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91화 (220/686)

4권 16화

제15장 노력의 재능(才能)(11)

“이겼어.”

조서인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말로 내뱉고 나니 비로소 실감이 났다. 심판인 고진명과 주변의 관객들이 의외의 결과에 너무 놀라 충격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뿌듯해졌다. 붉으락푸르락하는 명로의 얼굴은 자신이 ‘승리자’의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팔은 좀 뻐근하지만…….’

오른팔이 얼얼하게 아픈 건 혈도에 머물러 있던 내공을 강제로 튕겨 냈기 때문이었다. 백설지는 그것을 탄금(彈琴)의 묘리(妙理)라고 하였다.

매일매일 단전을 하나 새로 만들고, 그걸 폐기시키는 기상천외한 수련법을 이어 온 조서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수법이라고 했다. 마치 가야금을 튕기듯이, 혈맥에 남아 있는 내공을 밖으로 터뜨리듯이 뿜어내니까 속도가 빠르고 위력이 높아지지만, 대신 혈맥에 찢어질 것처럼 무리가 가서 한 번 사용하면 그 부위를 쉬게 해 줘야만 했다.

‘이건 탄금공(彈琴功)이라고 부르자. 확실히 위력은 높지만 부담이 커. 오른팔을 조심해서 써야겠어.’

조서인은 밤을 새워서 수련하던 날 묘리를 완전히 터득했고, 이제는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회복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였더라, 하루였었지?’

혈도가 다시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와 내공이 모이려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긴 시간 손해를 보겠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제대로 사용해 본 탄금공은 그만한 가치를 보여 주었다.

‘상산. 조자룡.’

조서인은 조용히 자신의 기원을 떠올려 보았다.

피와 땀이 가득한 전장에서 폭풍처럼 말을 질주하는 호걸. 많은 수의 적들을 상대로 사용하는 조운의 창술은 얼마나 호쾌하고 질풍 같았을까. 조서인은 삼국시대에 수많은 적들을 헤치고 주군의 아이를 구해 왔던 조씨 가문의 위인을 자신의 모습에 대입시켜 보았다.

할 수 있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가능하다는 자신감이 온몸을 뜨겁게 달구었다.

“시작!”

고진명이 다시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경기의 재개를 알렸다.

조서인은 제자리에서 창을 한 바퀴 회전시킨 뒤, 한껏 힘이 붙은 원심력과 함께 앞으로 뛰쳐나갔다. 자세를 낮추고 허리를 회전시켰다. 번개 같은 찌르기는 잔뜩 굳은 표정의 명로에게 가로막혔다.

빠악!

“큭!”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창이 튕겨져 나왔다.

두께가 다른 탓일까. 분명히 같은 나무 재질의 무기인데 명로가 사용하는 몽둥이는 쇠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명로의 무공은 공격을 할 때나 수비를 할 때나 일관성 있게 비슷했다. 공격을 한 번 막아 내면 곧바로 개머리 모양의 몽둥이로 상대방의 무기에 달라붙으려 든다. 그러면 조서인은 창대가 붙잡히지 않기 위해 옆으로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조서인은 명로를 가운데 두고 재빨리 원을 그리듯이 이동하였다.

한 번이라도 물리면 큰일 나는 미친개와 싸우는 것 같았다.

‘거리를 살려야 해.’

신법을 잘 쓰는 명로에게 있어선 발을 안 움직이고 방어하기가 까다로울 터, 더욱이 이쪽은 창이라는 장병기를 써서 거리의 이점을 갖고 있지 않은가.

‘호표일섬.’

조서인은 자세를 낮췄다가 튕겨 올라오면서 앞발을 내리치는 호랑이처럼 창을 비스듬하게 휘둘렀다.

쒸이익―!

강렬한 바람 소리.

공기가 잘려 나가는 것과 동시에 명로의 앞머리가 바람에 흐트러졌다. 조서인은 곧바로 날아오는 반격을 창날이 아니라 손잡이 쪽으로 쳐 내면서 다시 뒤로 물러섰다.

‘여기서 탄금공.’

팔목 부근 극문혈에서 내공이 뿜어져 나왔다.

오른팔이 강하게 회전하면서 손가락 끝까지 힘이 이어졌다. 앞으로 쏘아진 목창은 명로의 하체를 향해 돌진했다.

탄금공의 진정한 위력이 빛을 발했다.

하나라면 막겠는데 그사이에 몇 번이나 공격이 날아와서는 방법이 없었다. 공격이 쏟아지자 명로의 방어가 한계를 맞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쯤 조서인의 얼굴도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본인의 호흡도 한계에 달해 있었다.

더 이상의 공격은 무리라고 생각했지만, 조서인의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끈질긴 인내심이 공격을 계속하게 만들었다.

노력이라는 분야에도 재능이 있다면 조서인은 노력의 천재임이 분명했다.

이를 악물고, 입술이 허옇게 된 상태에서 창을 회전해 아래로 내리찍었다.

파파팟!

손등 쪽에 이어지는 혈도 세 개에서 폭죽 같은 소음이 터져 나왔다.

천붕(天崩)의 일격.

명로의 몽둥이는 여전히 하체를 방어하고 있었다. 그걸 들어 올려서 막으려면 늦는다. 그건 해가 서쪽으로 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명로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왼쪽 손을 움찔거리다가 이내 체념한 듯 뒤로 물러섰다.

쾅, 하고 조서인의 목창이 아무도 없는 빈 땅을 내려쳤다.

“이, 이…… 일퇴!”

고진명은 옆에서 보기에 안타까울 만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조서인과 명로를 번갈아 응시했다.

“후우우…….”

조서인은 그제야 버티고 버티던 호흡을 몰아쉬며 안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폐부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꾸만 기침이 올라오려 하는 걸 꾹 눌러 참느라고 혼났다.

신기했다.

숨을 쉰다는 게 이렇게나 기분이 좋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겼어……!”

혼란한 상황에 주변의 관객들이 소리를 질렀다.

“우오오오! 세상에, 진짜잖아……!”

“저런 애가 꼴찌라고? 헛소리!”

“우리 기숙사 일 등도 저 정도 성적은 내기 힘들 것 같은데!”

“백호방 신입생들. 무시무시하군. 저 정도 수준이 꼴찌라니.”

잔뜩 흥분한 관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서인이 숨을 가다듬는 사이, 명로는 불쾌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성질이 잔뜩 났는지 몽둥이를 잡은 손이 피가 안 통할 만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조서인은 왜 명로가 화가 났는지 알고 있다.

아무리 탄금공이 뛰어나도 명로 역시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소년이었다. 아무리 공격속도가 빨라도 명로의 두 눈은 항상 조서인의 창끝을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생각을 거듭하자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었다.

명로는, 안 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저기…… 명로야.”

작게 불러 보았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공을 숨기고 있지?”

“……!”

조서인은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확신했다.

네 번에 걸쳐 서로 부딪치는 동안 석연치 않은 부분이 드문드문 있었다. 분명히 여기서 써야 할 무공이 있는데 쓰지 않고 참는 듯이.

아니, 쓰지 못하는 것처럼 머뭇거리다가 포기해 버렸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조서인만큼은 알아챘다. 서로를 노려보며 전력을 다해 무공을 부딪치는데 모를 수가 있겠는가.

명로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으나, 이미 분하게 생각하는 얼굴에서 그 답이 나온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뛰어난 상승 무공을 가졌으면서도 감추려는 걸까? 꺼내면 안 돼서? 사람들이 보니까?’

그쯤 되니 이유도 짐작이 되었다.

“조서인. 내가 잘못 보지 않았어. 너는 신기한 녀석이야.”

“나? 내가?”

명로는 그 이상 말하지 않고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이번 판에 승리하는 쪽이…… 내기에서 이기는 거다. 어이, 듣고 있어? 정신 차려야 한다고. 아마 이번이 마지막 대결이야. 이대로 져 버릴 거야?”

고진명도 궁지에 몰린 탓일까. 명로에게 대놓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옆에 있던 철웅이 버럭 소리쳤다.

“심판, 이 자식아. 잔소리하지 말고 대결이나 계속해!”

“젠장…… 시작!”

두 사람 모두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가운데, 마지막 대결이 시작되었다.

***

하늘은 왜 파란 것일까.

차가운 연무장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조서인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했다. 분명히 가만히 있는데도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숨을 너무 참았더니 폐부가 비명을 질러 댔다. 손을 올려 보려고 하니 오른팔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팔의 존재는 분명히 느껴지는데 희한하게도 얼얼한 감촉만 느껴질 뿐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건방진 오른팔이다.

‘하긴. 오른팔은 오늘 충분히 고생했어.’

충분하고도 남는다. 분명히 제 역할 이상의 일을 해냈다. 하긴 오른팔뿐이던가. 온몸의 모든 것들이 오늘은 과도하게 일했다. 휴식을 취할 자격이 있었다.

‘결국은 쓰지 않았지, 명로. 괜찮겠어?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

서로 전력을 다한 싸움이었으나, 명로는 결국 그 숨겨진 무공을 쓰지 않았다.

조서인은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을 다 쏟아붓고 나서의 기분 좋은 탈력감이 온몸에 넘쳐흘렀다.

주변이 시끌벅적했다.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 아깝다고 한숨을 내쉬는 사람들.

그리고 같은 기숙사의 동기들이 조서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조서인은 그들 중에 유일하게 그를 향해 다가오지 않는 한 명을 바라봤다.

햇살이 따뜻한 날에도 절대로 장갑을 벗지 않는 차가운 인상의 소년, 은위군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로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몸을 돌려서 걸어가 버렸다.

조서인은 그 뒷모습이 계속해서 눈에 남는 것 같았다.

“서인아! 잘했어!”

가장 처음으로 기뻐해 준 것은 역시나 소호였다.

그의 친구.

조가 창법을 바꿔 놓은 어린 천재 사부.

“사부.”

“어?”

“사부가 좋아서 그래. 소호랑 설지 선배님처럼 뛰어난 분들이 가르쳐 준 덕분이야.”

소호가 멍하니 있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사부란 말은 좀. 안 좋은 기억이 있어서……. 난 친구가 더 좋아. 서인이가 몰라서 그래. 사부가 많으면 다들 괴롭히기만 한다니까? 사부가 되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어. 그렇죠, 설지 선배?”

조서인은 백설지와 그런 백설지를 쳐다보면서 굳어 버린 소호를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부……. 좋은 울림이야. 마음에 드는 단어야. 좋아, 서인. 그렇게 부르는 걸 허락할게.”

“아니, 잠깐만. 설지 선배. 그건 좋아할 단어가 아니잖아요.”

“왜? 사부는 존경의 표시잖아. 소호와 서인이는 나에게 좀 더 존경을 표해야 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조서인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겼다.

조서인은 그 사실을 새삼 깨닫고 행복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밖에도 다른 아이들이 축하한다고, 대단했다면서 여러 가지 칭찬을 남기고 가 주었다. 특히 철웅이 꼬치꼬치 캐물어서 조금 귀찮았지만, 그래도 아는 선에서는 다 대답을 해 주었다.

“서인아, 그러고 보니 손님이 한 분 와 계셔. 잠깐 일어설 수 있지?”

“어? 손님?”

조서인은 소호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백호방 동기들의 뒤편에서 낯익은 한 사람이 우물쭈물하며 불편한 듯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호의 시선을 받은 탓일까. 그 사람이 조서인에게로 다가왔다.

“어……?”

주독으로 새빨개진 코를 보자 조서인은 심장이 멎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어째서, 여기에? 라는 생각만 들었다.

이 사람은 내가 행복한 꼴은 못 보는 걸까?

돈이 더 필요한 걸까?

또 버럭 소리치며 화를 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가운데, 조서인의 아버지, 조봉명이 시선을 옆으로 피하면서 말했다.

“수고했다. 제법 무공을 잘 쓰더구나.”

“예……?”

“기숙사 중에 꼴찌들의 대결이라고 들었다. 이 무슨 조씨 가문의 수치냐는 생각이 들긴 했다만…….”

“크흠! 흠흠!”

옆에서 소호가 헛기침을 하니, 조봉명이 움찔하면서 코끝을 긁적였다.

“어쨌든! 네가 나름 고생한다는 건 잘 알겠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열심히 해라.”

“아…… 네…….”

조서인이 얼떨떨하게 대답하자, 조봉명은 뭔가 품을 뒤적거리면서 우물쭈물하다가 눈을 질끈 감으면서 뭔가를 내밀었다.

“이건 뭐예요?”

“지난번에 ‘잠시 맡았던 거’다. 쓸데없는 데 낭비하지 말고, 꼭 공부하는 데 써라. 알았느냐?”

조봉명은 가죽 전낭 하나를 조서인의 손에 대충 쥐어 준 뒤, 그 뒤로 휘적휘적 자리를 떠나 버렸다.

남겨진 조서인은 멍하니 굳어 버렸다.

주변의 동기들이 다시 고생했다고, 수고했다고 말해 주었다.

“어? 울어? 미미야, 얘 좀 봐. 울어. 이겨서 감동했나 봐.”

“어머, 그래?”

조서인은 마희희와 대미미의 놀림을 피해 재빨리 눈을 비볐다.

“아, 아냐. 무슨, 눈에 뭐가 들어가서 그래.”

툭.

소호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눈이 마주치니 진심으로 기쁜 듯한 얼굴로 환하게 웃어 준다.

조서인은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이곳, 무산학관에 들어와서 소호를 만난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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