 그럼 이쪽도 무기를 맘대로 가져와도 되는 거냐? 앙? 왜? 암기도 쓰라고 하지? 그럼 대련용 무기는 왜 따로 만들어 놨겠냔 말이야!”

“철로 된 것만 아니면 상관없잖아. 왜? 몽둥이가 개 모양이면 싸우기가 무서운가 보지? 백호방은 개를 무서워하냐?”

고진명의 발언은 얼토당토않은 헛소리였으나, 같은 주작방 놈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반응해 주니 상대방을 화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와하하! 그런가 보다!”

“백호방은 개를 무서워하는구나!”

“백견방으로 이름을 바꿔라!”

철웅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사실 지금 이곳에서 집요하게 따지기엔 불리한 면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젠장, 서인이 네가 결정해. 저 이상한 개 몽둥이랑 싸워도 불만 없냐?”

“예? 제, 제가 결정해요?”

“그래. 대련하는 건 너니까. 네가 정해야지.”

철웅은 잔뜩 화를 억누르고 말하고 있었다.

조서인은 심장이 벌렁거리면서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왜 그런 걸 나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선배!’

얼마나 놀랐는지 뒷목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마음을 가다듬고 찬찬히 살펴보니 역시나 몽둥이는 특이한 모습이었다.

개의 머리 모양은 꽤나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고, 뭉툭하면서도 단단하게 표현된 개의 송곳니와 으르렁대는 듯 살짝 벌려진 입모양에는 손가락 두 개 정도의 홈이 파여 있었다.

‘저걸로 무기를 잡아채는 걸까? 조공(爪功)처럼 할퀸다든가? 으음, 그렇다고 바꿔 달라고 하기엔 너무 소심해 보이고, 대충 하자니 이번 내기는 중요해서……. 아아!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어!’

조서인은 뒤쪽을 힐끔 쳐다봤다.

자신에게는 이럴 때 의지할 만한 친구가 있지 않은가.

“응?”

조서인과 소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소호가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보였다.

‘답을 줘!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조서인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눈빛으로 말해보려 했다.

기대와 설렘으로 기다리길 잠시. 언제나 그렇듯, 조서인의 특별한 친구는 평범한 소년의 불안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서인아! 네 실력을 보여 줘!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돼!”

소호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손을 힘차게 흔드니 주변에 있던 다른 백호방 아이들도 따라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까르르 웃음소리도 들렸다. 마치 축제를 구경하러 온 어린아이들 같았다.

항상 겉도는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가 밝은 얼굴로 응원해 주었다.

평소라면 그 활발함이 좋았을 것이다.

평소라면.

“하아…….”

조서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인상을 찌푸린 은위군이 반가울 줄이야.

사람 일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조서인은 다른 방식으로 한 번 생각해보았다.

소호라면?

자신이 천하제일의 재능을 지닌 소년이라면 이번 일을 어떻게 대처해 나갔을까?

“하긴, 고민할 거리도 없지. 네가 뭘 걱정하겠냐……. 몽둥이가 개 모양이든 아니든.”

소호의 해맑은 웃음은 신기하게도, 조서인에게 근거 없는 용기를 주었다.

“그냥 할게요. 저 친구가 저걸로 싸워도 괜찮아요, 선배님.”

“그래? 그럼 너는? 평범한 대련용 무기를 고를 거냐?”

“네. 저걸로 좋아요.”

조서인은 옆에 장식되어 있는 십팔반병기들 중에, 창날이 앞으로만 뻗어 있는 외날의 나무창을 골라 집어 들었다.

백일도(百日刀) 천일창(千日槍) 만일검(萬日劍)이라.

도는 백 일을 수련해야 하고, 창은 천 일을 수련해야 하며, 검은 만 일을 수련해야 한다.

“후우.”

숨을 크게 내쉬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는다.

단전에서 뜨거운 기가 흘러나오니 온몸이 두근두근 약동했다.

조서인은 그제야 눈앞의 대련 상대를 제대로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상대는 또래의 소년이다.

헐렁한 흰색 무복을 대충 걸쳤고, 멍한 얼굴, 그다지 또렷하지 않은 눈빛으로 조서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조서인이 창을 잡고 자세를 잡자, 소년이 눈에 이채를 띄며 고개를 갸웃했다.

“난 조서인이라고 해. 너는?”

“흐음.”

조서인은 소년이 말없이 계속 쳐다보기만 하자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신기하네.”

“응?”

“난 명로야. 주작방의 명로.”

명로는 그걸로 대화는 끝이라는 듯이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서더니, 절도 있는 동작으로 기수식을 취했다.

“……!”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중단에 놓인 몽둥이 하나가 그 몽둥이를 들고 있는 소년의 전신을 보이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시선 바로 아래의 턱 끝부터 신체 중앙의 모든 급소들을 몽둥이로 가리는 정확하고 안정된 자세였다.

“너……!”

조서인은 그 순간 상대가 범상치 않음을 새삼 깨달았다.

‘이 아이는……!’

개 모양의 몽둥이에서 이미 눈치채고 있긴 했지만, 이 아이가 바로 문주희가 말했던 그 숨겨진 기재가 분명하리라. 이제는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시작부터 신경전이 대단하구만. 지금부터 일수일퇴를 시작한다! 순서는 이 동전이 떨어지는 순서로 정할 거다. 명로가 글자가 적힌 앞면, 조서인은 그림이 있는 뒷면이다. 알겠지? 자, 이 동전이 떨어지면 바로 시작하는 거다.”

고진명이 손가락으로 튕겨 올린 동전은 바닥에 두 번을 튕긴 뒤, 지독히도 길게 느껴지는 시간 동안 굴러가 마침내 철웅의 발 앞에서 멈췄다.

보이는 것은 동전에 적혀 있는 글씨.

“앞……!”

조서인과 명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명로가 선(先).

그걸 깨닫는 것과 동시에, 어느새 명로의 개 머리 모양의 나무 몽둥이가 조서인의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쉬이이익―!

‘이렇게 빠를 수가!’라는 마음 속 외침을 뒤로 하고, 황급히 왼발을 뒤로 쭉 빼면서 몸을 비틀었다.

일수일퇴의 규칙은 양발이 다 뒤로 빠지면 지는 거였다. 창을 잡고 있던 왼손으로 몽둥이를 올려치니 따다당―, 세 번의 충격이 창대를 흔들었다.

“흡……!”

조서인은 신음을 흘릴 틈도 없었다.

한 번의 타격에 세 번이나 충격이 온 건 몽둥이의 몸통 부분, 개머리의 아랫니, 윗니가 순서대로 창을 긁었기 때문이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조서인의 창대는 개에게 물려있었다. 명로의 눈빛이 번뜩인다.

‘물려도 단단히 물렸어……!’

개의 뭉툭하고 단단한 송곳니가 조서인의 창대를 갉아 내며 부러뜨리려 하고 있었다. 조서인은 이를 악물었다. 몽둥이는 짧지만 창대보다 두껍고 묵직했다. 심지어 명로는 근접전에서 힘 조절이 능숙했다. 밀면 밀리고, 당기면 다가왔다. 피부에 붙은 거머리처럼 몽둥이가 창대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그렇다고 힘으로 비틀어서 빼려하면 창대가 부러질 건 자명했다.

“차핫!”

조서인은 거기서 임기응변을 사용했다. 오른발로 창의 손잡이 부분을 걷어차 버린 것이다.

망치가 정을 치듯 화살처럼 튕겨 나간 창이 몽둥이에게서 벗어나고, 조서인은 왼손 하나만으로 창을 붙잡아 머리 위에서 한 바퀴 회전시켰다.

겨우 빠져나왔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일수일퇴는 한 호흡 동안 전개하는 초식이 끝날 때까지.

명로의 공격은 파도처럼, 아니, 개 떼처럼 몰려들어 조서인을 물어뜯으려했다.

“윽.”

물어뜯으려는 자와, 피하려는 자.

여덟 번의 짧은 부딪침 끝에 다시 한 번 창대가 개에게 물렸다. 조서인이 창을 걷어차려는 찰나, 명로가 이번엔 신묘한 보법으로 조서인의 발등을 콱― 하고 눌러 밟았다.

두 번은 안 당한다는 걸까.

벗어나려 했으나, 명로의 발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한 호흡의 공격이 이렇게나 길게 느껴질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

눈빛과 눈빛이 부딪쳤다.

명로의 얼굴에서 더 이상 느긋하고 멍한 기색은 사라져 있었다.

재기 넘치는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여기까지야.

포기해.

“큭.”

조서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힘으로라도 빠져나오려는 순간, 명로가 양손으로 붙잡고 있던 몽둥이에서 한 손을 놓더니,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자신의 몽둥이를 스스로 후려쳤다.

까드득―!

“헉!”

조서인은 표정이 일그러졌다. 창대가 비명을 지르듯이 출렁거렸다. 재빨리 다시 창대를 잡은 두 손에 힘을 줬지만 명로는 작은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몽둥이가 아래쪽으로 당겨졌다가 앞으로 확 다가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조서인은 어느새 오른발도 뒤로 빼고 말았다.

“거기까지! 일퇴!”

고진명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손을 들며 명로의 첫 승을 선언했다.

명로는 그제야 한 초식이 끝나 숨을 가늘게 몰아쉬었다.

주변 곳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조서인은 이를 악물었다.

한 판을 지고 만 것이다.

***

“이런 젠장! 천하의 조씨 가문 출신이!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에잉, 못난 놈 같으니!”

앳된 얼굴의 관객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중년의 사내가 한 명 있었다. 후줄근한 외모에 주독이 올라 새빨간 코. 평범한 듯 작은 키에 혼탁한 눈빛을 지녔다.

그 사내는 끊임없이 불만을 토해 냈다. 조서인과 명로의 수준 높은 공방이 끝나고, 학생들이 박수를 치는 와중에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런 그를 말린 것은 한 사람의 손길이었다.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짤랑거리는 돈 소리. 그와 함께 다가온 서생 같은 외모의 소년이 사내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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