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93화 (222/686)

4권 18화

제16장 무공의 이유(2)

“미인이네…….”

분을 바른 것도 아닌데 얼굴이 뽀얗게 빛나는 여인이었다. 긴 머리카락을 뒤쪽으로 틀어 올려 옥비녀로 단단하게 고정시켰는데, 진한 검은색 머리카락이 샛노란 경장 옷과 잘 어울려 더욱 시선이 갔다. 밝으면서도 차분한, 큰누나 같은 안정적인 분위기가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전혀 꾸미지 않은 듯한데 미모가 눈에 띄는 신기한 여인이었다.

‘서른은 넘지 않은 분 같은데, 학관에서 일하는 분인가? 그런데 저 주머니를 어디서 봤더라……? 맞다! 소호. 소호도 저런 주머니를 갖고 있었어.’

조서인의 시선이 느껴졌던 걸까?

노란 경장 옷을 입은 여인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서, 이 층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던 서인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조서인은 화들짝 놀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쁜 짓을 하다 걸린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목덜미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데 고개를 돌린 방향엔 또 한 명의 미인이 싸늘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인? 네 팔의 미래가 걸린 진맥을 하고 있는데 미인이 눈에 들어와?”

“그, 그건…… 아닌데…… 창밖을 보다가 그냥 무의식중에…….”

“그래? 무의식중에 미인을 보고 기뻐서 외쳤다고?”

“네? 제가 외치지는 않았는데…….”

“…….”

“죄송합니다.”

조서인은 안 그래도 푸른색 눈동자가 더욱 싸늘해지자 재빨리 사과했다.

백설지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궁금했는지 창문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조서인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다음에 혼날 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째선지 백설지가 움직이질 않았다.

“설지 선배?”

조서인은 의아했다. 심지어 진맥을 하던 의원도 백설지가 굳어 있으니 진맥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어……?”

똑같이 밖을 내다본 조서인은 그제야 백설지가 왜 굳어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가장 처음에 눈에 들어온 것은 조금 전에 보았던 노란색 경장 옷을 입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백창의를 입은 사내의 팔짱을 끼고 함께 서 있었다. 다정한 모습을 보니 그녀의 부군으로 보였다. 뭔가 평범해 보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시선을 끄는 사내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을 안내하는 사람을 보니 번개를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정지되어 버렸다.

“으어어?”

조서인은 유아 때로 돌아간 듯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째서 처음에 발견하지 못한 걸까.

사람의 인지력은 이렇게나 보잘것없었던가.

아니, 미인밖에 보지 못하다니, 자신은 이렇게나 단순하단 말인가.

철탑처럼 거대한 체구에 항우 모양 철 가면을 쓴 사내는, 적어도 이곳 무산학관 내에서는 두 명 이상 존재할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저렇게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사람을 두고 노란색 경장 옷을 입은 여인만 눈에 들어왔다니.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세 사람은 친근한 느낌으로 수군수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샛노란 경장의 여인이 밝게 웃는 얼굴로 손을 들어 조서인이 서 있는 이 층 창문을 가리켰다. 여인의 부군과 가면철왕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그들을 쳐다본다.

“……!”

조서인은 자신의 심장이 멈춰 버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억, 하고 들이마신 숨이 나오질 않는다.

여인과 여인의 부군, 그리고 가면철왕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대가였다.

‘난 죽은 걸까?’

멍하니 굳어 있던 조서인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 세 사람이 갑자기 경로를 틀어 무산의방(武山醫方)으로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그건 옆에 있는 백설지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얼음 조각상처럼 굳어 있던 그녀가 한순간 얼음이 깨진 것처럼 돌아섰다. 진맥을 하던 의원도 마찬가지다. 벌떡 일어서서 초조한 듯 안절부절못하며 서성거렸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에 휩싸여 있길 잠시, 방문 너머에서 연설로 들었던 가면철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히 특별한 것도 없는데 여기가 대체 왜 보고 싶은 거냐? 무산학관에는 보여 주고 싶은 곳이 많아. 안 그래도 시간이 없는데, 의방이야 어디든 다 똑같은 곳 아닌가?”

“휘연은 감이 좋은 편이다. 보고 싶다고 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파하핫! 원래부터 조짐은 있었다만 애처가가 다 되셨군그래. 내 항주에서부터 그런 줄 알고 있었지.”

“그런 줄 알았다면 그때 좀 더 잘해 주지 그랬나.”

“뭐라? 내가 못해 준 건 또 뭐냐! 그만하면 잘해 줬지! 네가 몰라서 그렇지. 그 객잔을 내가 다 먹여 살린 거야. 이거 왜 이래.”

“재밌는 소리를 하는군.”

“재미?”

여인의 부군과 가면철왕으로 생각되는 두 사람이 격의 없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서인은 멍해졌다.

가면철왕 정도의 위치면 고수가 모래알만큼이나 많다는 무림 강호에서도 막 대할 수 있는 인물이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다. 구파의 장문인쯤 되어야 편하게 대할까. 그나마도 이미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이 상대이니 반존대로 대하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직 장로 대우를 받을 나이는 아니지만, 지니고 있는 강력한 무공과 전 무림맹주의 수신호위였다는 점, 그리고 현재 무산학관의 학관장이라는 점에서 강호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무산학관 안에서는 학관의 관장으로서 엄격하고 무게감 있는 무인의 대표적인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그를 마치 동네 친구처럼 편하게 대한다?

조서인에게 있어서는 눈앞에서 개가 사람의 말을 한 것과 같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쿵쿵.

“학관장이다. 잠시 실례하지.”

이제는 평소의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가면철왕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문을 열고 잔뜩 얼어 있는 세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였다. 가면철왕의 옆으로 샛노란 경장을 입은 여인과 그녀의 부군이 들어왔다. 조서인은 다시 한 번 숨을 멈췄다. 오른팔에 꽂혀 있던 장침 열 개가 쇠사슬 사이로 들썩거렸다.

“여기 이 사람이…… 으음, 무산의방의 의원이시고.”

“곽공입니다, 학관장.”

자신의 이름이 잊힌 게 자존심이 상했던가.

의원 곽공은 긴장 때문에 덜덜 떨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그래. 곽공. 그런 이름이었지. 그리고 여기 이 친구랑 이 친구가…… 아, 그래. 백호방에 있는 친구들이야.”

“백호방? 이 아이들 둘 다?”

“그래. 여자아이는 일 년 먼저 들어왔고. 남자아이는 올해에 들어왔지.”

백호방이라는 사실이 다른 두 사람에게도 중요했던 모양이었다. 노란색 경장 여인과 그녀의 부군의 분위기가 변했다. 특히 여인 쪽의 변화가 눈부셨다. 그녀는 “어머나!” 하고 탄성을 내뱉으며 두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백호방이 무산학관에 있는 기숙사 중에 한 곳이죠? 거긴 어때요? 지낼 만한가요? 씻는 곳이라든가, 잘 때 필요한 침구류라든가. 부족한 것은 없어요?”

“아…….”

마치 아들을 학관에 보낸 어머니 같은 모습이라고 조서인은 생각했다. 눈을 빛내며 진지하게 묻는 그녀에게 백설지가 대답을 해 주었다.

“괜찮……아요. 필요한 건 모두 있어요.”

“그래요? 식사는요? 식사는 할 만해요? 이상하거나 더러운 게 밥으로 나오지는 않아요?”

“네. 다 먹을 만해요.”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백설지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걸까. 노란 경장을 입은 여인은 “그렇구나. 그렇구나.”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학관이 이상한 짓을 안 해서.”

“이봐. 학관장이 바로 뒤에 있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 우리 학관이 학생들한테 얼마나 돈을 투자하는 지 알기는 하는 거야? 그런 걸로 장난치지 않아, 우리는.”

철우가 짐짓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했으나, 여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어머나, 아직 뭘 모르시네요. 이런 건 윗사람이 봐서는 모르는 거예요. 직접 사용하고 먹는 사람들한테 들어야 진정한 평가를 들을 수 있는 거죠. 윗사람이 투자를 많이 하면 뭐해요. 중간에서 빼먹을 수도 있는 건데.”

“허? 우리 학관에 그런 놈들은 없…….”

버럭 소리치려던 가면철왕이 잠시 침묵했다.

“……아마 없을걸?”

“솔직히 말해 봐요. 관심도 없었죠?”

“…….”

“잘됐어요. 오늘 확인해 보면 되겠네요.”

여인의 목소리는 맑고 당당해서 그녀의 말이 무조건 옳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어찌 보면 지나친 간섭인데도 불구하고 천하의 가면철왕이 대꾸하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말을 삼키고 있었다.

그사이, 이 모든 것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조서인에게로 여인의 부군이 다가왔다. 깨끗한 백창의를 입고 뒤에서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 오른쪽 귀가 통째로 잘려 나갔는지 없다는 게 특이하다면 특이하달까. 그것 외에는 평범한 인상의 사내였다.

조서인은 눈을 끔뻑거리다가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신기한 느낌이었다.

분명히 외모는 평범한데, 눈빛과 분위기에서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감이 있었다.

“너는, 창을 수련하는구나.”

나지막한 목소리. 듣기 좋은 울림이었다.

그 내용에 놀라기에 앞서, 사내가 입을 열자 보인 주변의 반응이 더욱 눈이 띄었다. 가면철왕이 말을 멈추고 청취한다. 여인 또한 사내가 할 말을 다 할 수 있도록 기다려 준다.

놀랍게도 사내는 말 한마디로 이 무리, 이 장소를 숨 쉬듯 빼앗아 지배하고 있는 것이었다.

‘잠깐, 뭐라고……?’

조서인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내가 창을 쓴다는 걸 알아챘어……?’

조서인은 바보가 아니었다. 손바닥에 남은 굳은살이라든가, 무공을 펼치는 자세라든가 그런 요소를 보고 알아차렸다면 놀라지도 않았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그런 것을 보지 않고도 한눈에 조서인을 꿰뚫어 보았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보지 않고도 조서인이 사용하는 무기를 알아맞힌 것이다.

“네. 그, 그렇습니다.”

“신기한 몸을 갖고 있구나. 팔은 왜 그렇지?”

“어, 제가…… 대련을 하다가 혈도가 상해서…….”

“그래? 재미있군. 의원, 이 아이의 팔에서 침을 빼 줄 수 있겠소?”

조서인은 알 수 없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지금 조서인에게 관심을 갖는 게 누군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곽공 의원은 두말없이 조서인의 팔에서 장침 열 개를 뽑았다. 전완근 근육이 찌릿찌릿했다. 쇠사슬마저 풀고 나니 팔의 감각이 완전히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 조서인의 팔을 잡고 사내가 일으켜 세워 주었다.

“너는 이름이 어떻게 되지?”

“조서인……이라고 합니다.”

“그렇구나. 서인아.”

사내의 눈이 번뜩인다.

조서인은 그 순간 느꼈다. 사내의 존재감이 무산의방 전체가 좁을 정도로 뿜어지는 것을. 무려 가면철왕을 넘어서는 힘을 이 사내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너의 창술을 한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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