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20화
제16장 무공의 이유(4)
“아저씨,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청경채 한 상자를 들어 올렸던 중년의 사내가 깜짝 놀라 다시 상자를 내려놓았다.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거는 게 꽤나 흔치 않은 일인 듯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혹시 나한테 말하시는……?”
“네. 아저씨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아……!”
중년의 사내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나이는 오십 대 초반쯤 되었을까.
살짝 넓어지기 시작한 이마에 무릎과 소매 부분의 옷감이 헤진 것이 눈에 띈다. 그의 얼굴에 히죽,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 떠올랐다.
“크흠! 미래의 영웅님들께서 어쩐 일이십니까요? 제가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알려 드려야 합죠. 얼마든지 말씀하십쇼.”
사내는 몇 번이나 허리를 굽히며 접객의 미소를 지었다. 친절하겠답시고 짓는 표정일 테지만 그 웃음이 지나쳐 어색해 보일 지경이었다.
소호는 옆머리를 긁적였다.
눈이 좋으면 안 좋은 점이 이거다. 소호는 사내가 처음 그들을 봤을 때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 것, 짜증스럽게 눈을 찌푸리는 것,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순식간에 표정을 바꿔 지금의 저 과하게 친절한 표정을 짓는 과정을 전부 선명하게 보고 만 것이다.
“그렇게까지 공손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소호가 말려 보았으나 사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무산학관에 계신 미래의 영웅님들께는 당연히 공손해야지요. 그래서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셨지요?”
“네.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입꼬리를 끌어 올린 친절한 미소는 마치 단단한 성벽과도 같았다.
소호는 그런 그를 잠시 묵묵히 응시하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으음, 그럼 여쭤볼게요. 근데 그 전에, 목이 마르지 않으세요?”
“예?”
“객잔 이름이…… 보자, 영웅객잔이네. 이름 멋지네요. 여긴 뭘 잘하나요? 소면 같은 것도 잘하나요? 아저씨는 여기서 일하는 분 맞으시죠?”
“아…… 그게, 저는 아랫마을에 삽니다. 저희 마을에서 나는 야채를 가져다가 영웅객잔에 파는 사람입죠. 객잔에서 일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시구나! 더 잘됐네요. 아저씨는 제가 찾던 사람이에요!”
“예에? 어, 으음, 그리고 소면은…… 아마 그럭저럭인 걸로 압니다요. 여긴 주로 고기가 들어가는 요리들을 많이 파는 곳이라서요.”
“그래요? 아쉽네요. 제가 전에 있던 마을은 산골에 있었는데요, 객잔에 손님이 적은 대신 숙수 삼촌이 맛있는 걸 많이 해 줬었어요. 그중에 소면은 특히 맛있어서 산 너머 사람들이 찾아올 정도였고요.”
“산골……? 아, 네. 그러셨군요.”
“아아, 이야기하니 또 먹고 싶네요. 닭 국물이 진하게 우러난 끈적끈적한 육수에 탱글탱글하게 찰진 면발. 거기에 올라가 있는 보들보들하게 쭉쭉 짖어 놓은 닭고기.”
“…….”
“듣기만 해도 맛있겠죠? 이게 직접 보면 더 장난 아니에요. 객잔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이걸 먹으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 같다고 막 그랬다니까요?”
“허어.”
“말하고 있으니 배고프네요. 어때요? 저희한테 영웅객잔 소개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 차와 음식은 저희가 대접할게요.”
싱그럽게 웃는 얼굴에 순수하고 맑은 기운. 거기에 상대와 함께하고 싶다는 호의를 꾸밈없이 보여 주니 거절하기 쉬울 리가 없었다. 사내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순순히 영웅객잔 안으로 소년, 소녀들과 함께 들어갔다.
“으음, 괜찮긴 한데.”
소호는 영웅객잔에서 파는 소면을 몇 젓가락 먹은 뒤에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너무 큰 기대를 한 것일까?
아니, 어쩌면 비교 상대가 황실 제일 대령숙수에게도 인정받은 강운찬 숙수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소면의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특별할 것도 없는 무난한 맛이었다.
영웅객잔에 야채를 납품하는 사내는 이름이 왕오라고 했다.
무산촌이라 불리는 아랫마을에 살고 있고, 그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무산학관에 물건을 갖다 팔거나 와서 품삯을 받으며 일하면서 생활한다고 하였다. 아내와 딸이 한 명 있고 집에는 노모를 한 명 모시고 있다고 했다.
왕인은 마주 앉아 보니 꽤나 처세술에 능한 사내였다. 처음에 객잔에 들어왔을 때도 그랬다. 왜 야채를 안 나르고 들어왔냐는 객잔 총관의 질문에 소호와 동생들을 과장되게 소개하면서 잠깐의 휴식 시간을 얻어 낸 것이다.
소호가 심태연에 소면, 그리고 값이 좀 나가는 차를 주문하니 왕오는 숫제 호객 행위로 손님을 데려온 것처럼 총관에게 너스레를 떨기까지 하였다.
“저희가 가고 나면 총관에게 유세를 부릴 수도 있겠네요. 이야기를 나누기엔 오히려 좋은 상대예요, 소호 형.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을 줄 아는 사람 같습니다.”
섭주해가 소호에게만 들릴 만큼 나직한 목소리로 조언을 해 주었다. 소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제가 느끼기엔 아주 맛있는데 도련님들 입맛엔 안 맞으셨나 봅니다. 어떻게, 숙수를 불러서 한마디 해 드릴까요?”
“아니에요. 그리고 이 심태연은 맛있네요. 쫄깃하고 달콤해요.”
소호는 대추 속에 찹쌀을 넣어 익힌 뒤 꿀을 바른 심태연을 들어 올리면서 웃었다.
대추의 은은한 향과 찹쌀을 익혔을 때의 쫄깃한 식감. 거기에 꿀의 달콤함까지 합해져 있으니 그야말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맛이었다.
“백번 맞는 말씀입니다. 영웅객잔의 심태연은 아주 맛있지요. 제 딸아이가 매일 먹고 싶다면서 조르곤 합니다. 저희끼리 말인데. 솔직히 여기 영웅객잔은 학관에 가까울 뿐이지 실력 있는 숙수는 아닌 것 같습니다요. 하긴, 실력 있는 사람은 다 항주나 북경 같은 곳에서 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이 심태연은 아주 맛있어요.”
왕오는 잠시 아련한 눈빛으로 심태연을 보다가, 비밀을 털어놓듯 나직하게 말해 주었다.
“맞아요. 찹쌀을 얼마나 익히냐가 중요한 건데 여기 숙수님은 그걸 잘 알고 있네요. 어때, 미미야? 심태연 맛있어?”
“응!”
소호가 옆을 보니 대미미는 먹이를 아껴 먹는 다람쥐처럼 심태연을 하나씩 집어 오물오물 오랫동안 씹고 있었다. 행복하게 배시시 웃는 얼굴이 귀여웠다. 금세 손이 다시 접시를 향하지만, 뭔가를 꾹 참는 듯 멈칫거리면서 경건하기까지 한 동작으로 하나씩만 집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아저씨. 따님은 몇 살이에요?”
“제 딸 말입니까? 하하, 도련님들과 비슷한 나이지요. 올해 열한 살이 됩니다. 집사람이랑 같이 무산학관의 빨래 일을 돕고 있어요. 오늘은 아마 마을 개울가에 있을 테지요. 착하고 부지런한 아이입죠.”
“그렇구나. 야채를 다 옮기고 나면 마을로 내려가세요?”
“예예, 그래야지요.”
소호는 손을 들면서 안쪽에서 그들을 계속 흘깃거리면서 주시하는 영웅객잔 총관을 불렀다.
“여기 심태연 하나 포장해 주세요. 왕오 아저씨 드릴 거니까. 더 맛있게 해 주셔야 해요.”
“……!”
그 순간 왕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마 예상치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속내를 감추는 데 능숙한 사내이건만, 소년이 건네 오는 순수한 호의에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는요. 요즘 궁금한 게 생겼어요. 고민이랄까요. 저는 원래 제가 살던 마을이 되게 지겹다고 생각했거든요? 특별한 일 없이 하루하루가 너무 심심하다고 생각했어요. 동네 할아버지들은 저를 볼 때마다 뭔가를 가르쳐 주려고 하고, 그게 싫은 건 아닌데. 처음엔 배우는 게 재밌다가 조금 있으면 지루해지거든요. 그럼 내가 이걸 왜 배워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도망 다니면서 놀러 다니고 그랬어요. 그나마 재밌는 게 객잔에 가끔 오는 손님들이랑 만나는 건데, 그건 엄마가 별로 안 좋아해서 자주 못 가고요.”
어느새 주변의 모두가 소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왕오, 섭주해, 대미미 세 사람이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소호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서 저는 다른 마을들도 다 똑같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와 보니 그게 아닌 거예요. 사람들이 항상 뭔가에 힘들게 쫓겨 다녀요. 삶이 힘들대요. 그리고 무공을 안 익힌 사람이 되게되게 많아요. 우리 마을은 안 그랬거든요. 저보다 약한 사람은 동생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어요.”
소호는 옆에 있는 섭주해와 대미미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학관 안에는 무공을 익힌 또래 아이들이 많긴 한데, 뭔가가 달라요. 그리고 굉장히 열심히 노력해요. 마치 무공을 익히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뭔가를 찾는 것 같아요. 이상해요. 제가 생각했던 세상이 아니에요.”
정돈되지 않은 말투였다.
왕오가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완전한 남이기 때문일까. 소호가 원체 설명하는 것에 약하긴 했으나, 이번엔 더욱 여과 없이 그동안의 감정들을 솔직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궁금해졌어요. 무공을 익힌다는 건 어떤 거지? 무림인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 거지? 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걸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뿐이에요.”
소호가 지그시 시선을 보내자, 그제야 자신이 불려 온 목적을 깨달은 왕오의 눈빛이 풍랑을 맞은 배처럼 정처 없이 흔들렸다.
감정의 벽이 있다?
그런 것을 뛰어넘어 버리는 것이 소호라는 소년이다.
순수한 인간미, 솔직한 성정으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재능이 있었다.
“그러니까…… 도련님이 원하시는 건…….”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그냥 저는 알고 싶을 뿐이에요. 아저씨는…… 아니지, 보통 사람들은 무공에 대해, 그리고 무림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지하게 가라앉은, 웃지 않는 소호의 질문에 옆에 있던 섭주해와 대미미도 숨을 삼켰다.
왕오는 고민하는 듯 보였다. 움츠린 어깨, 살짝 굽힌 자세에서 그가 말했을 때 불러올 결과를 두려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심태연 나왔습니다.”
때마침 나온 음식이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을 잠시 흩어 놓았었다.
총관은 회색 보따리로 감싼 접시를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왕오에게 말했다.
“자네니까. 그릇도 그냥 좋은 걸로 넣었어. 가져갔다가 내일 배달 올 때 가져다주게나.”
“아…… 네, 네. 물론입죠. 내일 가져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총관 어른.”
왕오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고, 총관은 소호와 아이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멀어졌다.
그사이 어떤 생각을 한 것일까.
왕오는 회색 보따리를 힐끗 쳐다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림인은…… 족보 없는 귀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