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90화 (219/686)

4권 15화

제15장 노력의 재능(才能)(10)

철웅은 심각한 얼굴로 묵묵히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는데 옆에선 소호가 그런 철웅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하핫.”

소호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철웅이라는 근육질의 소년은 승부욕이 발동될 때 어깨의 승모근이 꿈틀거리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지금, 그 승모근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실력이 엄청나게 늘었네. 어떻게 저렇게 늘었지?”

“서인이가 많이 노력했어요.”

“그래. 그건 한눈에 알겠어. 근데 무공 실력이란 건 노력만으로 느는 게 아니잖아?”

소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설지 선배랑 저도 노력하긴 했어요.”

“그 부분을 듣고 싶은데, 자세히.”

“하하, 높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그건 철웅 선배한테는 도움이 안 돼요. 선배님은 이미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소호와 철웅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해맑은 웃음은 여전하지만, 또한 진지한 눈빛으로 철웅을 마주 보았다.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요. 옳은 길을 가는 분한테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없어요.”

소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장난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진지한 소년.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가는 것이 소호의 매력이었다.

철웅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말은 안 하지만 소호와 백설지가 어떻게 가르쳤는지 몹시 궁금한 기색이었다.

“도움이 안 되어도 좋으니 간단히만 말해 줘 봐. 서인이가 어떻게 짧은 시간 만에 저렇게 일취월장한 거야?”

“으음, 그렇게나 궁금하세요?”

“당연하지. 모르는 사람이 지금 서인이를 보면 불과 얼마 전의 백호방 꼴찌랑 같은 사람인 줄 모를 거야. 그러니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겠냐.”

“하핫, 그게 딱히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닌데…….”

소호는 시선을 잠시 옆으로 돌려보았다.

새하얀 피부에 금발을 지닌 소녀, 백설지가 무표정한 얼굴로 조서인과 명로의 대결을 보고 있었다. 소호와 철웅의 대화가 들릴 게 분명한데도 이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소호는 거기서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내기에서 진 게 그렇게나 싫었던 걸까?’

그때 이후로 뭔가 자존심이 상했는지 뾰로통한 기색이었다. 이유를 모르겠으니 소호로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저는 무공에 조언을 해 주었고, 설지 선배는 내공을 다듬어 주었어요. 아마 그게 컸을 거예요. 설지 선배가 조언을 아끼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그것뿐이에요. 나머지는 서인이가 노력한 거죠.”

“흐음.”

소호는 철웅이 자랑스러운 듯, 뿌듯하게 씩 웃는 모습을 보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철웅은 본인부터 노력파니까. 비슷한 성향인 조서인과 사이가 나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중에 같이 수련이라도 해 볼까…….”

소호는 철웅이 중얼거린,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듣고 식은땀이 나는 걸 느꼈다.

‘서인이가 철웅 선배처럼 수련 변태가 되면 안 될 텐데.’

철웅처럼 소매가 뜯겨 나간 무복을 입고, 수련용 갑옷을 덕지덕지 매달고 있는 조서인이라니.

그게 가능한 일인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럼 문제는 저놈이었군. 그래, 저 미친 듯이 잘 싸우는 개 몽둥이 녀석이 어떤 놈인가 궁금해. 기껏 우리 서인이가 실력을 올렸더니, 하필 어디서 저런 놈이 튀어나온 거야! 저 실력으로 주작방 꼴찌라는 게 말이 돼?”

철웅이 씩씩거리며 허공에 주먹질을 했다.

개 몽둥이라니.

개성 강한 작명에 근처에 있던 학생들 몇 명이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저 개 몽둥이가 주작방 놈들이 숨기고 있던 비장의 한 수가 분명하다고. 젠장, 고진명 저 교활한 녀석이 조건을 내걸었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철웅은 잔뜩 분노한 채 소호에게 말했다.

“서인이한테 조언하고 싶은 게 있어? 하고 싶으면 지금뿐이야. 이제 한 발만 더 물러나면 지는 거야.”

“저는 딱히 없어요. 서인이는 잘하고 있는 걸요?”

“흐음?”

소호는 고개를 저었다. 주변의 시선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철웅은 흥미가 생긴듯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옆에 있던 백설지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인이는 배우는 게 빠른 편은 아니에요. 하지만 한번 눈에 익힌 건 절대로 잊지 않아요. 그리고 육체를 혹사시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과하게 단련되어 있죠. 자기의 재능을 본인만 모르고 있어요.”

“호오, 그래?”

“네. 두고 보세요.”

소호는 허리에 한 손을 얹고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

“나는 재능이 있다. 나는 재능이 있다. 나는 재능이 있다.”

조서인은 마치 불교경전을 읊듯, 소호가 해 준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재능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잡념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심장은 두근거리고 온몸이 떨리는데 머릿속만큼은 명경지수처럼 차가웠다.

반대쪽에 있는 명로라는 소년이 쉬는 숨소리, 손끝의 움직임, 발끝이 향하는 방향까지 모든 게 눈에 들어온다.

결전의 순간이다.

심판을 맡은 고진명이 손바닥을 허공으로 세우고 있었다.

“어……?”

코에서 주르륵, 하고 뭔가가 흘러내려 소매로 닦아 보니 찐득한 핏물이 묻어 나왔다.

조서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또 코피라니.

당황스럽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웠다.

자신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몸도, 마음도, 그리고 정신도 말이다.

“시작!”

고진명의 선언과 함께 명로의 공격이 다시 한 번 시작되었다.

명로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살짝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가 눈앞에서 튀어나왔다. 앞서 두 경기에서와 같다. 조서인은 당황하지 않고 창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개 머리 모양의 몽둥이가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정면은 미끼. 양옆에서 치겠지?’

조서인은 창을 세로로 세워 좌우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깔끔하게 쳐 냈다. 간격은 단숨에 좁혀졌다. 날아오는 몽둥이를 창대로 빗나가게 한다. 깡! 하고 몽둥이와 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거기서 명로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거의 품에 뛰어드는 수준이었다. 그가 들어오자 이제 조서인은 막는 것에만 집중하여 명로의 모든 공격을 창대 끝으로 쳐 냈다.

“이야앗!”

함성을 내지르며 정신없이 날아오는 공격들을 쳐 냈다. 명로의 몽둥이 실력은 놀라웠다. 사나운 개처럼 집요하게 창대를 물어뜯으려 들었다. 하지만 조서인도 지난 두 번의 경기 동안 명로의 움직임을 지켜본 소년이었다.

조서인이 보기에 두 사람 사이에 반사 신경의 차이는 없었다. 신법은 상대방이 좀 뛰어났다. 그 밖의 무공에 대한 이해도 비슷했다.

붙잡으려 하면 쳐 내고, 타격하려 하면 빗겨 냈다.

순식간에 십여 합이 교차했다

“……!”

명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일수일퇴는 한 번의 호흡이 끝날 때까지 공격하는 게 규칙이었다.

처음과 비슷한 발 공격을 피해 내자 명로는 뭔가 분한 표정을 짓더니 한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근처의 관객들에게까지 들릴 정도였다. 느긋했던 얼굴은 이제 분노와 초조함이 가득했다.

“쳇!”

심판을 보던 고진명이 혀를 찬 뒤에 소리쳤다.

“일수! 백호방!”

환호성은 한 박자가 늦게 터져 나왔다.

“오오오!”

“이거 점점 재밌어지는데!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 냈어!”

“이제 저쪽이 공격인가? 궁금하다. 어떻게 막아 내려나?”

조서인은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느라 다른 건 들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나는 재능이 있다……! 재능이 있다……!”

신앙처럼 외우는 것은 소호가 해 주었던 말이다.

조서인은 얼마 전에 수련하면서 느꼈던 감각들을 떠올렸다.

지금껏 앞을 막아 오던 내공의 굴레를 벗어났을 때 어떤 기분을 느꼈던가.

그 비할 바 없는 자유.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새장에서 벗어난 새와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았던가.

숨을 길게 내쉬고 완전히 폐부를 비운 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상대방은 완연한 방어 태세였다.

저걸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안 된다. 방법을 고민하다 보니 한 가지가 떠올랐다.

기원.

내 무공의 기원은 무엇인가.

“상산……!”

조서인은 대결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웃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입술이 덜덜 떨릴 만큼 긴장되는데, 또 한편으론 짜릿하게 즐겁다.

고진명이 손바닥을 들어 올리는 걸 신호 삼아 조서인은 앞으로 뛰쳐나갔다.

오른발로 땅을 박차고 왼발을 한껏 앞으로 내딛는다.

쾅, 하고 내딛는 진각.

등골이 찌릿할 만큼 강력한 반발력이 허리를 통과해 창을 든 오른팔로 이어졌다.

쒸이이이익―.

목창이 화살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조서인은 마치 돌멩이를 던지듯 팔을 앞으로 뿌렸다.

바람이 갈라졌다.

조서인과 명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명로는 눈을 부릅뜨고 황급히 몽둥이를 움직여 창을 막으려 했다. 아슬아슬하게 겹치는 투로.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창이 옆으로 튕겨졌다. 창을 잡고 있던 오른팔이 옆으로 벌려진다.

시간이 느려진 듯, 명로의 표정이 점점 안도의 빛을 띄어 가는 게 선명히 보였다.

평소였다면 튕겨 나온 창을 수습해서 다시 갈무리하고, 기수식으로 돌아온 뒤 중단에서 다시 공격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달라.’

수련을 하던 도중, 백설지가 해 준 말을 떠올렸다.

‘너는 온몸의 혈도 하나하나가 작은 단전이 됐어. 매일 단전을 만들고 그걸 포기하고, 다음 날 다시 만드는 생활을 해서 그래. 미친 짓이지만…… 좋은 일일 수도 있고, 나쁜 일일 수도 있겠지. 나머지는 너의 몫이야.’

조서인의 눈이 빛났다.

느껴진다.

온몸 기경팔맥의 혈도들이 품고 있는 가능성.

오직 조서인만 가능한 무공의 실현 방식.

조서인은 팔꿈치, 곡지혈에 머물러 있던 내공을 폭발시켰다. 멀어져 있던 오른팔을 그대로 앞으로 다시 뻗는다.

“……!”

명로는 경악을 숨기지 못한 채 중단으로 갈무리하려던 몽둥이를 다급하게 다시 움직였다. 창이 이번에는 위로 튕겨졌다.

서인은 어깨 부근 거골혈의 내공을 폭발시켰다. 그대로 크게 회전하며 내리찍는 목창. 명로는 튕겨 내지 못하고 간신히 막기만 했다.

뒷팔의 비유혈. 전완근의 수삼리.

혈도가 두 번 폭발하며 조서인은 목창을 앞으로 내찔렀다.

명로가 눈을 부릅뜬다.

목창의 끝은 명로의 목젖 아래에 닿아 있다.

이 모든 일은 한 호흡 만에 벌어진 일.

“이, 일퇴!”

떨리는 고진명의 목소리가 조서인의 승리를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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