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21화
제16장 무공의 이유(5)
무엇이든 첫걸음이 어려운 법이었다. 왕오는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뭐가 그리 잘났는지 몰라도, 무림인은 우리와 다릅니다. 사실 저도 무산학관의 비호 아래 먹고 사는 주제에 이런 말 하긴 뭐할 수도 있지만……. 도련님이 솔직한 걸 원하시니 저도 미친 척하고 솔직하게 말씀드립죠. 저희 같은 민초들이 보기엔 가마 타고 다니는 관아의 저 높으신 분이나, 칼 차고 돌아다니다가 서로 시비가 붙으면 칼부림 나는 무림인이나 무섭긴 마찬가지입니다. 자칫 잘못 걸리면 목 날아가는 건 똑같으니까요.”
무산학관의 아랫마을에 살면서 어떤 일들을 경험해 온 것일까.
기억을 떠올리는 왕오에게선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아무리 힘없으면 서러운 게 세상 이치라지만, 그래도 억울하긴 합디다.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고……. 나랏일 하는 관인분들이면 그나마 이해라도 하겠는데, 솔직히 칼질 잘하는 무림인이나, 저기 어디 기루에서 행패 부리는 잡놈들 쫓아내면서 돈 받는 파락호나 다를 게 뭔가 싶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네들 딴에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민초들은 죽이지 않네 뭐네 하지만, 그래 봤자 ‘죽일 수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소호는 그제야 깨달았다.
왕오가 계속해서 어깨를 움츠리고 소극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것이다.
누군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힘을 쥐여 주면 된다.
힘을 가진 무림인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민초들을 함부로 대했을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저도 계속 일을 해서 마을에선 힘깨나 쓰는 사람으로 불립니다만, 눈앞에 계신 도련님들은 열두어 살밖에 안 되었어도 저 하나 쓰러뜨리는 건 식은 죽 먹기지요?”
소호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무림인이 오면 어째야겠습니까.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이야 그저 죽었네 하고 조용히 해 달라는 거 다 해 줘야지요. 대명률(국법)이니 정파에 말하면 된다느니 그런 거 다― 헛방입니다. 죽고 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호랑이가 자기는 함부로 사람 안 죽인다면서 마을 근처를 어슬렁거리면 괜찮겠습니까? 그러다 호랑이가 밥 좀 달라고 하면? 내가 다음 날 굶는 한이 있어도 줘야지요. 어떻게 안 죽인다는 말만 믿고 뻗대겠습니까요.”
한번 말을 하기 시작하니 쌓여 있던 한이 줄줄이 흘러나온다. 왕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좋은 분들도 있습니다. 소림이나 무당처럼 명성이 있는 구파나 오대세가 분들은 웬만한 현령들보다 더 잘해 준다고 합디다. 산적도 없애 주고 행패부리는 무림인들 있으면 우리 대신 혼내 주기도 하고. 그래도 무림인이 어디 그런 분들만 계시던가요. 칼 든 어린애들만도 못한 것들도 많습니다.”
칼 든 어린애들.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인격은 없으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위험한 능력은 지닌 자들을 말함이었다.
“관에서는 무림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면서 나 몰라라 하지요. 세상사 참……. 그러니 족보 없는 귀족들입니다. 우리처럼 평범한 무지렁이들이 보기엔 명가의 족보만 없을 뿐, 우리와는 다른 세상의 무서운 사람들입죠.”
소호는 고개를 끄덕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왕오의 말.
틀린 말 하나 없으며 반박할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정파가 아무리 열심히 협의지도를 간다고 해도 이 세상에 욕망에 충실한 사파와 마두들은 끊임없이 나타나 민초들을 괴롭힌다.
그러니 어찌 반박할 수가 있을까. 역사적으로도 지금도, 괴로운 건 민초들뿐인데.
“그렇군요.”
소호는 곰곰이 생각을 거듭했다.
왕오는 두려워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뿌듯하고 개운해 보이기도 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이렇게나 할 말을 다 해 본 것이 얼마 만일까. 어쩌면 생애 처음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도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 두려운 듯 소호와 아이들의 안색을 살펴야 하니, 그것이 민초들의 슬픈 현실이었다.
약함.
부족한 힘.
결국은 그게 문제인 것이다.
“그럼 왜 스스로 강해지진 않는 거죠?”
“예?”
“아저씨도 무공을 익히면 안 되나요?”
고개를 갸웃하는 소호의 눈빛이 반짝인다. 순수한 의도, 악의 없는 질문이었다.
“그건…….”
왕오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대답은 옆에 있던 섭주해가 해 주었다.
“소호 형, 그건 어렵습니다. 비인부전(非人不傳)의 무공을 가르쳐 줄 사람이 있는지, 너무 늦은 나이라 무공을 익힐 수 있는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애초에 무공을 익히는 게 좋은 선택일지 의문입니다.”
“어째서?”
섭주해가 왕오에게 잠시 시선을 보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 심유한 눈빛이 어린아이답지 않은 현기를 띠었다.
“사람은 힘이 생기면 달라지는 법입니다. 무공을 조금이라도 익히는 순간, 불의를 겪을 때 싸우고 싶어질 테지요. 그러면 자연스레 싸움이 나서 죽임을 당하는 일도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무림인들도 상대가 무공을 익혔다고 생각하면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을 것이고요.”
“흐음. 알겠어. 그치만 그래도 납득이 안 돼.”
소호는 불만스러워 보였다.
“민초들은 무공을 익히지 말아야 한다는 거, 누가 정한 거야?”
“네?”
“왜 무공을 익히면 안 돼? 모두가 다 익혀도 되는 거잖아. 누구든 쉽게 익힐 수 있는 무공도 있잖아? 태극권이라든가, 삼재검 같은 거.”
“그건…….”
“그리고 이상해. 이해가 안 가. 무공을 익혔든 안 익혔든 이유 없이 뭔가를 뺏기 위해 칼을 들면 나쁜 거 아냐? 그 사람이 무공을 익혔는지 안 익혔는지가 왜 중요해? 협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들만 지켜 줘야 하는 거야? 아니지? 불합리한 일을 겪으면 그게 누구든 돕는다, 그게 협의지도 아냐?”
왕오가 목숨을 걸고 정의를 말했다면, 소호는 누구나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던 규칙에 의문을 표했다.
섭주해가 곧바로 답하지 못하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무공은…… 그렇게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재능이 있지는 않아요. 연공과 연단의 과정은 뜨거운 사막을 맨발로 횡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나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소호 형.”
“흐음…….”
“그렇지만 확실히 맹점이 있긴 했군요. 무림인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는……. 소호 형은 역시 생각하는 방식이 남달라요.”
소호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뽀얀 얼굴 위에 도톰한 입술이 불만스럽게 일자로 앙다물어졌다.
“그런 거야?”
“네. 그런 거예요. 그리고 지금은 이 문제에 대해 깊게 이야기하기보다는 솔직하게 말해 준 왕오 아저씨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이 어떨까요.”
“아!”
소호가 정신을 차린 듯 눈을 번쩍 뜨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고마워요, 아저씨.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아니 아니, 별말씀을요, 도련님. 오히려 제 속이 시원해졌습니다요.”
왕오가 뭔가를 떨쳐 내듯 고개를 몇 번 흔들더니, 처음처럼 붙임성 좋은 얼굴로 허리를 굽혔다. 처음과 다르게 지금은 진심이 느껴졌다.
소호와 두 사람은 왕오에게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섰다. 왕오는 세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쪽 손에는 심태연을 들고 한쪽 손으로는 손을 흔들면서 석상처럼 서 있었다.
“흥미로운 대화였어.”
“저도 그랬어요, 소호 형.”
섭주해는 잠시 머뭇거리며 뭔가를 망설였다. 소호는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소호 형, 지금껏 자신이 무림인이라는 점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나요?”
“으응. 조금?”
소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씩 웃었다.
“그냥, 뭐. 우리 마을에선 무공을 무공이라고 의식하고 배우지는 않잖아? 그냥 어쩌다 보니 숨을 제대로 쉬는 법을 배우고, 막무가내로 뛰어놀고 있으면 갑자기 묵신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신법을 가르쳐 주고. 늘 그런 식이었잖아?”
“네. 그랬죠. 하하, 맞아요. 저도 묵신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셨어요. 잘 배우지는 못했지만요.”
“그래? 암튼 나는 그랬어. 내가 특별히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어. 그냥 다들 그렇게 크는 줄 알았지. 우리가 흑석촌에 갔을 때 기억나? 시장통에서 애들이랑 다투고 그랬잖아?”
“못 배운 아이들이었죠.”
섭주해의 얼굴과 말투가 싸늘했다. 남해군도의 피를 이어받은 소년은 원한을 잊지 않은 것이다.
“히힛, 그런가? 걔들을 보고도 나는 별 생각이 없었어. 그냥 좀 애들이 약하구나, 라고 생각한 정도였지. 그런데 여기 와서, 그리고 서인이를 보고 알았어.”
소호는 주작방의 아이와 전력을 다해 싸우던 조서인을 떠올렸다.
그렇다.
조서인이다.
이 모든 생각들은 조서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른 삶을 살았더라고. 서인이가 간절히 원하던 걸 나는 갖고 있었어. 그리고 그게 지겹다고 매번 뛰쳐나왔었지.”
“소호 형은 특별하니까요.”
섭주해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십이 세의 나이.
자신의 특별함이 자랑스럽고 뿌듯해야 할 텐데, 소호는 이상하게도 씁쓸한 기분이었다.
“그게 미안하면 내가 이상한 걸까?”
“그건 오라버니가 착해서 그런 거야!”
“히힛, 그런 걸까?”
소호는 대미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을 이었다.
“서인이는 정말로 열심히 했어. 눈 밑이 까맣게 죽고 피곤해서 코피가 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연습하더라. 그걸 보니까 문득 궁금해졌어. 그 열기……라고 할까? 그게 나에게도 있는 걸까? 나라면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소호는 정말로 궁금했지만, 섭주해와 대미미는 그 의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소호가 자신에 대한 답을 찾는 중요한 순간이었지만, 그에 도움을 주기엔 모두가 너무 어렸던 탓이었다.
“소호 형에게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맞아. 오라버니는 그렇게까지 안 해도 금방 배우고 잘하잖아?”
두 사람 모두 한 치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
소호는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모르겠어. 그냥 나에 대해, 무공에 대해 알고 싶었어.”
“아! 그에 대해서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어렸던 아이가 나이가 들면서 자아를 찾으려 하는 것. 사람들은 사춘기라고 하더군요.”
“어어?”
소호가 황당함에 눈을 크게 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섭주해, 대미미도 함께 웃었다.
사춘기라니.
영원히 어린아이일 것 같던 세 사람이 어느새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 자체가 웃겼다.
세 사람의 웃음 섞인 이야기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골목에서 한 사람을 만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골목길에서 기다리는 한 사람.
새하얀 무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소년.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
유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