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23화
제16장 무공의 이유(7)
이 나라의 차기 황제를 보필하는 자.
왕진은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하였다. 관직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자라면 크게 놀랐을 직위였으나 안타깝게도 상대는 소호였다.
“그것 참 힘드셨겠네요.”
소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깊이 공감하는 듯한 눈빛으로 왕진을 바라보았다.
십이 세 인생.
길지 않은 삶이었으나 철없는 꼬마 아이라면 소호도 이미 겪어 본 것이다.
“……뭐라고?”
왕진이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놀라워했다. 심지어 평소에 감정 기복을 많이 보여 주지 않던 유준조차 숨소리가 흐트러졌다.
“부모님한테 한 번도 혼나 보지 못한 아이를 가르치는 건 되게 어려운 일이었어요. 자기가 잘난 줄 아는 아이라면 더더욱…… 후우……. 그건 겪어 본 사람만 아는 거죠. 왕 대인도 고생이 많았겠네요.”
살짝 숙인 소호의 얼굴에서 과거가 있는 사람 특유의 애수가 감돌았다.
지금쯤 은자촌에서 혼자 지내고 있을 아이, 기옥이를 생각하면 소호는 지금도 뿌듯했다.
기옥이가 어떤 아이였던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콧대를 높이고 남을 깔아보는 것 하나밖에 없던 아이였지 않나.
소호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가슴을 쭉 폈다. 그랬던 기옥이가 소호를 형이라고 부르고, 마을 일을 돕게 된 것은 그야말로 개과천선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모두 소호의 공이었다.
“후후후훗.”
왕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붓을 들고 있던 소동과 유준이 그 모습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역시 재미있는 친구군요. 이야기 듣던 것과 또 달라요.”
“아! 제 이름은 소호예요. 장소호.”
소호는 작지만 다부진 주먹으로 격식 있게 포권을 취했다.
“후훗, 잘 알고 있어요. 백호방의 작은 호랑이.”
“저를 어떻게 아세요?”
“무산학관에 있는 사람들한테 이름을 들었답니다. 무(武)에 재능이 있는 친구라고 들었는데……. 그것뿐만이 아닌 친구였군요.”
왕진은 허리춤에서 검은색 섭선을 꺼내어 촤르륵 펼쳤다.
“맞는 말이에요. 참으로 맞는 말이군요. 부모님한테 한 번도 혼나 보지 않은 아이라……. 그렇지요. 그런 아이가 제대로 자랄 리가 없죠. 황태자 전하를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니. 어째서 저는 지금껏 그런 생각을 못 해 본 걸까요. 이 왕진, 어린 소년에게 한 수 배우는 느낌이에요.”
소호는 검은색 섭선 위로 빼꼼히 올라온 왕진의 눈이 즐거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 모양은 누가 봐도 웃는 모습이다.
‘근데 쟤는 왜 덜덜 떨고 있는 걸까?’
어째서일까.
왕진의 시종으로 보이는 작은 꼬마아이가 낯빛이 창백해진 채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소형제(小兄第)의 말이 맞아요. 고생했지요. 부모한테 한 번도 혼나 보지 못한 데다, 제대로 교육도 못 받은 황태자는 정말이지…… 다루기가 힘들지요. 고생을 많이 했답니다. 난폭하기가 화과산 돌원숭이 못지않아요.”
“제천대성? 천방지축인가 보네요. 그것 참 힘드셨겠어요. 그런데 계속해서 까불면 꿀밤을 한 대 쥐어박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그렇던데.”
“후후훗, 꿀밤 한 대뿐인가요. 더한 것도 하고 싶었지요.”
왕진의 말투는 단호하고 명확했다.
“저는 한 번 때려 줬는데요.”
“호오, 반응이 어땠나요?”
“굉장히 분해하긴 했는데, 그래도 그 후로 좀 달라졌어요.”
“저도 한번 그래 보고 싶군요. 진심으로.”
‘계속 떨고 있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시선을 주지 않으려 해도 워낙 손발을 덜덜 떨고 있으니 자연스레 시선이 소동에게로 가 버린다. 아이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얼굴로 왕진의 뒷모습을 애절하게 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왕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후우, 하지만 사람이 나이가 들면 제약이 많아진답니다.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살 수가 없어요. 이 몸의 어깨에 걸려 있는 일들이 워낙 많아서. 내 맘대로 하고 살 수가 없답니다.”
“힘드시겠네요. 어른들은 다들 힘들어 보여요.”
“후훗, 그렇지요. 어린아이일 때는 일이 잘못되어도 치기 어린 실수지만, 나이가 들면 능력이 부족한 탓이 되니까요.”
탁 소리가 나게 섭선을 다시 접은 왕진이 소호에게 자리를 권했다. 탁자와 똑같이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의자였다.
“이제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죠. 후후, 선아, 그리 걱정할 것 없단다. 여기는 우리들만 있는 곳이잖니? 여기서 하는 말들은 밖으로 새 나갈 일이 없단다. 그러니 차나 한 잔 준비해 주련?”
선이라고 불린 소동은 그제야 눈에 띄게 안심하며 종종걸음으로 찻물을 가지러 뛰어갔다.
소호는 어느새 왕진과 마주 앉아 있었다. 호위 무사처럼 묵묵히 서 있는 유준과 잔잔하게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는 왕진, 두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한 사람들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나는 이곳 무산학관의 설립자랍니다. 그건 알고 있나요?”
“어? 그랬어요? 몰랐어요. 저는 학관장님이 세운 학관인 줄 알았어요.”
“그래요. 다들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실제로 가면철왕이 많은 노력을 했지요. 저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길 바라고요. 하지만 사실은 제가 황실의 힘으로 학관의 설립을 추진했고, 소림과 무당의 무공 지원을 얻어 냈으며, 마지막으로 당시 무림맹에 있던 가면철왕에게 학관을 책임지길 부탁했어요. 그래서 만들어진 게 무산학관이지요.”
“아…….”
소호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거대한 학관을 만든 게 눈앞에 있는 사람이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학관은 왜 만드셨어요?”
“왜냐? 그래요. 그게 중요하지요. 저는 말이죠. 꿈이 있답니다.”
나긋나긋한 말투, 귀에 착 감기는 듯한 목소리 사이로 날카로운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분위기가 일변했다.
왕진의 두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나는 무림 강호가 없어지길 원합니다. 지금의 관과 무림. 모순된 관계를 뒤집어엎고 모든 걸 새로 시작하길 바라고 있어요.”
과격하고 또 과격한 말이었다. 소호는 무림 강호라는 가상의 땅이 활활 불타오르는 모습을 상상했다. 왕진의 의지는 뜨거웠고, 그의 의지는 강철처럼 굳건해 보였다.
“관과 무림은 상호불가침이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서로 침범하지 아니한다? 우습지요. 명 황실 아래 다 같은 백성이거늘 어찌하여 둘로 나뉘어져 살아야 하나요. 어떨 때는 관의 법령을 따라야 하고, 어떤 때는 무림인들의 눈치를 봐야 하다니. 고통받는 백성들은요? 민초들은 누구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하는 것일까요?”
“아……!”
“후훗, 말이 어려웠나요? 그래요. 사실 소형제도 이미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니 이 말에 크게 공감하기 어렵겠죠. 그래서 내가 지금 바라는 건 이거예요. 값비싼 보석의 가치를 떨어뜨리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난데없는 질문이었으나 소호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어…… 많아지면 돼요. 길가에 돌멩이처럼요.”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소형제는 이해가 빠르군요.”
왕진은 만족스러운 듯 붉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무림인들을 평범하게 만들자. 그러려면? 무림인이 많아져야 한다. 그러면 무림인이 많아지려면? 무공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자. 그럼 명 제국의 백성들 모두를 ‘무림인’처럼 만들려면?”
“아……?”
“이해했나요? 내가 왜 무산학관을 설립했는지?”
왕진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듯이 웃었다.
“이곳은 시작이자 끝. 중원 무학의 성지가 될 거예요. 누구나 익힐 수 있는 무공, 저 멀리 산골 벽촌에서 태어난 아이도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무공을 익히는 세상. 그래서 무림인이라는 게 그리 특별하지 않은, 그저 가진 힘을 마구 쓰는 파락호에 불과한 세상.”
소호는 그런 세상을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자기 자신이 바로 그런 세상에서 지금껏 살아왔으니까 말이다.
“저는 그런 세상을 꿈꿉니다. 그걸 위해선, 개인적인 작은 인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소호는 왕진이 그 말을 할 때 자신의 잘려 나간 손가락을 응시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소호는 불안감을 느꼈다.
왕진의 말은 타당하다.
심지어 최근 들어 소호가 스스로 고민하고 있던 문제와 더불어 생각하니 민초들을 위해서 이보다 옳은 방향은 없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쪼르륵―.
그때 선이라 불린 소년이 다가와 왕진과 소호에게 찻물을 따라 주었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가 찻잔을 따뜻하게 데워 주고 있었다. 코끝으로 부드러운 찻잎향이 흘러 들어왔다. 왕진은 용정차라고 말해 주었다.
“그 자세, 다도를 알고 있군요?”
“어머니랑 작은 어머니께서 두 분 다 차를 좋아하셔서요.”
“그랬군요. 잘 배웠네요.”
왕진은 잔잔하게 웃으며 소호를 칭찬해 주었다.
소호는 왕진과 함께 찻물을 한 모금 삼킨 뒤,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과연 왕 대인의 말대로 될 수 있을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뭐가 좋아요?”
소호는 스스로도 오랫동안 궁금했던 물음을 던졌다.
이곳 무산학관에서만 해도 강한 학생과 무공이 약한 학생 사이의 간극이 꽤나 큰 편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건 찬성이지만……. 똑같이 강해지고 싶다고 해서 똑같은 무공 실력을 가질 리가 없다. 슬프지만 세상엔 타고난 재능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맞는 말이지요. 소형제처럼 무공에 재능이 있는 친구나, 흔히 무림 강호의 명문이라 불리는 문파들이 있죠?”
“네. 재능 있고 강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고 했어요. 거기선 밥 먹고 오로지 무공만 연습하고요. 그 사람들의 목표는 오로지 무공을 수련해서 부처님이나 신선님이 되는 거래요.”
“그렇죠. 맞아요. 어찌 보면 대단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그런 인재들이 어째서 국가를 위해 일하지 않고 홀로 존재할까요. 그리고 심지어는 탐관오리들을 계도한답시고 나라가 임명한 관리들을 죽이기도 하지요? 그런 이야기가 버젓이 저잣거리의 영웅담으로 떠돈답니다.”
왕진은 침중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은 위험해요. 그것도 너무나 위험해요.”
“그래요?”
“네. 정도를 지킨다? 아뇨, 그들은 너무 큰 힘을 지녔어요. 곁에 두기 위험한 칼이지요. 나라를 바꾸려면 바꿀 수도 있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나라의 관리로서 용납할 수가 없어요.”
그 순간 소호는 얼마 전, 아랫마을에 산다던 왕오의 말을 떠올렸다.
“호랑이가 자기는 함부로 사람 안 죽인다면서 마을 근처를 어슬렁거리면 괜찮겠습니까? 그러다 호랑이가 밥 좀 달라고 하면? 내가 다음 날 굶는 한이 있어도 줘야지요. 어떻게 안 죽인다는 말만 믿고 뻗대겠습니까요.”
곁에 두기 위험한 칼과 마을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호랑이.
소호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무림인에 대해서 황태자를 모시는 관인과 아랫마을 촌민의 생각이 똑같다니.
“한 번의 개혁만 있으면 된답니다. 무공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나랏일을 하기 위해 몰려드는 나라. 민초들을 괴롭히는 관리가 있다면 근처 무림 문파가 아니라 나라의 관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나라. 그런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 아닐까요?”
옆에서 유준과 선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소호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후우, 쉽지 않은 일이지요. 앞으로 나아갈 일도 많아요. 그리고 저는 인재가 많이 필요합니다.”
촤르륵― 소리와 함께 왕진의 검은색 섭선이 다시 펼쳐졌다. 왕진의 두 눈이 뚫어져라 소호를 응시했다.
“소형제. 나의 일을 돕지 않겠어요? 우리 다 같이 나라를 바꿔 봅시다. 소형제에게는 그럴 만한 재능과 능력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