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17화
제16장 무공의 이유(1)
“……하여, 내공의 경지는 열아홉 단계로 나눠지는 것이다. 내공에 대해 전혀 모르는 무지한 상태를 일단공이라고 한다면,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을 이단공, 응신입기혈(凝神入氣穴)이라고 하여 하단전에 내공을 쌓고 기반을 닦기 시작하는 것을 삼단공이라고 하는 것이지. 그 후에는 축기와 깨달음의 연속이다. 옥동쌍취와 주천화부를 거쳐 오기조원(五氣朝元), 삼화취정(三華聚頂)까지. 그 후에 십사단공인 화경에 올라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처럼 평범해지는 반박귀진(返樸歸眞)까지 오르면 실질적으로 사람으로서 오를 수 있는 경지에는 다 올라갔다고 보면 된다.”
철표 교관은 석상처럼 딱딱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의외로 말을 잘하고 잘 가르쳐 주는 선생이었다. 내공의 기초는 모두가 지루해하기 십상인 과목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을 듣는 모든 학생들이 눈을 빛내며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다.
“그 후엔 사람이 다시 어려진다는 반로환동(返老還童)이나 신선이 된다는 등봉조극(登峯造極) 같은 것밖에 없다. 이를 현경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 경지는 의미가 없다. 이쯤 되는 사람이 속세에서 칼질을 하고 다니지는 않겠지? 무공이란 본래 신선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관념적으로 잡아 둔 경지라고 보아도 된다는 것이지. 혹은, 설령 그런 경지가 있다고 하여도 무림 강호에서 마주칠 일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들은 산속에 틀어박혀 신선이 될 준비를 하느라 바쁠 테니 말이다.”
철표의 수업이 끝날 때쯤 소호가 손을 들고 질문을 던졌다.
“궁금한 게 있어요!”
“이야기해라.”
“누구나 수련을 하면 신선이 될 수 있나요?”
철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흔히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는 말을 하곤 하지. 그렇다. 분명히 습득 능력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정명한 무공을 익힌다면 누구나 내공을 모으고 깨달음을 얻어 등선할 수 있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철표 교관의 말은 그의 사고방식을 나타내 주었다. 정론(正論)이었으나, 명문 무가 출신이 많은 무산학관 학생들의 특성상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면도 있었다.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철표 사부.”
분홍색 비단 무복을 입은 소년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어째서 다르게 생각하지? 이야기해 봐라, 원형주.”
“누구든 무공을 배우려고 할 수는 있겠으나, 실제로 뭔가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명문 무가나 구파일방 같은 곳에서도 화경의 고수는 정말 드물게 나오는데, 농사짓던 촌부나 장사를 하는 시전 상인이 화경의 고수가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원형주의 말에 공감하는 명문가 출신 아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거리며 눈을 빛냈다.
“그렇군. 너의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그건 무공을 익히는 환경에 대한 이야기이지 않나. 농사를 짓던 촌부든, 장사를 하던 시전 상인이든, 무공을 익힐 수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가능하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습득 능력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철표의 말에 이번에는 명문가 출신이 아닌 아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반면에 명문가 출신인 아이들은 불만스러운 얼굴이다. 철표는 그들의 대표 격으로 말하고 있는 원형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이야기했다.
“예. 미꾸라지가 용이 되는 것도 ‘가능’은 하지요. 하지만 모든 미꾸라지들한테 너흰 모두 용이 될 수 있다고 하진 않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군. 그럼 너는 희망이 없는 애들한테는 꿈도 꾸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건가?”
“그건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하는 건 좀…….”
“그 현실은 누가 정하는 건가. 무공과 인연도 없고 집안에서 밀어 줄 준비도 안 되어 있는 사람은 무공을 꿈도 꿔선 안 된다는, 그런 걸 네가 정하는 건가, 원형주?”
원형주는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가 대답하기가 궁색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철표는 시무룩해진 원형주를 위로하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 말도 틀린 건 아니다. 현실은 무시할 수 없지. 당장 밭일을 하지 않으면 내일 먹고살 음식도 없는 농부가 무공 수련을 할 여유 같은 건 없을 테니 말이다. 사실 네 나이 또래의 소년이 생각하기엔 심오한 주제야. 그러니 심각한 논쟁은 그만두고……. 내가 지금 너희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이거다. 사람이 ‘애초에 할 수 없는 것’과 ‘해도 잘 안 되는 것’은 다르다. 거기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차이가 있다, 원형주. 그리고 원형주의 의견에 동의하는 너희들.”
수업을 듣던 소년, 소녀들 일부가 움찔하였다.
“세상에는 네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항상 벌어진다. 특히 온갖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는 강호 무림은 더욱 그렇지. 이름도 없는 무림 초출의 애송이가 사실은 오존에 버금가는 강호 최강의 무인일 수도 있는 것이고,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고수가 막상 비무를 해 보니 제대로 된 무인이 아닌 경우도 있다. 딱딱하게 생각하지 마라. 너희는 그렇게 틀에 박힌 생각을 하기엔 아직 너무 어리다. 생각에 한계를 두지 마.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너희를 발전시킬 것이다.”
철표의 말에는 인생의 철학이 담긴 듯한 무게감이 있었다.
특히 마지막 말이 모두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서 철표 교관이 나간 뒤에도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눌 정도였다.
“철표 교관님은 생각보다 사고(思考)가 깊은 분이시네요, 소호 형.”
소호의 곁으로 다가온 섭주해가 빙긋 웃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맞아. 철표 교관님은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으셔.”
“사실 저희끼리의 이야기인데. 이번 내기도 철표 교관님의 허가가 있어서 할 수 있었다네요. 생각보다 깨어 있으신 분 같아요.”
“그랬구나. 어쩐지. 교관님들은 전부 다 이번 내기에 대해 아무 말씀도 없으시더라고.”
소호는 머리 뒤로 팔짱을 낀 채 배시시 웃었다.
“그나저나 얼떨결에 각반을 공짜로 얻었네?”
“소호 형 덕분입니다.”
“나? 나는 무슨, 계획을 짠 주해랑 열심히 싸운 서인이 덕분이지.”
“그러고 보니 말인데, 소호 형. 서인이는 치료를 좀 더 받을 것 같습니다. 오른팔 혈도에 대해 조사해 볼 것이 있다더군요. 학관의 의원과 백설지 선배가 붙어 있어요.”
“하긴, 신기한 일이니까. 서인이의 무공은 특이한 편이지. 황 사부님이 또 수련을 두 배로 시키실 것 같던데.”
소호는 근처의 눈치를 살폈다.
듣는 사람은 없는지, 이쪽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는지.
다행히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대미미를 제외하곤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서인이 있잖아.”
“네. 소호 형.”
“잘한 걸까? 내가 좀, 친구지만 너무 간섭한 건 아닐까? 그…… 아버지 일 말이야.”
소호의 얼굴에선 평소답지 않게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늘 밝고, 일사천리로 모든 걸 결정하던 소호였다.
그의 이런 모습은 오랫동안 소호의 곁에서 지켜 온 섭주해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섭주해는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뇨. 저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그렇지? 주해도 그렇게 생각하지?”
소호는 조금 밝아진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
“그냥 밤에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봤던 건데…… 그, 서인이 아버지가 학관에서 주는 지원금을 가져가고 나니까, 서인이가 많이 우울해하더라고. 안타깝긴 한데 그건 돈이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보였어. 그래서 고민해 봤는데, 결국 문제가 아버지니까. 해결도 아버지가 해야 하잖아? 그런데 아무리 고민해 봐도 도저히 말로 통할 상대가 아닌 것 같았단 말이야. 결국 남는 건 돈밖에 없었어.”
섭주해는 소호의 넋두리를 순순히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잘했다고 생각해요. 이 세상엔, 이해가 가지 않는 가족들도 많더라고요.”
“그치? 그런 아버지는 처음 봐……. 어떻게 자식의 것을 뺏어가려 할 수 있지?”
“은자촌에서는 못 보던 일이죠?”
“응. 상상도 못할 일이지. 할아버지들은…… 으음, 아니지. 우리 아버지라면…….”
소호는 잠시 상상해 보았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다들 어떻게든 뭔가 하나라도 더 주려고 하는 분들인데, 내 걸 뺏어간 적은 없어. 아! 하나 있다!”
“어떤 거였어요?”
“화연탄이랑 겸자……. 그때 아버지 옷자락 잡는 내기 후에 다 빼앗겼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는데!”
“후훗, 그건 뺏길 만한 일이잖습니까! 화탄을 갖고 노는 열두 살짜리가 어디에 있어요?”
“그건 그래.”
소호는 인정할 것은 빠르게 인정했다.
“아무튼 서인이한테는 그럼 비밀로 해 두자. 어차피 서인이 아버님도 어디 가서 이야기할 것 같지도 않고.”
“글쎄요. 비밀로 하는 건 좋은데, 서인이는 약간 눈치를 챈 것 같아요.”
“어? 어떻게?”
“그때 서인이를 격려하면서 이야기했다면서요? 누가 나오든 놀라지 말라고.”
소호는 잠시 이전에 있었던 일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그런 말을 하긴 했어…….”
“거기다 본인은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렇게 자신을 인정해 줄 리가 없다고 확신을 하고 있더라고요.”
“세상에, 생각보다 아버지에 대한 불신이 더 크네.”
“대충 드러난 사실만 보아도 그걸로 서인이에게 뭐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믿으라고 해도 믿기 힘들죠. 그런 부모님은.”
소호는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자리를 박차고 펄쩍 일어나서 주해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너무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랑 같이 가 보자, 주해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좀 보는 거야.”
“어어? 세상 물정이요?”
당황하는 주해를 누가 탓하겠는가.
거기에 소호는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대미미의 손을 잡고 그녀도 설득하려 들었다.
“흐아? 아, 안 졸았어요! 생각하고 있었어요!”
“응? 생각?”
“네에, 잠시 수업에 대해 생각을…….”
“앞으로는 눈을 뜨고 생각하는 게 어떨까, 미미야?”
미미는 새빨개진 얼굴로 볼을 부풀렸고, 소호는 까르르 웃은 뒤 미미를 달래 주었다.
은자촌 출신 삼 인방의 재출격이다.
그들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무산학관의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광장 쪽의 상인들에게로 향했다.
***
조서인은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아픔에 대해 격하게 토론하고 있는 이름 모를 의원과 백설지 선배를 보며 인생무상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쯤 풀어 주려나?’
내기에서 승리를 하고도 힘들어졌다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오른팔을 형틀 같은 곳에 쇠사슬로 묶고, 거기에 긴 장침을 열 개가 넘게 박아 두었다.
각반을 하나 새로 받은 건 좋지만, 그 때문에 유명해진 데다 아이들의 눈초리도 심상치가 않았다. 갑자기 무공이 강해진 것에 대해 묻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거기에 주작방에 숨어 있는 명로는 또한 어떠한가. 지금 주목은 받지 않지만, 그 명로에게는 범상치 않은 사문이 있다는 걸 혼자 알고 있는 상황이다.
“후우, 세상에 쉬운 일이 없구나…….”
조서인이 지쳐 갈 때쯤, 창가를 통해 발랄한 걸음걸이의 한 사람이 보였다.
샛노란 경장을 입고, 허리춤엔 마찬가지로 노란색 주머니를 맨 여성이었다.
“저 사람은……?”
조서인은 어째선지 그녀에게 시선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주머니 색깔이 눈에 익숙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