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97화 (226/686)

4권 22화

제16장 무공의 이유(6)

“유준 선배?”

소호는 의외의 인물을 만나 고개를 갸웃했다.

백호방의 최강자. 불패검(不敗劍)이라 불리는 유준이었다. 독보적인 검술 실력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리 사교성이 좋은 인물은 아니었다. 항상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무공만 수련할 뿐 방장인 봉천을 제외하면 백호방 안에서 유준과 대화해 본 사람이 손에 꼽힐 정도였다.

섭주해와 대미미도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유준이 찾아올 만한 일을 아무리 생각해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되물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네.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유준에게선 곧바로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소호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대련인가? 대련이겠지?’

유준과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입학 후 백호방 선배들과의 대련 때뿐이었으니, 실제로 대련 말고는 딱히 용무가 없기도 했다.

첫 번째는 소호가 이겼고, 진심을 다해 살기를 내뿜었을 때는 유준이 이기지 않았던가. 일승일패의 전적을 가진 두 사람이었다. 다시 만나 승부를 내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닐 터. 그런 상황에서 유준이라는 최고의 비무 상대를 눈앞에 두니 소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너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저를요?”

실망은 잠시, 소호는 호승심을 버리고 호기심에 휩싸였다.

누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걸까? 그리고 왜 그걸 유준이 말하러 온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를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여기선 말하기가 곤란한데.”

“지금 가야 하는 거예요?”

“가능하다면 지금 함께 갔으면 좋겠어.”

이번엔 유준이 고개를 돌려 섭주해와 대미미를 바라보았다.

두 눈을 감고 선선히 웃는 얼굴이지만 두 사람을 멀리 하는 듯한 느낌이 풍겼다. 아무래도 섭주해와 대미미는 초대되지 않은 듯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만나 보면 알겠지?’

소호는 도대체 유준을 시켜서 자신을 만나려는 게 누군지 궁금했다.

“얘들아, 나…….”

“네. 저희 먼저 들어갈게요.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 먼저 들어가 있을게!”

섭주해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고, 옆에 있던 대미미도 배시시 웃으며 함께 자리를 피해 주려 했다.

소호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여전히 자신의 속을 너무 잘 아는 동생들이었다.

“소호 형, 대련은 하시면 안 돼요. 다쳐서도 안 되고요.”

“히힛, 알았어. 근데 용무가 그쪽은 아닌 것 같아.”

“그런가요. 어떤 일인지 궁금하네요.”

조용히 귓속말을 나눈 섭주해가 멀어진다. 유준은 자연스레 몸을 돌려 소호를 뒤에 둔 채 동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희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학관의 본관. 사람들이 모르는 숨겨진 방으로 갈 거야. 그분이 조용히 만나 봐야 한다고 했어.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흐음, 그렇구나.”

소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비밀, 숨겨진 방.

소년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단어들이지 않은가.

두 사람은 잘 정돈된 정원들과 자그마한 사자상을 지나, 마침내 무산학관 본관 앞에 도착했다. 유준은 거기서 방향을 틀어 본관의 좌측에 붙은 자그마한 건물로 향했다.

“여기야.”

“마구간이네요?”

“텅 비었지? 여긴 원래 본관에 온 손님이 말을 타고 왔을 때 맡기는 곳인데…… 보통 텅 비어 있어.”

튼튼한 목재로 신경 써서 만들어진 마구간이었다. 황토를 단단하게 다져서 만든 바닥에 말이 들어갈 수 있는 방은 앞뒤를 합쳐서 열 개. 모두 깨끗한 건초가 무더기로 쌓여있어서 깔끔해 보이는 장소였다. 단 한 번도 말이 들어왔던 적이 없는 것처럼 축사 특유의 퀴퀴한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았다.

‘적왕네 집이 생각나네.’

소호는 마을에 있던 붉은빛 털을 가진 소를 떠올렸다. 덩치가 크고 성질이 불같던 적왕은 의외로 깔끔한 걸 좋아해서 매일 아침 깨끗하고 바짝 마른 건초만을 먹었다.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청소가 되어 있지 않으면 축사 안에 들어가려 하지도 않았다. 그곳과 똑같았다.

“왜 텅 비어 있어요? 본관에 손님들이 잘 안 오나요?”

“아니, 학관 입구에도 마구간이 하나 더 있어서, 손님들은 거기에 보통 맡기거든. 다들 무산학관을 구경하고 싶어 하니까. 학관 안에서는 천천히 걸으면서 구경하려고 하고. 그리고 애들이 돌아다니는 학관 안에서 말이 뛰어다니면 번잡스럽기도 하니까.”

“하긴 수업하고 있는데 옆에서 말이 뛰어가면 다들 깜짝 놀랄 것 같아요.”

“맞아. 그러니 정말로 급한 일이 아니면 본관까지 말을 타고 안 들어와.”

유준은 나긋나긋하고 평온한 말투로 잘 설명해 주었다.

소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던 모험은 유준이 마구간 맨 오른쪽 축사의 건초 더미를 헤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아래에 있는 비밀 문을 위로 열어 올렸을 때 절정에 달했다.

“우와! 우와!”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재밌잖아요! 신기해요! 비밀 통로라니!”

소호는 두근거림을 참을 수 없었다.

뭔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런 비밀 공간에서 만나는 사람이라니. 평범할 리가 없는 것이다.

“별거 아니야. 나도 잘은 모르지만 무산학관을 지을 때 이런 비밀 통로들을 많이 만들었다고 해. 그걸 전부 그려 놓은 지도도 있다던데, 아직 본 적은 없어.”

“이런 게 더 있다고요? 학관을 좀 더 탐험하면서 돌아다녀야겠어요.”

“너무 여러 군데 들쑤시고 다니면 혼날 거야. 조용히 탐험하도록 해.”

“히힛, 알았어요. 그런데 유준 선배는 이런 비밀 통로를 몇 개 정도 알고 있어요?”

“나는, 세 개 정도.”

“우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여 줄게. 그럼 가 볼까?”

“네!”

유준이 사다리를 타고 먼저 내려가고, 소호는 그 뒤를 따라 내려갔다.

“문은 닫고 내려와 줘.”

소호는 문을 닫으면 어두워질 것을 걱정했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누군지 몰라도 비밀 통로를 설계한 사람은 머리가 굉장히 좋은 사람임이 분명했다. 마구간 아래의 비밀 통로는 한쪽 방향을 향해 길게 뻗어 있었는데 그 중간중간에 천정에 뚫린 엄지손톱만 한 구멍을 통해 땅 위의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신기했다.

조그만 한 구멍으로 내리쬐는 햇빛 덕분에 비밀 통로 안은 그다지 어둡게 느껴지지 않았다.

‘방향은 본관 방향이고. 구멍은…… 조각상인가? 그러고 보면 본관 쪽에 유난히 사자상 같은 게 많았어.’

소호는 걸어오면서 보았던 풍경들을 떠올리면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건 사자상이었다. 당장 다시 올라가서 사자상의 구멍을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탁. 탁.

고요한 비밀 통로 안에서 유준이 지팡이로 땅을 짚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통로는 길지 않았다. 큰 보폭으로 칠십 걸음쯤 걷고 나니 다시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나타난 것이다. 유준은 능숙한 움직임으로 다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문을 위로 열어젖혔다. 쿵 하고 뭔가가 옆으로 넘어지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어느새 어둠에 적응했던 모양이었다. 올라와 보니 찔러 오는 햇빛이 부담스러워 눈살이 찌푸려졌다. 종이가 많은 곳 특유의 고소한 나무 향과 옅은 먼지 냄새가 났다.

두 사람은 본관에 있는 서고에 서 있었다. 햇빛은 벽면 위쪽에 천장에 닿을 듯 높은 곳에 만들어져 있는 창문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좌우 어느 쪽을 둘러봐도 책장에 죽간이며 돌돌 말린 서찰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전술서며 무공서, 정갈하게 꽂혀 있다기보다는 되는 대로 남는 걸 모아 둔 느낌이었다.

아까 소리를 내며 넘어졌던 건 죽간으로 가득 채운 나무 상자였다. 유준은 다시 상자를 끌어당겨 비밀통로의 출구를 감췄다. 소호가 재빨리 한 팔을 거들었다.

“이쪽으로.”

유준은 담담한 걸음걸이로 서고(겸 창고)를 빠져나갔다.

단출한 나무 문을 하나 열었을 뿐인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고급스러운 흑단목 탁자와 정갈하게 꾸며진 방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태산을 그린 풍경도와 명필이 쓴 듯 용사비등한 글씨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값비싸 보이는 붉은색 비단 장식은 주작방의 집무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소호의 시선이 주변을 방황하다 한곳에 고정되었다. 시큼한 먹 향이 허공에 떠도는 곳,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서찰에 글씨를 적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아……!”

소호는 탄성을 내뱉었다.

붉은색 비단 옷을 입었고, 관모를 올려 쓰진 않았으나 관에서 일하는 관인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남자였다.

남자?

아니, 얼핏 봐선 여인으로도 볼 수 있을 만큼 선이 가는 외모였다. 얼굴에는 살짝 분칠마저 하고 있었다. 매력적이지만 신경질적으로도 보이는 눈매, 고집이 세 보이는 얇은 입술을 지녔다. 특이한 점은 글씨를 쓰는 손에 있었다.

그는 붓을 엄지와 검지만으로 붙잡고 있었다.

나머지 손가락은 인위적으로 잘려 나간 듯 첫 번째 마디 이후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팔꿈치와 팔목의 각도를 고정시킨 채 글씨를 써 나가는 모습이 놀랍도록 정교했다.

유준은 그의 정면에 우뚝 서 있었다.

숨도 크게 쉬지 못할 만큼 분위기가 고요했다. 그 사람이 글씨를 쓰는 행위를 멈추길 기다리는 게 틀림없었다.

소호는 놀라움을 느꼈다.

유준의 태도가 사문의 존장을 대하듯 공손했던 것이다.

“후우.”

마침내 글씨가 마무리되고, 분칠한 얼굴의 사내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붓을 옆으로 내미니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모를 소동 한 명이 재빨리 그 붓을 받아 들었다.

“기다리게 했군요. 미안해요. 급한 서찰이라서.”

나긋나긋한 말투였다.

소호는 그제야 유준의 말투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평소 유준의 말투와 비슷한 느낌은 착각이 아닐 터였다.

“아닙니다. 괜찮았습니다.”

“준이야 그랬겠지만, 처음 보는 소년에겐 결례를 저질렀네요. 지루하진 않았나요?”

거친 사내들은 쓰지 않는, 귓가에 감기는 듯한 목소리였다.

소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았어요. 글을 쓰는 모습이 정갈해서 재밌었어요.”

“그랬나요? 칭찬을 해 주다니 고맙네요.”

빙긋 웃는 모습, 만개한 꽃처럼 성숙한 여인의 염기가 풍겼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준과 소호에게로 다가왔다. 그리 크지 않은 키, 평범한 체구였으나 가까이 다가오니 놀랄 만큼 존재감이 컸다.

“준이가 미리 설명을 했을 리는 없고, 아마 얼떨결에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끌려왔겠죠. 맞나요?”

“네. 맞아요. 유준 선배가 딱 그렇게만 말했어요.”

“그렇겠죠.”

나직한 웃음 뒤, 사내가 친절한 태도로 인사했다.

“반가워요. 내 이름은 왕진. 현재 황실에서 황태자 전하를 돕는 사람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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