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풍운객잔 2부-99화 (228/686)

4권 24화

제16장 무공의 이유(8)

소호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잠시 동안 눈만 끔뻑거렸다.

능력을 인정받은 것은 기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 그러니까…….”

소호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감사하긴 한데.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나라를 위해서라니. 지금 뭔가 하라고 해도 저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요.”

“사별삼일(士別三日)이면 괄목상대(刮目相對)라. 선비는 헤어졌다가 사흘 만에 만나면 눈을 씻고 다시 보아야 한다지요. 능력이란 사람과 함께 성장하는 법.”

탁, 소리가 나게 섭선을 접은 왕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대의(大義)를 함께할 수만 있다면 나이가 무슨 상관일까요. 더군다나 우리는 커다란 울타리가 되어 줄 수 있어요. 소형제가 성장할 수 있도록 무엇이든 지원해 줄 거란 이야기이지요.”

“으음…….”

“후훗, 소형제는 무인이니까 이렇게 말해 볼까요? 아무리 큰 재능을 지녔어도 사람은 언젠가 벽을 만나는 법이랍니다. 한 가지 묻겠어요. 아무리 무산학관이 좁다고 날뛰는 백호방의 작은 호랑이라도,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상대를 한 명쯤 생각할 수 있을 테지요?”

“아……!”

아무리 노력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

재능이 있어도 언젠가 만나게 될 큰 벽.

그 순간 소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넓고 든든한 한 사내의 등이었다.

“그게 누구든 상관없어요. 장담하지요. 나는 소형제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 사람을 이기도록 만들 수 있답니다. 백호방의 작은 호랑이가 천하를 호령하는 대호가 되도록 만들 수 있어요. 나는 그럴 만한 기술과 능력이 있습니다.”

“…….”

“못 믿겠나요? 어때요? 제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나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잔잔하게 웃는 얼굴, 허리는 꼿꼿이 세웠고 두 눈에선 자신감 가득한 정광이 번뜩였다.

소호는 왕진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단한 인물이었다.

왕진의 그릇은 특이한 외모로는 가려지지 않았다. 행동과 기백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소호는 그렇기에 더더욱 진지하게 생각했다. 어쩌면 왕진은, 소호가 생각하는 벽이 누구인지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왕진의 지원으로 강해진다?

아니다. 소호의 생각과는 맞지 않다.

“못 믿고 있군요. 아니,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려나요.”

왕진은 소호의 생각을 알아챈 듯 씁쓸하게 웃으며 한발 뒤로 물러서 주었다. 소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사실 제가 학관에 오기 전에도…… 마을 사람들한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할아버지들도 격렬하게…… 엄청 격렬하게 도와주셨고, 삼촌들도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고 하고……. 그때 느낀 건데요. 사람은 준비되어 있는 만큼 얻는 것 같아요. 받아들이는 쪽에서 하고 싶지 않으면 결국 안 되더라고요.”

말을 할수록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소호는 평소의 자신을 되찾았다.

햇빛이 비치는 듯한 미소.

환한 웃음을 지으며 왕진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지금이 좋아요. 학관에서 아이들과 무공을 익히면서 놀고 싶어요. 그걸로 충분해요.”

왕진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잠시 깊이 생각에 잠겼다가, 찻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래요. 씨를 뿌리자마자 수확할 수는 없는 법이겠지요. 모든 것에는 적절한 때가 있을 터.”

“학관에는 강해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굉장히 많아요. 엄청 간절한 친구도 있어요.”

“후훗, 제가 아무에게나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아니랍니다.”

왕진은 단호하게 거절한 뒤 부드럽게 웃었다.

“이 말만은 해야겠군요. 소형제. 화전촌에서 왔으니 잘 알고 있겠지만, 농사가 성공하려면 한 번 풀밭을 태우는 과정이 필요하답니다. 그래야 비옥한 땅이 되어서 튼튼한 벼가 자라나거든요. 무림 강호도 마찬가지. 비옥한 토양이 되기 위해 한 번 태워야 할 필요가 있답니다. 그 때가 되면, 힘을 빌려주세요.”

왕진은 자신의 소동에게 손짓을 하면서 ‘그것’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자, 받으세요. 오늘 소형제와 내가 나눈 대화의 증표입니다. 악운으로부터 지켜 주는 수호부 같은 거예요. 안에 들어 있는 목걸이가 백호방 작은 호랑이의 목숨을 한 번을 지켜 줄 것이랍니다. 단! 다른 사람에게 말하거나 넘겨주면 안 돼요. 꼭 본인이 갖고 있어야 합니다.”

고급스러운 백색 비단에 금사로 호랑이 문양을 새겨 놓은 손바닥만 한 주머니였다.

소호는 왕진의 허락을 얻은 뒤 주머니를 열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소호의 중지만 한 길이, 섬세한 세공으로 기묘한 문양을 새겨 놓은 은판 가운데에 타원형의 호박 보석이 고정되어 있는 목걸이였다.

호박의 모습은 특이했다.

전체적으로 투명한 황갈색 보석이었으나, 가운데에 세로로 검은색 줄이 새겨져 마치 고양이의 눈처럼 보였다.

“신기하게 생겼다…….”

소호는 시선을 완전히 빼앗겨 버렸다. 왠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물건이었다.

“아……!”

옆에서 들려오는 놀란 경호성에 소호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소호의 내부.

파계승 할아버지에게 배웠던 역근경 진기가 중단과 상단전으로 갑자기 치솟아 마음을 평온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불요신승이 옆에서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치는 듯한 기분이었다.

“유준 선배?”

“으응.”

“이거 귀한 건가요? 받으면 안 돼요?”

목걸이를 보고 놀라서 경호성을 내뱉은 것이 유준이기에 던진 질문이다.

유준은 드물게 당황하며 왕진을 쳐다봤다. 왕진의 표정은 웃는 얼굴 그대로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귀한 물건이긴 한데, 대인께서 주셨으면 그게 너의 것이라는 뜻일 거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야 해.”

“귀한 거였구나. 그럼 이건…….”

소호가 거절하면서 다시 내미려는 찰나, 촤르륵― 하고 왕진이 섭선을 펼치면서 엄지손가락 하나뿐인 왼손을 펼쳐 소호의 행동을 막았다.

“거절은 불허합니다. 난 이미 소형제에게 그걸 주었어요. 돌려준다면 받지 않습니다.”

“네? 그렇지만, 귀한 걸 받으면 제가 불편해요. 엄마가 이유 없는 선물은 함부로 받는 게 아니라고 하셨어요.”

“후후 현명한 어머니시군요. 그렇지만 이건 이유가 없는 선물이 아니에요. 미래에 대한 투자랄까. 귀하든 귀하지 않든 이미 내가 호의로 넘긴 거예요. 거절은 불허합니다.”

왕진은 악동처럼 매력적인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걸 주지 않았군요. 선. 준비된 서찰도 하나 있지요?”

선은 기다렸다는 듯이 품속에서 붉은색 봉투를 꺼내 왕진에게 건네주었다.

“좋아요. 이것도 받으세요. 지금은 필요 없지만, 나중에. 소형제가 지금 의지하고 있는 장소를 벗어나 나의 도움을 원할 때 펼쳐 보도록 하세요.”

“도움…….”

소호는 마치 춘절 봉투처럼 새빨간 종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백호 주머니에 넣어서 갖고 있는 것도 좋겠네요. 목걸이처럼 그 서찰도 소형제를 한 번 구해 줄 터. 그리고 이건 내 느낌…… 아니, 예감이라고 해도 좋아요. 아마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에요.”

분칠한 얼굴에 윤기가 흐르는 붉은색 입술.

왕진의 의미심장한 미소는 소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올 때는 전래동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들뜬 기분으로 왔으나, 나갈 때는 깊은 생각에 빠져 묘한 침묵 속에서 밖으로 나왔다. 책 내음 가득한 서고를 지나 자그마한 햇빛이 스며드는 지하의 비밀 통로를 지날 때쯤 퀴퀴한 공기 속 옅은 이끼 냄새가 꽤나 답답하게 느껴졌다. 먼저 말문을 연건 유준이었다.

“소호, 너는 추 대인을 안다고 했었지? 그분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

소호는 고개를 들어 유준을 바라봤다.

일부러일까.

유준은 앞만 보고 걷고 있어 뒷모습밖에 보이질 않았다.

“추 할아버지는 정이 많고 호기심도 많은 분이세요. 농사를 하겠다고 이것저것 기르시는데 진득하게 하나만 기르질 못한다고 만날 할아버지들끼리 다퉈요. 아들인 추룡 삼촌도 되게 재밌는 삼촌인데, 서역으로 멀리 여행을 떠나서 못 본 지 오래됐네요. 아 참! 추 할아버지가 최근에는 더덕에 빠져서 그것만 캐고 다니셨어요.”

“더덕? 더덕을 캔다고? 추 대인이?”

“네! 맨날맨날 뿌리를 캐요. 캐는 보람이 있는 작물이라나 뭐라나. 저는 쓰기만 해서 뭐가 좋은지 모르겠는데 말이에요. 있죠. 심지어 캘 때 조심하지 않으면 손바닥도 따가워요.”

유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그만한 무공을 지닌 분이 더덕을 캐고 있다니. 신기한 이야기야. 내가 예전에 그분을 따라갔다면 나도 너희 마을에서 그렇게 농부처럼 자랐을까?”

“아마도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 유준 선배가 추 할아버지랑 같이 있었으면…… 제가 형이라고 부르면서 같이 토끼를 잡으러 다녔을지도 모르겠네요.”

“토끼? 토끼를 잡는 게 재밌어?”

“유준 선배는 토끼를 잡아 본 적이 없어요?”

“으응, 한 번도 없는데.”

“세상에!”

소호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세상에 토끼를 한 번도 잡아 보지 않은 소년이 있다니.

“토끼 잡이가 얼마나 재밌는데! 우리 마을 토끼는 특히 더 빨라요. 길쭉한 귀만 빼꼼히 내밀었다가 잠깐 방심하면 옆에 있는 땅굴로 들어가 버린다니까요? 게다가 뛰어다니는 게 얼마나 빠른지! 머리를 잘 쓰지 않으면 절대로 못 잡아요. 가끔 어른들도 실패한다고요.”

“하하, 듣기만 해도 재밌어 보인다. 잡으면? 토끼를 잡으면 그다음엔?”

“먹어야죠.”

소호는 씩 웃으면서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땀 흘리며 고생해서 잡은 토끼를 장작에 구워 먹는 맛. 기름기로 바삭하게 튀겨진 껍질과 촉촉하게 육즙이 가득한 살코기.

그건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모르는 맛이다.

“하하, 역시 너희 마을은 재밌는 곳이야.”

분명히 서로 웃고 있는데, 소호는 유준이 묘하게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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