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89화 (218/686)

4권 14화

제15장 노력의 재능(才能)(9)

“서인이 아버님이시지요?”

사내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소년을 위아래로 훑는 모습에서 경계심이 느껴졌다.

“누구……?”

“저는 섭주해라고 합니다. 서인이랑 같은 기숙사의 친구예요.”

“아아. 그래?”

“아버님 성함이 조봉명이시지요?”

“맞는데. 이름은 어떻게 안 거야? 서인이가 말했나?”

“아니요. 주변에 아는 분들이 좀 있어서요. 그분들께 여쭤봐서 알게 되었습니다.”

섭주해는 친절한 목소리로 답하며 예의를 잃지 않았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의 아버님이시다.

지금부터 할 말들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킬 생각이었다.

최소한은.

“너 같은 서생 집안 아이는 본 적이 없는데…….”

“모르시는 게 당연해요. 서인이랑은 학관에서 처음 봤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날 안다는 거야?”

“말씀드렸듯이, 주변에 ‘뭐든지’ 알아봐 주는 분들이 좀 계셔서 그분들께 물어보았습니다. 그 덕에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지요.”

섭주해는 평소보다 더욱 예의를 차린 고상한 말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세도가의 도련님 같기도 하고, 콧대 높은 문벌 귀족 같기도 했다.

“뭐든지 알아봐 준다고……?”

조봉명은 그 말에 경계심이 더욱 생긴 것 같았으나 그렇다고 자리를 피하지는 않았다.

“그럼 서찰로 날 부른 게 너였냐?”

“예. 제가 서찰을 보냈습니다.”

“서찰에선 중요한 일이라고…… 커험! 여기에 오면 뭔가를 준다고 하던데.”

“이것 말씀이지요?”

섭주해는 넓은 소맷자락 안에서 손바닥만 한 전낭을 꺼내 들었다. 주변을 살피니 다들 일수일퇴를 보느라 열중하여 그들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대방이 볼 수 있도록 전낭의 입구를 살짝 열고 은자가 반짝이는 모습을 보여 주니 그 순간 조봉명의 눈빛이 변했다.

“그건……!”

“은자. 열 냥입니다.”

“은자 열 냥……!”

전낭에 들어 있는 건 은자로 열 냥. 서민 한 가정이 열 달은 쌀 걱정할 필요 없는 금액을 보니 조봉명이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별로 부자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돈이 많구나. 집안이 잘 사나 보지?”

“못 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흥.”

조봉명은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젓더니, 불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섭주해를 바라보았다.

섭주해는 그런 조봉명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 냈다. 조봉명이 자격지심이 큰 사람이란 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특별할 것이 없으니 놀랄 이유도 없었다.

“커험! 그럼 그건 나한테…….”

섭주해는 조봉명이 뻗는 손을 피해 전낭을 다시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어허! 꼬마야. 어른을 놀리는 거 아니다. 날 불렀으면 약속을 지켜야지.”

“네. 약속은 지킬 거예요. 하지만 그 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야기를 하자고?”

“네. 잠깐이면 됩니다.”

조봉명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낭의 힘은 위대했다.

섭주해는 구경꾼 무리로부터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으로 조봉명을 데리고 나왔다.

“예로부터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 하여 임금과 신하, 부부,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마땅히 서로 지켜야 할 도(道)가 있으며 이를 지키지 않으면 강상죄를 물었습니다. 기록을 보면 보통 부모들은 자식을 무조건적으로 아끼고 사랑하지만…… 반대로 자식은 그 도리를 다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식이 벌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지요?”

진부한 이야기지만 섭주해는 꼭 한번 조봉명에게 따끔한 한마디를 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소호에게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으니까.

이 세상에 자식의 것을 빼앗는 부모가 있다는 건 충격이었으니 말이다.

“작은 마을에서 살 때는 몰랐는데…… 세상에는 상식과 다른 일들도 많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예의라는 것은 쌍방이어야만 합니다. 부모가 사랑을 주지 않는다면, 자식이 끝까지 효를 다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섭주해의 진중하고 고고한 말투가 조봉명을 자극한듯했다.

조봉명은 이상한 놈을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주독으로 새빨개진 코가 불쾌하게 씰룩거렸다.

섭주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저도 이러고 싶지 않아요. 기회를 줄 필요도 없는데. ……형이 부탁해서 하는 거지.”

“뭐라고? 중얼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꼬마야.”

“그래요? 잘 안 들리셨군요?”

“그래. 사내놈은 사내답게 큰 소리로 말해.”

“예에. 맞는 말씀이군요. 사내는 사내다워야죠. 그리고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부모는 부모다워야 합니다. 부모가 부모답지 못하면 그 어떤 자식이 부모에게 효를 다하겠습니까?”

조봉명은 눈을 끔뻑거리다가 버럭 소리쳤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부모답지 못하다는 거냐?”

“저기 보이시지요?”

“보이다니. 뭐가?”

“서인이는 지금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기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수련해서 어떻게든 이기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서서 사람들한테 주목받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친구인데도 말입니다. 아버님은 서인이가 저 내기를 왜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학관 안에서 잘 교육받다가 심심해서 내기나 하는 거겠지! 젠장, 고마움도 모르는 놈들 같으니. 다들 제 잘난 줄 알고 살고 있겠지.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 운이 좋았다고는 생각 못하고 말이야. 거기에 조서인, 저 모자란 놈은 광대처럼 놀아나고 있을 거고!”

조봉명은 혼자 흥분해서 숨을 씨근거렸다.

“서인이가 모자라다고 생각하십니까?”

“모자라지. 저 아둔한 녀석이 뭘 할 줄 안다고.”

“서인이가 저 자리에 있는 것은, 원래 학관에서 교재나 재료 사라고 준 돈을 ‘어딘가’에 뺏겼고, 그 뺐긴 돈 때문에 수업에 필요한 각반을 살 여유가 없어져서 억지로 내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아둔해서가 아니에요. 어떻게든 돈을 안 쓰고도 각반을 얻으려고 저렇게 이를 악물고 대련하고 있습니다. 심심풀이로 하는 게 아닙니다.”

“……?”

“그걸 왜 나한테 말하냐는 표정이시네요. 잘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럼 이렇게 말씀드릴게요. 돈이 필요하시죠?”

조봉명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자존심 때문에 잠시 눈을 데굴데굴 굴렸지만, 이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커험! 뭐, 그래. 그러니까 여기까지 왔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아까 보신 전낭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하나가 더 있습니다.”

섭주해는 소맷자락에서 똑같은 크기의 전낭을 하나 더 꺼내 들었다. 살짝 입구를 열어서 보여 주니, 아까처럼 은빛 광채가 살짝 보이다가 사라졌다. 조봉명이 다시 한 번 눈을 부릅뜨는 모습이 보였다.

왜 아닐까.

돈이 그렇게나 급한 사람 눈앞에 큰돈이 든 전낭이 하나에서 두 개가 되었는데.

“……!”

조봉명은 황급히 표정을 관리하려 했으나 동요한 모습이 역력했다.

섭주해는 기세를 타고 몰아쳤다.

“제가 바라는 건 간단한 일입니다. ……서인이를 칭찬해 주세요.”

“뭐?”

섭주해의 요구가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조봉명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멍하니 굳어 있었다.

“서인이를 칭찬하고, 잘못을 사과하고, 그게 무엇이든 다정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주시면 됩니다. 추가로, 앞으로는 서인이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 주십시오. 그걸 약속해 주신다면…….”

섭주해는 담담한 얼굴로 전낭 두 개를 들어 올렸다.

“이 전낭들을 드리겠습니다.”

“으음…….”

“어떤가요. 약속하시겠습니까?”

어린아이와 어른.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대화였으나, 압도당하는 건 어른 쪽이었다.

“아버님?”

섭주해가 다그치듯 조봉명을 살펴보니, 그는 처음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진지한 얼굴로 묵묵히 서 있으니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그는 그러다 도저히 납득이 안 됐는지 머뭇거리며 몇 번이나 입을 달싹거렸다.

“하나만 묻자. 너는 왜, 서인이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제가 따르는 형이 그걸 원하니까요.”

“형……?”

“대단한 형이에요. 그 형이 서인이를 아낍니다. 물론, 저도 서인이가 자신감을 찾고 행복하길 바라고요.”

섭주해는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다.

솔직함은 그 어떤 말보다 강력한 무기였다.

“그러니까 아들놈한테 사과하고 칭찬을 하면 그 전낭을 주겠다? 두 개 다?”

“예. 두 개 다 드립니다.”

“알겠다.”

조봉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일퇴!”

심판을 보는 고진명이 또 한 번의 패배를 선언했다. 번쩍 든 손, 승패를 선언한 퉁퉁한 소년의 얼굴에선 의기양양한 빛이 가득했다.

주작방이 또 한 번 승리에 다가간 것이다.

“크윽……!”

“하아, 하아, 하아…….”

조서인의 분한 신음 소리와 명로의 거친 숨소리가 번갈아 흘러나왔다.

조서인은 뒤로 한 걸음을 더 물러섰고, 명로는 한 걸음을 앞으로 전진했다. 총 세 번을 물러서면 승패가 갈리는 경기이니, 조서인에게는 이제 말 그대로 ‘물러설 곳'이 없는 상황이었다.

조서인은 분해서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반짝이는 두 눈은 끊임없이 해답을 찾아 헤맸다. 반대쪽에 시뻘건 얼굴로 숨을 가다듬는 명로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오오오!”

주변에서 구경하던 학생들은 환호하고 자신들끼리의 감상을 공유했다.

“이거 꼴찌들의 대결 맞아? 생각보다 박진감이 넘치는데?”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쟤네는 둘 다 꼴찌 할 실력들이 아냐. 방금 봤지? 명로는 한 호흡에 스무 번이 넘게 공격했다고, 또 그걸 거의 다 막아 낸 쟤는 또 뭐야!”

“젠장, 재밌네. 아슬아슬해. 솔직히 금방 승부가 날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이제 하나 남은 건가?”

“어떻게 되려나? 바로 끝나려나?”

구경하는 학생들의 수군거림이 백호방 아이들의 귀에도 들어왔다. 처음에는 들떠 있던 백호방 소년, 소녀들의 얼굴은 살짝 굳어 있었다.

“이게 참…….”

“뭐라고 해야 할지…….”

“그, 그치만 서인이도 대단해! 엄청 잘하잖아. 그치?”

“확실히 엄청 달라진 것 같긴 한데.”

대미미의 말에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으나 다들 표정이 풀리지는 않았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근데 상대가 너무 강한 것 같아. 뭐야, 쟤는. 저런 애가 주작방에 있었어?”

그들은 가장 앞에 서 있는 철웅과 옆에 있는 소호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힐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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